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모로코 포르투갈 (2)
2015. 8. 17. 22:01ㆍ여행/여행기
스페인 모로코 포르투갈 여행 (2/2)
(길이 끝나는 곳에서 새로운 길이 열린다)
○ 2015. 7. 10 ~ 21 날씨 : 맑음, 무더움
▶ 스페인 (바로셀로나/사라고사/마드리드/똘레도/콘수에그라
코르도바/그라나다/미하스/말라가/바누스/타리파/론다/세비야)
▶ 모로코 (탕헤르/카사블랑카/라바타/페스)
▶ 포르투갈 (파티마/오비도스/신트라/까보다로까/리스본)
▶ 네델란드 (암스테르담)
스페인 타리파에서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모로코로
(모로코 현지인과)
앗쌀람 알라이쿰, 와알라이쿰 살람
아는 말은 이 인사말 외 몇 마디 뿐이었지만
서로가 웃으며 유쾌한 여행이 되었다.
(저기가 모로코, 아프리카 대륙이다)
(모로코 탕헤르..)
한창 도시를 건설중인데 조금 외곽으로 나오면
'2012 세계박람회' 개최지 유치에 뛰어든 모로코(탕헤르)도 거국적으로
준비를 하여 여수와 함께 마지막까지 겨뤘지만, BIE 총회(140개 회원국)
2차 투표에서 여수에 져 실패하는 바람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후진국을 탈피하기 위해 국제대회를 개최하여 지명도도 높히고
'2015 네이션스컵' 개최권도 박탈당했다고 하니..
(탕헤르에서 카사블랑카 가는 길)
광활한 벌판에 수확이 끝난 해바라기밭이
끝없이 펼쳐진다. 해바라기 꽃이 노랗게 피었을 때 오면
이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볼거리가 될 것같다는 생각이다.
그러면서도 스페인의 올리브밭을 보면서 느꼈던 그 생각
또 다시 의문으로 다가온다. 올리브와 해바라기,
저 많은 것들을 수확은 어떻게 할까?
우리가 달리는 도로 옆에는 새로운 도로를
내는지 땅이 속살을 보이고 있다.
카사블랑카 (아프리카와 유럽의 접점) ☞ 사진 클릭
모로코는 아프리카 북서단에 위치한
입헌군주국가로 1830년 프랑스령이 되어
1912년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보호령으로 분할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후 반프랑스 해방투쟁을 거쳐 1956년 3월에 프랑스로부터
북쪽으로는 지중해의 지브롤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스페인과 접해있고,
단순한 낭만으로 그쳐지지 않는다.
'카사블랑카'라는 단어에는 왠지 모를 낭만과 애잔함이
깃들어있다. 1942년 개봉한 영화 '카사블랑카' 속 두 연인의
인상적인 러브스토리는 명장면과 함께 추억으로 곱씹어진다.
'하얀집'이란 뜻의 카사블랑카는 아프리카 대륙에 속해 있으면서도
지중해를 통해 유럽과 맞닿아 있어 유럽색이 짙은 나라이다.
카사블랑카는 작은 파리라 불리며 아프리카보다는
남부 유럽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예정보다 늦게 카사블랑카에 도착했다)
오는 길에 라바타에 잠깐 들렸다 오는 일정이었지만
국왕이 라바타의 어떤 행사에 참석하느라 시내도로가 정체되고 경비가 심해
저녁을 먹고 시내구경을 하려고 나섰지만
초저녁인데도 벌써 문은 거의 다 닫혔다. 스페인과는
또 다른 밤 풍경이다. 짧은 일정으로 다녀가는 모로코인데
이동하면서 시간을 빼앗기는 바람에 카사블랑카의
낭만도 느껴볼 시간내기도 어려울듯..
(카사블랑카.. 이런 상상도 한 몫하고 있는데..)
영화 카사블랑카는 헐리우드 세트장에서 촬영되었고,
마분지로 만든 세트장의 조잡한 모습을 숨기기 위해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 안개라고는 절대로 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안개제조기까지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 영화 촬영 후반에
연합군이 북아프리카로 진격 곧바로 카사블랑카를 점령했다.
