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네 집 / 김용택

2019. 3. 2. 00:01시,좋은글/詩



 그 여자네 집 / 김용택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웠던 집
 어디 갔다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 속에 깜박깜박
 살아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 닿고 싶은 집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
 그 여자
 아버지와 그 여자
 큰오빠가
 지붕에 올라가
 하루 종일 노랗게 지붕을 이는 집
 노란 초가집


 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 여자네 집 마당이 보이고
 그 여자가 마당을 왔다갔다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말인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 소리와
 옷자락이 대문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면
 그 마당에 들어가서 나도 그 일에 참견하고 싶었던 집


 마당에 햇살이 노란 집
 저녁 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집
 뒤안에 감이 붉게 익는 집
 참새떼가 지저귀는 집


 보리타작, 콩타작 도리깨가 지붕 위로 보이는 집
 눈 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숭그리고
 아직 쓸지 않은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 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싱그러운 이마와 검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어두운 김칫독 안으로
 하얗게 내리는 집
 김칫독에 엎드린 그 여자의 등에
 하얀 눈송이들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
 내가 함박눈이 되어 내리고 싶은 집
 밤을 새워, 몇밤을 새워 눈이 내리고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늦은 밤
 그 여자의 방에서만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면
 발자국을 숨기며 그 여자네 집 마당을 지나 그 여자의 방 앞
 뜰방에 서서 그 여자의 눈 맞은 신을 보며
 머리에,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가만가만 내리는 눈송이들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가만 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그
 여
 자
 네 집


 어느 날인가
 그 어느 날인가 못밥을 머리에 이고 가다가 나와 딱 마주쳤을 때
 "어머나" 깜짝 놀라며 뚝 멈추어 서서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반가움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환하게, 들판에 고봉으로 담아놓은 쌀밥같이,
 화아안하게 하얀 이를 다 드러내며 웃던
 그 여자 함박꽃 같던 그
 여자


 그 여자가 꽃 같은 열아홉살까지 살던 집
 우리 동네 바로 윗동네 가운데 고샅 첫집
 내가 밖에서 집으로 갈 때
 차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집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지금은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집
 내 마음 속에 지어진 집
 눈 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
 눈 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그 여자네 집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가
 있던 집
 그
 여자네
 집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 각. 하. 면.......


 <그 여자네 집> 전문
  출처 : 《 그 여자네 집》(창작과비평사, 1998)

 

김용택(金龍澤, 1948. 8. 26 ~ )

대한민국의 시인 겸 수필가, 호(號)는 섬호(蟾滸)

전라북도 임실군 진메마을에서 태어나 임실 운암국민학교,
순창중학교, 순창농업고등학교 졸업하였다. 그 이듬해에 우연히 친구들을 따라

교사시험을 보고 스물한 살에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고, 교직 기간 동안 자신의 모교인

임실 운암초등학교 마암분교(현 마암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시를 썼다.

교직 기간 동안 종종 가르치는 아이들의 시를 모아 펴내기도 하였으며, 그가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학생들이 전학오면서 2005년에 마암분교가

마암초등학교로 승격되었다. 2009년 2월 28일자로 40년간 교직을 정년 퇴임했다.

그는 섬진강 연작으로 유명하여 ‘섬진강 시인’이라는 별칭이 있다.

1982년 《창작과비평사》에서 펴낸 21인 신작 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섬진강 1〉외 8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35세에 등단했다.

1986년 6회「김수영문학상」, 1998년 12회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했다.

2001년에는 독립단편영화 《들》의 조연으로 영화배우에 데뷔하였고

2010년에는 이창동이 감독한 영화 《시》에 조연하기도 하였다.
특별히 좋아하는 시인은 김소월, 김수영, 시인이다.

좋아하는 시인의 이름을 가진 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교직 생활을 하면서 초등학생 제자들에게 시를 가르쳤다.

 

- 시집 -
《꺼지지 않는 횃불》(창작과비평사, 1982)
《섬진강》(창작과비평사, 1985)
《맑은 날》(창작과비평사, 1986)
《누이야 날이 저문다》(청하출판사, 1988), 재출간(열림원, 1999)
《꽃산 가는 길》(창작과비평사, 1988)
《그리운 꽃편지》(풀빛, 1989)
《그대, 거침없는 사랑》(푸른숲, 1993)
《강같은 세월》(창작과비평사, 1995)
《그 여자네 집》(창작과비평사, 1998)
《나무》(창작과비평사, 2002)
《연애시집》(마음산책, 2002)
《그래서 당신》(문학동네, 2006)
《키스를 원하지 않는 입술》(창작과비평사, 2013)
《울고 들어온 너에게 》(창비, 2016)

- 동시집 -
《콩, 너는 죽었다》(실천문학사, 1998)

- 산문집 -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한양출판, 1994)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창비, 1999)

- 에세이 -
《촌놈 김용택 극장에 가다》(이룸, 2000)

- 그 외  -

《김용택의 섬진강 이야기, 전8권》(문학동네, 2013)
《옥이야 진메야》(살림어린이, 2011) 등

 

- 수훈내역 -
2009.2.28 홍조근정훈장(덕치초교 교사 정년퇴임)
2018.3.22 국민훈장 동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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