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1. 17. 07:55ㆍ여백/살아가는이야기
11월 13일, 직장 후배 익현이가 그렇게 뜸 들이던 결혼을 하는 날이어서
만사 재껴놓고 날을 비워 놓았는데 때 맞춰 뮤지컬 <명성황후>가 울산에 온다고 하여
얼른 전화로 예매를 했다. 3년전 울산을 다녀 간 <명성황후>가 얼마나 감동적이었던지
울산에 다시 오기를 기다렸는데 이 좋은 계절에 다시 울산을 찾은 것이다.
1995년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초연하여 올해로 15년째를 맞은 뮤지컬 <명성황후>는
우리나라 뮤지컬의 새 지평을 열고 저변확대에 크게 기여하며 한국 뮤지컬계의 국민 브랜드로
성장해 온 순수 창작 뮤지컬. 아시아 최초 뉴욕 브로드웨이와 런던 웨스트엔드 무대에 오르는 등
한국 창작 뮤지컬의 신화적 존재로 대표적인 국내 창작 브랜드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시놉시스(SYNOPSIS)
뮤지컬 <명성황후>는 1995년에 "명성황후" 시해 100주년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작품이다.
공연은 1866년 고종과 민자영의 혼례부터 임오군란, 갑신정변, 갑오개혁에 이어
1895년 을미사변(미우라 고로가 주동이 되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일본세력강화를 획책한 정변)까지의
역사사실을 드라마틱하게 그려내고 있다.
서곡과 함께 막이 오르면 1945년 8월 히로시마 상공의 거대한 버섯구름이 보인다.
시간은 거꾸로 흘러 1896년 히로시마 지방법원의 민비 살해범 공판으로 공연은 시작된다.
다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사건이 일어나기 전 이야기들이 하나 둘씩 나열된다.
만백성의 축원 속에서 혼례를 올린 고종과 민자경.
고종의 아버지 대원군은 그의 먼 친척뻘인 민자경을 왕비 자리에 앉힌다.
대원군은 이에 만족하며 쇄국정책과 섭정을 계속 이어나가고자 한다.
그러나 그의 며느리는 뛰어난 지략과 정치적 야심을 갖은 여인으로 그의 정치생활을 흔들어 놓는데..
한편 민비는 시아버지 대원군과 끊임없는 갈등 속에서 외교(러시아, 프랑스, 미국, 영국, 중국, 일본 등
다양한 나라와 문화교류를 시작)에 힘을 쏟기 시작한다.
한반도 점령에 야심을 꾸고 있던 일본은 민비가 자신들을 경계하자
그들의 계획에 걸림돌이 되는 그녀를 제거하기로 결정한다.
1895년 10월, 미우라는 대원군을 끌어들여 함정을 파고, 작전명 '여우사냥'을 감행하는데..
서양문물 개방, 삼국간섭, 일본 정부와의 갈들, 숨막히게 돌아가는 일본의 군사조치,
그리고,, 되돌릴 수 없는 역사적 사건, 억울한 죽음, 끊임없는 의욕들을
뮤지컬 <명성황후>로 지울 수 없는 그날의 사건을 되짚어 본다.
서막
서곡과 함께 막이 오르면 1945년 8월 히로시마 상공의 거대한 버섯구름이 보인다. 무대가 밝아지면서 1896년 히로시마 지방법원의 민비 살해범 공판 장면이 나타난다. 재판장의 심문에 피고 미우라와 공범들은 일본천황에 대한 그들의 충성을 다짐할 뿐이다.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모두 무죄 판결을 받는다.
제 1 막
1장 - 1866년 봄 경복궁에서 고종과 민자영의 혼례가 이루어진다. 만백성의 축원속에 민비는 조선의 국모로서 고종을 성심껏 받들 것을 서약한다.
2장 - 조선을 섭정하는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고수한다. 한편 어린 고종은 궁녀들과의 희락에 도취하여 나랏일에 무심하다. 민비는 사랑과 질투사이에서 방황하나 지혜롭게 마침내 고종의 마음을 사로 잡는다.