위너브러더스의 신작 제목이 하필이면 '카사블랑카'라는 사실에
다른 제작자들은 배가 아파 어쩔줄 몰라했다고 한다. 이 우연의 일치에 고무된
1943년 1월, 작품이 개봉된 첫주, 고맙게도 처칠과 루즈벨트가
카사블랑카에서 만나 평화협정을 체결하면서 '카사블랑카'의
행운은 절정을 이룬다. 전쟁이 영화를 팔아주니
더 좋은 선전효과를 어디서 바랄 것인가!
(카사블랑카의 상징 무하마드 5세 광장)
카사블랑카의 중심 무하마드 5세 광장.
무하마드 5세는 프랑스와 스페인으로 부터 독립을 이끌어
낸 공로로 모로코인들에게 국부로 숭상받고 있는 인물.
모로코에는 무하마드 5세를 기념하는 상징물이나 건축물들이 많은데
여기서부터 간선 도로가 시작되어 뻗어 나가고 있기 때문에
비둘기 광장을 마주보고 있다.
('신의 옥좌는 물 위에 지어졌다’하산 2세 사원)
1986년 모로코 왕 하산 2세는 카사블랑카에
새로운 사원을 자신의 60번째 맞춰 짓도록 주문했다.
수많은 일꾼들이 밤낮으로 일을 했으나 하산 2세 사원은
4년후인 1993년에 이르러서야 문을 열 수 있었다.
이 사원은 '신의 왕좌가 물 위에 지어졌다'고 하는
코란의 구절에서 시작되었다. 프랑스 건축가 '미셀 펭소'는
왕의 요구에 따라 일부만을 절벽에 기대어 세우고 대부분이
대서양으로 확장되어 바다 위에 떠 있는 모습의 사원이 되었다.
하산 2세 사원은 9헥타르의 면적에 펼쳐져 있고, 그 안에는
이슬람 학교, 여러 개의 공중목욕탕, 모로코 역사박물관, 도서관,
그리고 주차장이 들어섰다. 성전은 1만여 명의 신도들을,
그리고 정원은 8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 건축에는
하이테크 기술이 동원되었다. 6천 명이 넘는 장인과 예술가들의
손으로 놀라운 모자이크와 칼리그래프, 대리석 바닥과 기둥,
회반죽 몰딩, 나무 조각 천장 등이 실내를 장식한다.
이 사원은 세상에서 두 번째로 큰 이슬람사원이 되었다.
높이가 20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미나렛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종교 건축물로 기록된다.
미나렛에서는 메카를 향해 레이저를 쏜다.
(89)
이름부터 끌리는데 영화의 장면들이 오버랩되고,
그기에 'As Time Goes By'까지 귓전을 울린다.
카사블랑카! 왠지 로맨틱한 도시가 아닌가 싶은데
하얀집마저도 잘 보이지 않는 이름과는 영 딴판.
기대와 환상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
막연했지만 기대가 기대가 크긴 컸나 보다
허탈감마저 느꼈다. 아! 이게 아닌데..
(아쉬움을 뒤로하고 라바트로 향한다)
그래도 카사블랑카는 매력있는 도시.
아.. 아폴로가 달에 가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계수나무와 토끼가 잘 살고 있을테고,
카사블랑카에 가지 않았더라면..
'저 비행기가 떠나고
그와 함께 가지 않으면 당신은 후회할 거야'
'오늘이나 내일은 안 그럴지도 모르지만 곧,
그리곤 평생 후회할 거야.'
감동적인 험프리 보가트의 말을 떠올려 보면서..
(하산 2세 왕릉 천정의 화려한 모습)
1912년 부터 모로코의 수도.
모로코의 북서부 대서양 연안에 위치하고 있는
고대도시로 2세기 로마 식민도시였던 고대 살라(Sala)는
현재 라바트 교외에 해당하는 셸라(Chella)에 있었다.
지명은 '승리의 병영지'라는 뜻의 라바트엘파티프가 라바트로 변한 것.
유럽식 신시가는 1912년 프랑스가 점령한 후 만들어졌다고 한다.
성벽에 의해 성 안과 성 밖으로 나누어지는데 성내에는 마디나(이슬람 시장 거리)와
시내 최대의 건축은 하산의 모스크(jama ai-Hassan)로 장방약 183m X 139m의 거대한 건물.
농업이 성하여 채소와 과일류를 수출하고,
섬유 산업이 발달하여 융단, 모포 등이 생산된다.
