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6. 26. 01:24ㆍ山情無限/산행기(일반)
장대비 뇌성벽력속 남산/금오산 (협력업체 대표초청) 합동산행
○ 일시 : 2007. 3.31 (토) / 날씨 : 천둥, 번개 장대비, 비 그침
○ 산행코스 : 경애왕릉-임도(삼불사-포석정-전망대)-금오산-상사바위-상선암-삼릉
오전에 많은 비가 올 것이라는 예보인데다
낮게 드리운 구름이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 부을듯 하다.
오늘은 "협력업체 대표 초청 합동산행"인데 궂은 날씨가
마치 국내 자동차 산업을 둘러싼 어두운 국제환경같다.
얼마전부터 가히 불가항력인 환율이라는 복병을 만나 사투하는데
날이 갈수록 일본차와 중국차의 공세가 심해 위기감을 느끼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협력업체 대표를 초청하여
위기극복을 위한 단합과 유대관계를 증진하기 위하여
날씨도 궂은데 유서깊은 남산을 함께 오르며 결의를 다지기로 한 것이다.
(삼릉 입구)
급히 달려온 약천한방오리 전문점. 주차장이 텅 비어있다.
너무 일찍 온 것 같다. 오는 길 계속 파란불이 켜지더라니까...
시간 여유도 생겼고 아직은 비가 오지않아 삼릉입구로 차를 몰았다.
이 참에 벼르던 삼릉과 경애왕릉 주변 소나무를 찍어봐야겠다.
(삼릉주변의 아름드리 소나무 숲)
( 배리 삼릉 / 拜里 三陵 )
사적 제219호. 신라의 박씨 왕인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제53대 신덕왕(神德王),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세 무덤이다. 능(陵)의 형식은 규모가 큰 원형 토분이며,
표식은 하나도 없고, 상석이 하나 있으나 이것은 최근에 설치한 것이다.
중앙에 위치한 신덕왕릉은 1953년과 1963년 2차례에 걸쳐 조사하였는데
내부 구조가 밝혀졌는데, 널길을 갖춘 석실이 있고, 석실 내부는 회(灰)칠이 되어있고.
또한 밑에서 1.4m 높이까지 2단으로 방형(方形) 구획을 만들고,
그 안에 황(黃), 백(白), 주(朱), 청(靑)의 채색을 한 흔적이 있다고 한다.
왕의 무덤이니 '임금무덤(陵)'자를 쓰는게 옳을 것 같은데...
'모서리(稜)'자를 썼는지? 안내판이 잘못된 것 아닐까?
(키 큰 소나무 숲 뒤틀린 나무들)
(머리 위에서 아침부터 하늘거리며 반기는 꽃)
(소나무 숲에는 진달래도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시간이 될 때까지 왕릉주변 송림에서...)
(집결지 경애왕릉 앞에서 간단한 순서를 가지고...)
경애왕릉(景哀王陵)
신라 55대 경애왕(景哀王, 재위 924년 ~ 927년)의 무덤이다.
밑둘레 43m, 지름 12m, 높이 4.2m의 북서쪽 구릉의 끝이자 인천(麟川:기린내)의
동안에 위치하고 있다. 경애왕은 신라 53대 신덕왕(神德王)의 아들로
927년 포석정에서 연회를 베풀고 있을 때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 생을 마쳤다.
(출발하려는데 갑자기 밤같이 캄캄해졌다.)
09:05 출발! 랜턴을 켜야 할 정도로 갑자기 어두워졌다.
심상치 않은 날씨다. 오늘 코스는 전망대까지는 임도로 오르고
그 이후 금오산을 거쳐 삼릉으로 내려오는 길도 그렇게 위험한 코스는 아니지만
상황을 봐 가면서 상황이 더 악화되면 전망대까지만 올랐다가 되돌아 올
계획이긴 하지만... 오전 9시가 넘은 시간인데 캄캄하다.
(어두워 노출을 길게 주었더니...)
(번-쩍, 우르르-쾅! 고막이 터질듯한 雷聲霹靂을 뚫고...)