3장 - 무과시험에서 홍계훈은 장원에 오르고, 시위별감으로서 궁궐 수비 임무를 맡는다. 대원군은 세손이 없는 고종에게 후궁을 두기를 권유하고 민비는 무당 진령군을 불러들여 은밀히 굿판을 벌리며 득남을 기원한다. 한편 미국, 불란서, 독일의 상선이 문호개방을 요구하나, 대원군은 무력으로 그들을 쫓아 보낸다.
4장 - 천신만고 끝에 세자를 얻은 민비는 고종에게 친정을 펼칠 때가 되었음을 끈기있게 설득한다. 마침내 섭정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 대원군은 훗날을 기약한다.
5장 - 수구파와 개화파의 당쟁사이에 고종은 번민하나 민비는 개화정책이 옳은 결정이었음을 설파한다. 눈앞의 이견을 노리는 세계 열강들 중에서 일본이 선택되고, 일본상인들은 교묘한 상술로 논간을 부린다. 구식군이 반란을 일으켜 일본인을 살해하고 민비의 처형을 요구하자 민비는 피신하고, 대원군이 권좌에 복귀하여 실종된 민비의 장례식을 치루기를 지시한다.
6장 - 고종은 민비를 그리워하며 살아있기를 기원한다. 청주 사가로 피신한 민비는 나라근심과 고종, 세자를 향한 그리움을 토로하고, 홍계훈은 민비에 대한 충성을 다짐한다.
7장 - 대원군은 원세개 장군에 의해 중국으로 추방되고, 일본공사 이노우에는 고종에게 반란군 괴수의 처형 및 보상금을 요구한다. 마침내 궁궐로 돌아온 민비는 고종과 함께 왕실을 지켜나갈 것을 서약한다. 일본수상 이토오 히로부미는 조선을 대동아 공영권 구축의 교두보로 삼는데 민비를 장애물로 지적한다. 이토오는 미우라를 소개하며 모두 천황에 대한 충성을 서약한다.
제 2 막
8장 - 12년후 1895년 봄에 경회루에서 갑오경장을 축하하는 성대한 연회가 열린다. 화관무가 끝난 후 고종은 외국사절들에게 새로이 태어난 조선을 축복해주기를 요청한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의기양양한 이노우에는 민비를 회유하려 하나 민비는 도리어 러시아를 끌어드리려 한다. 모두 조선의 미래를 위해 축배를 든다. 궁궐 밖의 아이들은 왜 때아닌 눈송이가 매화꽃 위에 내리는지 의아해 한다.
9장 - 이노우에는 훈련대를 양성하고 조선의 개혁을 지원하기 위하여 차관을 제공할 뜻을 표명하지만, 민비는 일본의 저의를 의심한다. 러시아, 불란서, 독일 대사들로부터 삼국간섭이 결정되었음을 알게된 미우라는 민비 암살계획을 서두른다.
10장 - 세자는 삼강오륜을 공부하고 고종과 민비는 세자의 앞날을 축복한다. 신임 일본정권 공사 미우라 고로는 고종을 알현하고, 조선의 앞날이 순탄할 것이라고 아뢴다. 그의 속셈을 간파한 민비는 일본에 이용당할 가능성이 있는 훈련대를 해산시킬 것을 고종에게 권유한다.
11장 - 민비가 불어를 배우고, 미우라는 '여우사냥' 작전개시를 선포한다. 외교관 부인들은 민비에게 일본의 횡포는 용납되지 않을 것 임을 다짐한다. 작전성공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다짐한 미우라와 낭인들은 천황을 위해 건배하며 '여우사냥' 의식을 거행한다.
12장 - 민비가 모처럼 세자와 행복한 망중한을 즐기고 있을 때, 홍계훈 장군이 궁성 주변의 이상한 동태를 보고한다. 민비는 의연하게 대응하지만, 불안한 홍계훈은 자신의 첫사랑인 민비를 위해 목숨을 내놓겠다고 맹세한다. 홀로 남은 민비는 왕비로 지낸 삼십년 세월에 대한 회한에 잠긴다.