(무하마드 5세 왕릉)
무하마드 5세는,
17세기부터 마그레브에 군림한 아라위왕조의 후예로
1912년에 태어나 1961년에 생을 마감한 현 국왕의 조부로 모로코의 국부.
모로코인들에게 국부로 숭상받는 무하마드 5세는
카사블랑카 무하마드 5세 광장을 비롯하여 자주 듣는 이름.
수도인 라바트에도 무하마드 5세 거리, 무하마드 5세
왕릉 등을 지어 기념하고 있다.
(왕릉 경비병과도 한 컷)
(Hassan II Tower)
라바트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하산탑은
모로코 라바트의 기념비적인 탑으로 베르베르 왕조인
'야크브 알만수르'가 1195년에 계획했던 장대한 모스크의 첨탑.
이 탑은 1199년 그가 죽음으로써 중단되었는데 한 변의 길이가
16m인 정방형으로 44m까지 쌓아 올라가다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완성되었다면 아마 아프리카 최대의 모스크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도 탑의 남쪽에는 300개 이상의 돌기둥이 남아 있다.
하산탑은 정갈하면서도 깔끔한 모습이
눈과 발걸음을 사로 잡았다. 유럽에서의 화려하고
웅장한 건축물들과는 전혀 다른 얼굴, 전혀 다른 옷을
입고 있다. 분위기마저 달라서 아프리카의 또 다른
매력에 빠져들게 한다.
(곳곳에 군인들이 경계 서고 있는 모습)
페스, 낯설지 않은 모습 ☞ 사진 클릭
수도 라바트의 동쪽 160km 지점에 위치한 페스는
이슬람 지성계의 중심지로 유럽 지성사가 암흑기라 부르던
중세에도 이슬람 세계는 찬란한 지성의 탑을 쌓아가고 있었다.
서기 789년, 이드리스 2세(Idriss II)에 의해 이드리스 왕조의 수도로
정해진 페스는 13세기 메리니드 왕조(Merenid) 시대에 마그레브에서의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 번성하며 이슬람 지성계의 중심지가 되었다.
857년에 이슬람신학대학과 아랍문예 중심의 알 카라윈대학이 설립되었다.
세계 최초의 대학이 있던 이 도시에서 학문과 기량을 갈고 닦은
수학자와 과학자, 철학자들이 이베리아 반도로 건너가
유럽의 암흑시대를 깨웠다.
1276년에 마리니드왕조가 새로운 페스를 건설하였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 강가의 옛 도시가 페스알발리이고,
왼쪽의 새로운 도시가 페스알제디드이다. 페스는 오랫동안
모로코의 신앙, 학문, 예술을 주도해 '지적인 왕도'로 불려왔다.
메디나에는 여전히 이슬람의 전통과 문화가 살아 숨쉬고 있다.
페소 시민들은 모로코에서 신앙심이 가장 깊고, 문화적으로
가장 세련되고, 예술적 감수성이 가장 발달한 곳이
자신들의 도시, 페스라고 굳게 믿고 살아간다.
구시가지 메디나는 1200년 전의 이슬람 왕조시대의
정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슬람 세계의 종교와 예술, 학문의 중심지였던 페스는 모로코
독립운동의 중심지였으며, 변화를 갈구하는 중심이 되어
지금도 모로코의 심장으로 여전히 뛰고 있다.
(미로와 같이 복잡한 골목길 )
페스의 메디나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복잡하다는 미로와 같은 골목길이다.
14세기에 조성된 골목은 지금도 수백 년 전의 옛 얼굴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무려 9,000개가 넘는 골목이 미로를 형성하고 있다.
페스의 메디나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은 이방인은 어쩌면 당연한 일
통과의례쯤으로 여겨야 한다. 딱히 정해진 루트도 없고, 소요시간을 예측하기도
어렵다. 그저 마음이 끌리고, 발길이 닿는 대로 걸으면 된다. 그렇게 마음을 열고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을 따라 가다 보면 지붕이 덮인 시장, 오래된 옛사원과
이슬람 학교, 염색장과 궁전, 목욕탕과 찻집들이 끝없이 펼쳐진다.
