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 김정희 유배지(제주추사관)

2013. 4. 17. 01:32여행/여행기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추사관)에서
(역경을 딛고 일어선 위대한 영혼의 기념비)



○ 2013. 3. 29 날씨 : 흐림, 바람 약간
○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 1661-1번지 일원







추사(秋史 金正喜 1786~1856)는
시·서·화 분야에서 독창적이며 뛰어난 업적을
남긴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예술가이다.
현종 6년 55세 되던 해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제주도로 유배되어
현종 14년까지 약 9년간 이곳에서 머물렀는데, 유배 초기에는
포교 송계순의 집에 머물다가 몇 년 뒤 이곳 강도순의 집으로 옮겨왔다.
이곳에서 살면서 제주 지방 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쳤으며
제주지역의 학문 발전에 크게 아바지하였다고 한다.

차를 매우 좋아한 김정희는 다도의 대가인 초의 선사와
평생 우정을 나누며 제주지역에 차 문화를 도입한 선구자이기도..
이곳에 머무는 동안 김정희는 추사체를 완성하고 생애 최고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세한도를 비롯하여 많은 서화를 남겼다.
이곳은 집터만 남아 경작지로 이용되다가 1984년에 강도순의
증손의 고증에 따라 복원되었다. 2010년 세워진 추사관에는
김정희와 관련한 역사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추사관 입구)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의 추사유배지(사적 487호)에
2010. 5. 13일 문을 연 '제주 추사관'은 연면적 370평
(지하 1층, 지상 1층)으로 '세한도'에 나오는 집을 모티브로 한
소박하고 조용한 모습이나 외양과는 달리 전시실은 아주 현대적.
추모의 공간에는 김호석이 그린 유배시절 초상과
임옥상이 무쇠로 제작한 흉상도 놓였다.

지하에 있는 전시실로 가기 위해서 독특한 모양의
계단을 내려 가야 한다. 계단위로 미끄럼틀같은
평면길이 지그재그로 얹혀있다.















(입구 통로에는 김정희 연표가 기록되어 있다)





(제일 먼저 만나는 작품은 역시 세한도)

추사의 연표가 있는 복도를 따라 들어가면
국보 제 180호로 지정된 세한도가 보인다.
당대 최고의 추사연구자였던 후지츠카 치카시가 1939년 복제하여
만든 한정본 100점 가운데 한점이며 원본은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추사의 나이 59세 때 (1844년) 제주도에 유배온 지 5년이 되던 해에
제주도 가시 울타리에 위리안치된 추사에게 방대한 책을 준 그의 제자인
역관 이상적의 정성에 감격하여 세한도를 그려주고 발문을 적었다.
초가 한 채와 소나무 한 그루, 잣나무 세 그루를 간략하게 묘사하고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라는 글귀가 있다. 이 외에도 지인들과 나눈
편지를 통해 추사의 유배생활과 함께
다양한 그의 글을 볼 수 있다.





(완당선생해천일립상)

허련(1809~1892)/영인본 서경배 기증.
제주도 유배시절에 제자인 소치 허련이 스승인 완당 초상을 그린 것이다.
<완당선생해천일립상>은 <동파입극도>에 유배중인 추사의 모습을 투영한 것이다.
<동파입극도>는 유배생활을 하던 동파 소식이 갑자기 내린 폭우를 피하기 위해
삿갓과 나막신을 빌려 신은 채 도포를 걷어 올리고 진흙탕을 피해
걸어가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전시실 모습)

해천일립상을 시작으로 추사의 작품들이 쭉 전시되어 있다.
특히 추사관을 짓는데 일조한 유홍준 교수와 부국문화재단의
기증 작품이 전시실 곳곳에서 눈에 띈다.
전시실은 지하에 3개의 방으로 나뉘어져 있다.





(K대학교 '추사' 특강 / 열공중인 학생들 틈에 끼어서..)







(세한도(歲寒圖) <23.5×108.3cm>)

제주도 유배 중에 있던 1844년, 59세의 추사가 아끼는
제자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1804∼1865)에게 그려준
서화합벽(書畵合璧)의 명품으로, 국보 제180호로 지정된 작품이다.
우선은 그 후 이를 가지고 북경에 가서 청나라 명사
16명에게 제찬(題贊)을 받아왔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세한도는 그림과
발문까지너비 23cm, 길이 108cm 정도인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러나 세한도의 전체 규모는 너비 23cm 길이 14m에 달한다.
앞부분에는 작품의 제목(완당 세한도)과 작품 소장내력이,
이어서 본 작품인 <세한도>와 발문, 그 뒤로 수 많은 글들이
이어진다. 세한도를 감상한 사람들이 쓴 감상문인 제찬이다.
세한도를 보고 글을 남긴 당대의 지식인은 모두 17명,
그들은 당시 청나라의 지식인들이었다.

