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좋은글(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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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 갈채를 보낸다 / 유안진
박수 갈채를 보낸다 / 유안진 춘설은 차라리 폭설이었다 겨울은 최후까지 겨울을 완성하느라 최선을 다했다 핏덩이를 쏟아내며 제철을 완성하는 동백꽃도 피다 진다 칼바람 속에서도 겨울과 맞서 매화는 꽃 피었다, 반쯤 넘어 벙글었던 옥매화는 폭설을 못 이겨 가지째 휘어지다 끝내는 부러졌다. 겨울 속에 봄은 왔고 봄속에도 겨울은 있었다 두 시대가 동거해야 하는 불운은 항상 앞선 자의 몫이었다 정작 봄이 무르익었을 때는 매화는 이미 꽃이 아니다 앞서가는 자는 항상 이렇다 불행하지 않으면 선구자(先驅者)가 아니다 지탄 받는 수모 없이 완성되는 시대도 없다 춘설도 동백꽃도 꽃샘추위도 제 시대를 완성하고 죽는 후구자(後驅者) 그 사람들인 것을. 출전 : 『다보탑을 줍다』(창비. 2004) 유안진(柳岸津, 1941. 10..
2019.03.17 -
그 여자네 집 / 김용택
그 여자네 집 / 김용택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웠던 집 어디 갔다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 속에 깜박깜박 살아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 닿고 싶은 집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 그 여자 아버지와 그 여자 큰오빠가 지붕에 올라가 하루 종일 노랗게 지붕을 이는 집 노란 초가집 어쩌다..
2019.03.02 -
일상의 기적 / 박완서
일상의 기적 / 박완서 덜컥 탈이 났다. 유쾌하게 저녁식사를 마치고 귀가했는데 갑자기 허리가 뻐근했다. 자고 일어나면 낫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웬걸, 아침에는 침대에서 일어나기 조차 힘들었다. 그러자 하룻밤 사이에 사소한 일들이 굉장한 일로 바뀌어 버렸다. 세면대에서 ..
2019.02.23 -
자전(自轉) / 허만하
. . 지구는 적막하게 자기 굴대를 돌고 있다 . . 어둠을 헤치는 아침노을과 / 저무는 저녁노을 사이로 / 시는 타오르는 자기 중심을 바라보며 / 끝내 자기의 중심이 되지 못한다 / 해와 달은 관념 안에서 뜨고 지지만 / 물질의 고독은 슬픔보다 깊다 // 낙동강의 밤과 낮 / 적포교에서 自轉 / ..
2019.01.17 -
새해 아침의 기도 / 안도현
새해 아침의 기도 / 안도현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조아리고 새해에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나 자신과 내 가족의 행복만을 위해 기도하지 말고, 한 번이라도 나 아닌 사람의 행복을 위해 꿇어앉아 기도하게 하소서. 한 사람, 한 사람의 기도가 시냇물처럼 모여들어 이 세상..
2019.01.08 -
그대들 눈부신 설목 같이 / 김남조
그대들 눈부신 설목(雪木) 같이 / 김남조 가고 오지 않는 사랑이 있으면 기다려 줍시다. 더 많이 사랑했다고 해서 부끄러워 할 건 아닙니다. 먼저 사랑을 건넨 일도 잘못이 아닙니다. 더 오래 사랑한 일은 더군다나 수치일수 없습니다. 요행히 그 능력 우리에게 있어 행 할 수 있거든 먼저 ..
2018.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