아니나 다를까 포석정 쪽으로 걷고 있는데 굵은 빗방울이 우두둑 쏟아지더니
갑자기 지름 1cm는 됨직한 하얀 얼음덩어리가 하늘에서 쏟아져 내린다.
뒤이어 번쩍 하더니 동시에 꽝한다. 바로 옆에 낙뢰가 떨어지는 모양이다.
난생 이렇게 큰 우박은 첨이라 사진에 담아 보고 싶기도 하지만
평소에 죄를 많이 지어서 그런지 겁이나서 도저히 카메라를 꺼내지 못하겠다.
배낭에 달려있는 개러비나와 금속제품들을 얼른 빼어 숨겼다.
말은 안해도 겁먹은 표정, 산행을 그만했으면 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무모한 것 같지만 그래도 장사진을 이룬 대열은 전진하고 전진한다.
(연세도 많으신데... 선두에 오르시는 **산업 김 사장님)
(금새 길은 도랑으로 변하고...)
(진달래도 장대비로 세수를 하고...)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통일전 방향, 바로 아래가 통일전)
(가야할 방향 봉우리들은 구름 속에서 노닐고...)
( 금오산/金鰲山, 468m )
매월당 김시습은 신라 37대 선덕왕의 아우 김주원의 후손으로
5세에 이미 대학(大學)을 깨친 신동이어서
이 소문을 들은 세종대왕이 후에 크게 쓰겠다고 전지까지 하였다고 한다.
18세 무렵 혼인을 하고, 삼각산에 들어가 공부를 계속하였는데,
21세 때까지 사부학당(四部學堂)에 입학하지도 않았으며
과거에도 나가지 않고 오로지 수학에만 전념을 하였다고 한다.
21세 때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는 보던 책을 불사르고
스스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고 한다.
김시습은 송도를 기점으로 관서지방과 관동지방을 유랑하며,
금강산, 오대산 및 관동팔경을 돌아보고 31세 때인 1465년 봄에
경주로 내려가 금오산(金鰲山)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칩거하였다.
금오산실은 바로 용장사(茸長寺)이며, 이 집의 당호가 바로 '매월당(梅月堂)'이다.
이곳에서 31세부터 37세까지 7년 동안 남산에 머물면서,
'금오산에 온 뒤부터 먼 데 가기를 즐겨하지 않고 바닷가나 들에서 노닐면서
매화와 대를 읊으며 취해 즐겼다.' 라고 할 정도로 남산을 좋아하였다.
남산에 들어 온 7년의 시기는 매월당 문학의 전성기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비롯한 수 많은
시편들을 <유금오록 遊金鰲錄>에 남겼다.
(직진하면 용장사지를 거쳐 고위봉/494m으로 갈 수 있지만 우리는 삼릉으로 하산한다)
(처녀를 짝사랑한 할아버지와의 슬픈 전설을 간직한 전방에 보이는 상사바위)
(두견새가 울 때마다 한 송이씩 떨어진다는 슬픈 꽃 두견화)
(비를 머금은 바윗길 하산이 조심스럽다)
(그쳤는가 했는데 간간히 빗방울 떨어진다.)
(31)
(비가 그치자 공기도 맑고 초록은 푸르름이 더하다)
(비는 골짝에 계류를 만들고...)
(다시 송림에 들어서서, 편안한 길 발걸음도 가볍다.)
(삼릉 숲길, 이제 산행이 종료되는 지점이다.)
(삼릉에서 뒤돌아 보니 아직도 하늘은 무겁게 내려앉아 있다.)
(다시 숲 속에서..., 언제 시간내어 제대로 소나무를 담아봐야겠다.)
궂은 날씨에도 아무 사고없이 무사히 산행을 할 수 있어 감사하다.
오늘 장대비와 뇌성벽력 가운데서도 무사히 산행을 한 것 같이
어려운 문제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해도 문제 속에는 답이 있고
위기는 극복하면 또다른 기회가 되는 것같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고 장벽을 넘으면
더 넓은 세상으로 손잡고 나갈 수 있을 것을 확신합니다..
오늘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함께하여 즐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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