김정희의 이상과 혼이 담긴 <세한도>는 간결하고
소산한 그림도 그림이지만 정중하고도 단정한 글씨로 쓴
발문에서 강한 울림이 느껴진다. 소나무 한 그루와 잣나무
세 그루, 그리고 집 한 채, 단순하기 그지없는 이 그림은
당시 김정희의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세한도의 발문과 당대 지식인들의 제찬들)

세한도 발문
"지난 해에는  만학(晩學),  대운(大雲),  두  문집을  보내 주더니   올해에는  우경(藕耕)의
문편(文編)을 보내 왔도다. 이는 모두 세상에 흔히 있는 것도 아니고, 천만리 먼 곳으로부터
사 와야 하며, 그것도 여러 해 걸려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지,  쉽게 단번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게다가 세상은 흐르는 물살처럼  오로지 권세와 이익에만  수 없이 찾아가서
부탁하는 것이  상례인데  그대는 많은 고생을 하여 겨우 손에 넣은  그 책들을  권세가에게
기증하지  않고  바다 바깥에 있는  초췌하고  초라한  나에게  보내 주었도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彫) “날이 차가워(歲寒)  다른 나무들이 시든
뒤에야 비로소 소나무(松柏)가 여전히 푸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했는데, 지금 그대와
나의 관계는 전이라고 더한 것도 아니요 후라고 줄어든 것도 아니다. 아! 쓸쓸한 이 마음이여!
- 완당노인이 쓰다 -
 
쓸쓸한 마음에 거친 붓 하나로 그려낸 그의 그림은
종이 위에 먹물조차 메말라 있어 그의 처연한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듯하다. '지금 그대와 나의 관계는 전이라고 더한 것도
아니요 후라고 줄어든 것도 아니다'며 제자 이상적에게 고마움을
표했던 추사는 그 제자가 받아온 청나라 학자의 글에 힘입어
혼자가 아니라 세상을 향한 의지를 불태웠으리라.





(무량수각(无量壽閣) <67×186cm>)

1840년 추사 55세 때(헌종6년),
제주도에 유배가면서 대흥사에 들러 초의 스님에게
대웅보전 옆 선방(禪房) 건물이던 백설당(白雪堂)에 써준 글씨이다.
현재 대흥사에 있는 <一爐香室 일로향실> <東國禪院 동국선원> 등의
현판과 함께 추사와 초의의 평생에 걸친 교분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글씨의 획이 살지고 장쾌한 필력을 느낄 수 있는 추사의 예서이다.
현재 추사의 무량수전 편액이 또 하나 전하는데, 예산 화암사에
걸려 있던 것(현재는 수덕사 박물관 소장)이 그것이다.









(화순옹주를 애도함)





(추사의 흉상 / 임옥상이 무쇠로 제작)

추사 김정희는
충남 예산 출신으로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
호는 추사로 1786년(정조 10) 충남 예산에서 영조의 사위였던
김한신(金漢藎)의 증손으로, 김노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명문가의 배경과 뛰어난 실력을 바탕으로 추사는
시·금석학·고증학·경학·불교학·서예·회화 등에서
조선은 물론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진 국제적인 석학이었다
24세 생원 시험과 조선 순조 19년(1819)인 34세에 문과에
급제한 이후 규장각 대교, 의정수 검상, 예조참의를 거쳐
54세에는 형조참판에 이르렀으나, 19세기 세도정치의
틈바구니에서 그의 가문은 큰 화를 입었다.

