자전(自轉) / 허만하

2019. 1. 17. 23:08시,좋은글/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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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적막하게 자기 굴대를 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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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헤치는 아침노을과 / 저무는 저녁노을 사이로 /
시는 타오르는 자기 중심을 바라보며 / 끝내 자기의 중심이 되지 못한다 /
해와 달은 관념 안에서 뜨고 지지만 / 물질의 고독은 슬픔보다 깊다 //



낙동강의 밤과 낮 / 적포교에서




自轉 / 허만하 
 
지린내 흰 벽에 스며 있는
우중충한 파리 뒷골목에서
지평선 위에서 노을이 무너지는
러시아 벌판으로
가로등 불빛이 안개비에 젖고 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공항에서
풀 포기 하나 없는
끓는 정오의 사막으로
지구는
적막하게 자기 굴대를 돌고 있다
헤매는 사람 그림자 사라진 한겨울 거리에서
더위가 초록색 가지를 펼치는 아마존 기슭까지
지구는 고요히 자기 굴대를 돌고 있다
예민한 감수성이
바람을 앞서 가지를 떠나는
황갈색 잎새가 되는 것처럼
자구는 바람의 손길을 풍화한 피부로 느낀다
감청색 바다는 하늘의 귀에
존재의 수수께끼를 속삭이고
물결치는 산맥의 성대는 투명한 바람을 노래한다
시는 바람을 언어로 느낀다
초속 30키로미터
무수한 별들을 헤집고 치닫는
지구의 속도가 남기는
파란 바람 소리
목성 둘레를 부는 영하의 바람처럼
나그네는 머물지 않고 지난다
언어는 머물지 않고 지난다
낯익은 풍경은 나에게서 멀어지고
낯선 언어가 내 앞으로 다가선다
언어는 머물지 않고 지난다
어둠을 헤치는 아침노을과
저무는 저녁노을 사이로
시는 타오르는 자기 중심을 바라보며
끝내 자기의 중심이 되지 못한다
해와 달은 관념 안에서 뜨고 지지만
물질의 고독은 슬픔보다 깊다 


출처 : 계간 『문학수첩』2007년 가을호



허만하(許萬夏, 1932.3.29~)


대구광역시 출신,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대학원 병리학 박사, 1997 고신대학교 병리학 교수로 정년퇴임

1957년 <문학예술>지 추천으로 등단. 토착적이고 장인적인 시정신 속에서

순수의지와 정열,가없는 생명애를 바탕으로 한 시세계를 펼쳐온 의사 시인.

 '지층','바위의 적의'를 시작으로 '카이로 일기','이별' 등 70여 편 모음.
1980~80년 부산문인협회 회장 역임


-상훈-

상화시인상

1999년 제1회 박용래 문학상

2000년 한국시인협회상

2003년 이산문학상

2003년 보관문화훈장

2004년 제5회 청마문학상

2006년 제3회 육사시문학상
2009년 제2회 목월문학상

2013년 대한민국예술원상

-시집/산문집-

『해조』(삼애사), 1969

부드러운 시론』(열음사), 1992

모딜리아니의 눈』(빛남), 1997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솔출판사), 1999

낙타는 십리 밖 물 냄새를 맡는다』(솔출판사), 2000

청마풍경』(솔출판사), 2001

길과 풍경과 시』(솔출판사), 2002

『물은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솔)』, 2003

길위에서 쓴 편지』(솔), 2002

허만하시선집』(솔), 2005

시의 근원을 찾아서』(램덤하우스), 2005

『야생의 꽃』(솔), 2006

『바다의 성분』(솔), 2009

『시의 계절은 겨울이다』(중앙북스), 2013

『언어이전의 별빛』(솔),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