13장 - 훈련대의 반란을 진정시켜 달라는 일본의 요청으로 궁궐 앞에 이른 대원군은 민비를 해치지 말라고 간청한다. 일본 낭인들이 궐안에 난입하고, 홍계훈은 이들과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최후를 맞는다. 상궁들은 민비의 피신을 간청하나 민비는 고종과 세자를 두고 갈수 없다며 거부한다. 낭인들은 민비의 처소까지 침입하여 민비의 소재를 밝히기를 거부하는 궁녀들을 참살한다. 마침내 민비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파란 만장한 일생을 마감한다. 세자는 오열하고, 고종과 대원군은 어쩌다 이런 비극을 보게 되었는지 탄식을 거듭한다.
맺음막
비탄에 잠겨있는 온 백성에게 민비의 혼이 나타나 모두 결연히 일어나 험난한 앞날에 맞서 줄 것을 당부하고 조선의 무궁을 기원한다. 막이 내린다.
CAST
주요 장면들
1막 2장 / 대원군의 섭정
1막 2장 / 무과시험
1막 2장 / 세자를 얻으리라
1막 3장 / 양이와의 전쟁
1막 5장 / 어전회의
1막 5장 / 타락한 왜상들
1막 6장/ 그리운 곤전
2막 8장/ 조선에 아침이 밝아오네
2막 8장 / 대연회의 화관무
2막 9장 / 삼국간섭과 아다미 별장
2막 9장 / 이상하다 눈꽃 날리네
2막 10장 / 조선은 단군의 나라
2막 13장 / 궁금하다 황천후토
맺음막 / 백성이여 일어나라
명성황후 민씨(1851~1895)
여성부원군 민치록의 딸이다. 8세에 부모를 여의고 혈혈단신이 되었으며,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씨의 천거로 왕비에 간택되어 1866년 한 살 아래인 고종과
가례를 올리고 입궁하였다. 그녀가 왕비로 간택된 것은 순전히 배경이 미흡하여
외척의 득세 가능성이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흥선대원군은 외척에 의하여
정권이 장악된 순조, 헌종, 철종 3대 60년간의세도 정치의 폐단 때문에 왕실이 안정되지
못했다고 판단하고 있었고, 그래서 부인 민씨의 집안에서 왕비를 들여 왕실과 정권의
안정을 도모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하지만 왕비 민씨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수완이 능란한 여자였기에 왕비에 오른 지 몇 년 지나지 않아서 왕실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민비는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정적관계에 놓였고
결국 그를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민씨와 대원군의 사이가 벌어진 직접적인 원인은 궁녀 이씨의 몸에서 태어난
왕자 완화군을 대원군이 편애하여 세자로 책립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 배후에 민씨를
중심으로 한 노론 세력과 새로 등용된 남인과 일부 북인을 중심으로 한 세력간의 정치적
갈등이 작용하고 있었다. 대원군과 사이가 악화된 이후 그녀는 끊임없이 그를 정계에서
밀어내려 하였고, 마침내 대원군의 정적 안동 김씨 세력과 대원군의 권력독점을 염려한
조대비 세력, 그리고 대원군의 장자 재황의 세력 및 최익현 등의 유림 세력과 결탁하여 최익현의
대원군 탄핵상소를 이끌어 낸다. 1873년 이 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은 실각하게 된다.
대원군이 실각한 후 그녀는 민씨 척족을 앞세워 정원을 장악하고 고종을 움직여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는 등 일련의 개화 시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그녀는 개화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많은 위협을 받게된다. 1882년 민씨 세력의 개화정책에 불만을 품은 위정척사파와
대원군 세력이 봉량미 문제로 임오군란을 일으켜 그녀를 죽이려 하였으나 그녀는 재빨리 궁을
탈출하여 충주목사 민응식의 집에 피신하였다. 그리고 요청으로 출동한 청국군은
대원군을 납치하여 청나라로 끌고 감으로써 위기를 넘겼다.