1830년에 아버지 김노정이 고금도에 유배되고 10년 후인
조선 헌종 6년(1840) 55세되던 해 안동김씨 세력과의 마찰로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63세 되어서야 유배가 풀리었다.
3년 후인 1851년에 친구인 권돈인의 일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다시 유배되었다 이듬해 유배에서 해제되었지만
안동 김씨가 득세하던 때라 정계에는 복귀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과천에 머무르다
1856년 71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추사의 학문과 완당 바람)





(추사 제주로 유배를 떠나다)





(소창다명(小窓多明) <39×140cm>)

小窓多明 使我久坐 창은 작지만
빛이 많아 나로 하여금 오래 앉게 한다
유홍준 교수가『완당평전』에서 평한 대로,
'그 내용이 조용하고 편안한 만큼이나 글씨 또한
예서이면서 행서의 운필을 구사했기 때문에 매우 경쾌한
느낌이 일어나는' 작품이다. 관지의 '칠십이구초당'은
추사가 제주도 유배 이후 용산 근처에 살 때 쓴 당호라고
유홍준 교수는『완당평전』에 밝혔다.





(수선화부(水仙花賦) <31×18.7cm>)

중국 청나라 호경(胡敬)의 글로,
추사가 옮겨 적은 것이다.
앞부분에 추사의 수선화 그림이 있다.
수선화 그림의 화제는 다음과 같다.
趙彛翁以雙鉤作水仙, 今乃易之以禿潁亂抹橫蔬, 其揆一也. 居翁.
중국 원나라의 조맹견(彛齋 趙孟堅)이 쌍구로써 수선화를 그렸는데,
지금 모지랑 붓으로 바꿔 되는대로 그렸으나 그 법도는 한 가지다.





(여균사청(如筠斯淸) <32×126cm>)

'맑기가 대나무 같게 하라'는 이 글귀는
누구에게 훈계로 준 말로 혹시 추사의 시(『완당선생전집』
제10권)에 나오는 김여균(金如筠)에게 준 글씨가 아닐까 한다.
추사가 옻이 오른 김여균을 조롱하는 시로, 이 정도
친분이라면 충분히 이런 글씨를 써 주고도 남음이 있다.
구성미가 아주 좋고 淸(청)자의 조형미는 대단하다.





(추사체를 이루다)

추사체는 김정희의 호인 추사(秋史)에서 나온 글씨체이다.
일반적으로 추사가 비석에 새겨진 서한(西漢)시대 필법을 연구하면서
추사체가 나왔다고 한다. 핮만 그 실체는 매우 다양하여 정의하기 힘든데
개화사상가로 유명한 박규수의 <추사체 성립론>이 널리 알려져 있다.
"추사가 어려서는 중국 명나라의 서예가인 동기창(童其昌)에 뜻을
두었고 연경을 다녀온 후에는 옹방강을 열심히 본받았다.
이 때의 글씨는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껍고 골기(骨氣)가 적다는
흠이 있었다. 제주도 귀양살이를 다녀온 다음부터는 남에게 구속받고
본뜨는 모습이 사라지고 대가들의 장점을 모아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
추사체는 제주도 유배시절에 완성한 것으로 평가된다. 임창순에 따르면
추사가 제주도 유배를 거치며 울분과 불평을 토로하면서 험준하고도
해학적인 면을 갖춘 서체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동양 서예사에서
<추사체>는 청나라 서예가들도 이루지 못한 "옛것을 본받으면서
새것을 창출한다"는 입고출신(入古出新)의 이념을 가장 충실히
나타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추사 김정희 영정 / 보물 제547-5호)





(보정산방(寶丁山房) <37×120cm>)

김정희가 강진에 유배가 있던
정약용(丁若鏞 1762~1836)에게 써준 글씨.
보정이란 말은 중국 옹방강이 소동파를 좋아해서 '보소(寶蘇)'라
당호를 썼듯이, 다산 정약용을 보배롭게 여긴다는 뜻이다.
다산 선생이 돌아가신 후에 그 후학들에게 다산 선생 계시던 곳을
잘 보살펴 달라는 무언의 뜻이 들어 있는 것 같다.
글씨는 전혀 멋을 부리지 않으면서도 전체적인 구도가 빈틈없이
짜여 있고, 선배를 존경하는 무한한 뜻이 글자에 배어있다.
한예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과천 시절의 작품이다.





(괴근수경(槐根水庼)

'홰나무 뿌리, 물가의 작은 툇마루'라는 서정적인 문구.
낙관부의 칠십이구초당(七十二鷗草堂)은 추사가 제주도 유배에서
풀린 후 서울 한강변에서 살 때 사용했던 당호이다.





(시례고가(詩禮古家) <39×141cm>)

어느 명문가에 써준 것인데, 소장처는 알려져 있지 않다.
특히 聆 례자의 오른쪽 획은 추사만이 할 수 있는, 전한시대
예서의 필의를 충분히 나타낸 글씨로 과천시절 작품.