그 사건 이후 그녀는 친정 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이 때문에
개화파의 불만이 높아져 갑신정변이 일어나고 일시적으로 개화당이 정권을 장악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때에도 민비는 청국군의 도움으로 다시 정권을 되찾는다. 이때부터 그녀는 외교에 눈을 뜨고
매우 민첩한 외교능력을 발휘하였다. 1885년 거문도사건이 일어나자 위렌도르프를 일본에 파견하여
명국과 사태수습을 협상하는 한편 러시아와도 접촉하였고 또한 청나라와의 관계에서도
흥선대원군의 환국을 묵인하는 등 유연성 있는 관계를 유지하였다.
1894년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한 농민봉기가 일어나 조선의 정국이
혼미 상태가 되었을 때 조선에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던 일본은 갑오경장에 간여하면서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그녀의 세력을 제거하려고 하였지만 그녀는 일본의 야심을 간파하고
친러정책을 쓰면서 노골적으로 일본에 대항하였다. 이 때는 이미 영국, 독일, 러시아 등의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국제적 지위가 실추된 상황이었기에 그녀의 친러정책은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이에 일본공사 미우라는 조선에서 밀려날 것을 염려한 나머지 일부 친일세력과 짜고
민씨를 포함한 친러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을미사변을 일으켜 그녀를 시해하는데
1895년 일본 군인과 정치낭인들이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왕궁을 습격하고
민씨를 시해한 뒤 정권을 탈취한 사건이 그것이다. 민비를 살해한 일본인들은
그녀의 시체를 불사르는 등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고종으로 하여금 민비를 폐위하여 서인으로 전락시키도록
강요했다. 하지만 그 해 10월 10일 그녀는 신원되어 태원전에 빈전이 설치되고
국장에 의해 숙릉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1897년 명성황후로 추책되고,
11월 양주 천장산 아래 이장되어 홍릉이라 하였고, 1919년 고종이 죽자
2월에 미금시로 다시 이장되었다. 그녀의 소생으로는 순종이 유일하다.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옮김)
1851년 9월25일(양력 11월17일) 본관 여흥에서 여성부원군 민치록의 외동딸로 출생
1863년 12월13일 고종 즉위(조선 26대)
1866년 3월6일 왕비로 책봉(당시 15세)
1874년 2월8일 순종(척) 출산
1874년 11월5일 국왕 친정 선포(대원군 실각)
1882년 6월5일 임오군란
1882년 6월10일 명성황후, 장호원으로 피난
1882년 8월1일 명성황후 환궁
1884년 10월17일 갑신정변
1894년 1월10일 동학농민전쟁
1894년 6월23일 청일전쟁
1894년 6월25일 갑오경장
1895년 10월8일(양력) 명성 황후 시해(을미사변)
1897년 10월12일(양력) 왕비 민씨에게 명성 황후 시호 하사
1897년 11월22일(양력) 명성 황후 국장 거행, 양주(홍릉)로 모심
스펙터클한 무대와 화려한 의상, 감동적인 뮤지컬 넘버..
1막과 2막사이 막간휴식이 있긴 했지만 2시간 반이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로
빠져들게 만든다. 특히 이번 공연은 뮤지컬 <명성황후>가 낳은 한국 최고의 소프라노
배우 이태원의 14년의 명성황후 고별무대이기도 하여 더 의미가 있었다.
공연내내 끝없는 음악과 춤과 배우들의 열연이 감동을 더하고,
사실적인 스토리가 공연에 빠져들 수 밖에 없게 하였지만,
슬픈 역사적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하고 가슴을 짓눌러 카타르시스보다는
오히려 분노를 느끼며 공연장을 나서야 할 정도로 감명깊게 본 <명성황후>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한 역사의 교훈까지 더한다.
감명깊게 본 <명성황후>를 권해 드리고 싶다.
음악은 영화 <명성황후> ost
나 가거든 / 조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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