(화엄종주백파대율사대기대용지비
(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


추사 김정희가 쓴 이 비문은 그가 죽은 뒤 1858년에
비명을 세운 것이다. 선운사의 고승인 백파긍선(白坡亘璇; 1767-1852)은
추사와 살아생전에 단 한번의 만남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인연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추사가 백파스님을 '대기대용(大機大用)'으로 칭한 것은
비문의 한 구절을 통해서도 짐작해 볼 수 있다.





(추사의 지인들과 완당 바람)





(전시되어 있는 많은 글 중에 눈에 들어온 의문당(疑問堂)이란 현판)

"항상 의문을 갖고,
물음으로 학문에 증진하라"는 뜻이 담긴듯..

'의문당(疑問堂)'이라는 현판은 대정향교에 써준 것으로
추사가 대정에 머무는 동안 이곳의 문명이 낙후된 것을 한탄하면서
동네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면서 교재로 쓸 책을 집에서 부쳐
오기도 하고, 제자를 서울에 있는 지인에게 소개하며 육지로
보내 주기도 했다. 의문당은 추사체로는 예외적으로 단정하고
교육적인 글씨. 액틀엔 예스러운 무늬가 남아 있다.





(판전(板殿))

서울 강남 봉은사(奉恩寺)의 판전에 걸려 있는 현판으로
추사 돌아가시기 3일전에 쓴 것으로 전해진다. 한 점의 속된 기운이나
일호(一毫)의 기교도 없어 항상 대해도 싫증이 나지 않는 작품이다.
'고졸(古拙)'이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글씨로서,
추사가 이 세상에 유언 같이 써 놓고 간 글씨다.
추사도 이 <판전>과 <狎鷗亭 압구정>이 자신이 쓴
편액 중에 스스로 잘 썼다고 말했다.





(계단을 오르다 내려다 본 전시실)

지하2층으로 되어 있는 전시실은
크고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빛으로 지하라고 믿기 힘들 정도.
둥근 창 밑에 걸려있는 "板殿" 이라는 글씨는 서울 봉은사의
현판으로 추사가 71세(1885년) 때 병환 중 이 글씨를 쓰고
3일 후에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전시실에서 안내를 따라 올라 오면 유배지가..)

전시실에서 "유배지 가는 곳"이라는 안내를 따라
계단을 오르면 추사가 9년 가까이 기거하였던 강도순의 집이
복원되어 있는 곳으로 나오게 된다.





(추사김선생적려유허비)

적려(謫廬)는 귀양살았던 오두막집이라는 뜻.
유허는 터만 남았다는 말, 그 뒤에 있는 민가는 복원된 것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 주위엔 저 비석 하나 밖에 없었다고 한다.
한 위대한 인물의 삶의 흔적은 먼지처럼 사라지고 다만 그 자리를 증명하는
비석 하나만 서 있었던 풍경을 생각하면 고적하고 세월의 무상함이..
지금은 제법 잘 갖춘 초가집 세 채가 고적함을 달래게 한다.





(위리안치, 탱자나무와 돌담, 수선화)

복원한 추사가 살던 집도 제주민속에 맞춰 새로 단장했다.
지붕처마는 억새로 다시 엮었고 위리안치(圍籬安置)된 유배객의 집답게
탱자나무 울타리를 둘렀다. 안채로 들어가 툇마루에 앉아 보니
뒤편 돌담 밑에는 그가 무척이나 좋아했던 수선화가 심어졌고
그 위로는 귤나무도 심겨있어 추사가 자신의 귀양살이 집을
'귤중옥(橘中屋)'이라 이름 지은 것을 연상케 한다.
"매화 대나무 국화 연꽃은 어디에나 있지만 귤만은 오직
내 고을에만 있기에 나의 집을 '귤나무 집'이라 이름 짓노라."
귀양살이 중에도 추사에게 그런 허허로움이 있었다.





(유배지 입구에 있는 연자방아)







(복원된 유배지 대문 / 정낭)

추사 김정희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때문에
고초를 겪은 뒤 제주도로 위리안치된다.
유배 초기에 포교 송계순의 집에 머물다 몇 년 후 동네에서
가장 부자였던 강도순의 집으로 옮겨 9년 가까이 기거 하였다.
1948년 제주도 4.3사건때 불타버리고 빈 터만 남았는데
1984년 그의 증손의 고증에 따라 다시 지어 추사적거지로 지정되었다.
죄인을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는 것을
말하는 위리안치는 중죄인에 해당하는 형벌로 추사는 제주도에서
그 벌을 받게 되어 빙 둘려져 있는 담 위론 날카로운 가시가 있는
탱자나무가 있지만 그 밑으론 추사가 좋아했던 수선화가 길게 이어져 있다.
제주 특유의 대문인 정낭(사람이 있고 없음을 알려주는 역할)을 지나면
담 안쪽 뜰에 추사가 즐겨 마시는 차나무가 심겨져 있다.
우리나라 다도를 정립한 조선 후기 대선사 초의선사는
추사를 만나기 위해 제주도를 여러번 다녀가며
각별한 우정을 나누었다고 한다.





(추사 유배지 강도순의 집 전경)









(밖거리, 안거리, 모거리)

강도순의 집은 주인댁이 살았던 안거리 (안채),
사랑채인 밖거리 (바깥채), 한쪽 모퉁이에 있는 모거리 (별채),
통시 (제주도 특유의 화장실), 대문간, 방앗간, 정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추사는 밖거리에서 마을 청년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쳤으며
모거리에 기거하며 벼루 열 개를 구멍내고 천 자루의 붓을
닳게 할 정도로 고독한 정진 속에서 추사체를 완성하고
국보 180호 <세한도>를 비롯한 많은 서화를 그렸다.





(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치는 추사)





(정지 / 부엌)







(돗통시 / 화장실 + 돼지우리)

제주의 가정마다 하나씩 있던 돗통시는 돼지를 기르는
우리와 화장실을 합쳐놓은 공간이다. 돼지를 돗통시에 키워
인분을 처리하고 그곳에서 나온 퇴비를 다시 밭에 뿌려
이용하는 방법은 제주만의 지혜로운 농법이다.





(마당 한켠에 있는 눌)

탈곡하기 전의 농작물을 묶어 쌓아 두거나
탈곡하고 난 짚을 쌓아 놓은 것을 눌이라 하며
이를 만드는 행위를 "눌을 논다"고 한다.









(동백꽃이 뚝뚝 떨어지고..)







(그 때의 탱자나무는 아니겠지만..)





(41)





(정낭 / 대문)

제주 특유의 대문인 정낭은
집에 사람이 있고 없음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데
기둥이 모두 내려져 있으면 주인이 집에 있다는 표시이고
두 개가 걸쳐 있으면 저녁 때쯤 들어온다는 표시,
모두 걸쳐 있으면 장기간 외출을 했다는 것을 표시.
거지와 도둑이 없다는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풍습이라 할 수 있겠다.











(추사 유배길)

추사 김정희 유배지 주변으로 그의 유배 역사와 함께
제주도의 아름다운 길을 만날수 있는 "추사유배길"이 있다.
추사관과 단산, 대정향교등을 걸을 수 있는
"집념의 길"은 추사유배길 1코스다.

추사가 제주에서 큰 탈 없이 보낼 수 있었던 것은 남다른
학구열과 초의대사, 허련과 같은 지인들의 방문도 있었지만
귤밭의 집이라는 뜻의 귤중옥을 당호로 삼고 벗 권돈인에게
제주에서 맘껏 노닐지 못함을 하소연 한 것을 보면
제주의 풍토도 한 몫을 한 것 같다.

제주도의 입장에서 보면 뛰어난 유배객을 맞는다는 것은
뛰어난 선생을 얻는 것이었다 추사는 재정향교의 유생들을
만날 수 있었고, 향교에 <의문당> 이라는 현판을 써 주기도
하였다. 또한 집에 연락해서 이들에게 필요한 책까지
구입해 주기도 하였다고 한다.




(추사관을 나오면서..)

당대 대표적인 학자이자 예술가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살다 절해고도에 위리안치되어
9년 동안 귀양살이하던 추사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 심정을 감히 짐작도 못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 기간 동안에
벼루 10개와 천 자루의 붓을 닳게 할 정도로 역경속에서도
열정적으로 
예술혼을 불태우며 정진하여 세한도를 그려내고 추사체를
완성해 낸 것을 보면서 한 영혼의 위대함에 감명을 받았다.
자신을 추스릴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관람시간은 09:00~18:00
요금은 성인:500원, 청소년, 어린이:300원
전화는 064) 760-3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