이 골목의 유일한 운송수단인 노새몰이꾼의 고함 소리와 호객꾼들의 호객
행위로 복잡한 골목은 소음까지 더해져 더 정신없게 만든다. 아찔할 만큼
높다랗게 짐을 싣고 비틀비틀 걸어가는 비쩍 마른 당나귀가 짐을 나르고 집
한 채값이 나가는 골동품 실크 카펫이 내걸린 가게 옆으로는 한 그릇에
400원하는 콩죽이 끓고 있는 분식집. 온갖 냄새와 소음이 뒤섞여 오감을
자극한다. 인간이 만든 공간 중에 이토록 생생한 삶의 기운을
내뿜는 곳이 시장말고 또 있을까.
(지금은 라마단 기간)
이 복잡한 골목에 없는 것이 없는데
있어야 할 것중 제일이라면 사원일테다.
그들의 신심은 상상을 초월했다.
올해는 6/18 ~ 7/16일까지라고 한다.
이슬람교도는 이 기간 일출에서 일몰까지 의무적으로
금식하고, 날마다 5번의 기도를 드린다. 이 기간에는
해가 떠 있는 동안 음식뿐만 아니라 담배, 물도 금지된다.
라마단의 마지막 10일간은 가장 최고로 헌신하는 시간으로
이슬람교도들은 그 기간 사원 안에서 머물게 된다. 보통
27번째 되는 날을 '권능의 밤'이라고 하여 밤새워 기도한다.
라마단이 끝난 다음날부터 '이드알피트르'라는 축제가
3일간 열려 맛있는 음식과 선물을 주고 받는다.
(마주오는 사람 비끼기도 힘든 좁은 골목도 지나고..)
길을 잃어 보아야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다.
이방인에게 페스는 보물을 찾아 나선 탐험과 같다.
지상 최대의 호객꾼과 지상 최대의 미로, 소매치기와 상인들의
인생에 정해진 길은 없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새로운 길이 열리듯
페소는 새로운 길 찾는 법을 가르켜 줄지도 모르겠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메디나에서도 삶을 향한 열기가 가장 뜨거운 곳은
단연 가죽 작업장이다. 페스의 골목길을 걷고 있으면 지갑 혁띠 등
중세 시대와 비슷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좁은 골목길을 돌고 돌아 무두질 작업장이
저 노동자들의 삶은 어떤 삶일까?
(그림이 좋아 수없이 셔트를 눌렀을 소재지만..)
셔트를 누르려니 마음이 무겁다.
아무리 오래된 전통이고, 천연재료(?)를 사용하기 때문에
몸에는 해롭지 않다고 강변하지만 그 말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
악취부터 공해인데.. 저 온갖 잡탕범벅한 것이
몸에 해롭지 않을리 있겠는가?
(드넓은 평야지대.. 여기는 해바라기꽃이..)
페스에서 탕헤르 가는 길은 드넓은 평야지대와
꼭대기까지 경작을 하는 구릉지대가 끝없이 펼쳐진다.
모로코의 면적은 710,850㎢(서부사하라지역 252,120㎢ 포함하면
한반도의 3.2배). 지형은 북동부에서 서남부로 해발 4,000m의
아틀라스 산맥이 길게 뻗쳐 있고, 남쪽으로는 사하라 사막이 알제리
국경에서부터 모리타니아 국경과 접한 대서양까지 연결되어 있다.
평야와 구릉지대인 아틀라스 산맥 서쪽과 모로코 북부 및
중서부 대서양 연안지역에 전체인구 3,264만명(2013년)의
70% 이상이 거주하고 있다.
기후는 우기와 건기로 구분되며,
지역별로 다양한 특성이 나타난다.
우기는11월~4월로 온난다습(평균 15˚)하고,
건기는 5월~10월로 고온건조(평균 28˚)한 것이 특징.
가장 더운 달은 8월이고, 가장 추운 달은 1월이다.
가장 건조한 달은 7월(평균 강우량 1㎜)이며,
가장 습한 달은 12월(평균 강우량 86㎜)이다.
북부지역은 겨울에 온난다습하고 여름에 고온건조한
지중해성 기후의 특색을 보이며, 중부지역은
겨울에 한냉하고 여름에는 고온건조한 대륙성 기후의
특색을 보이고 있다. 남부지역은 사막 기후로
고온건조하고 일교차가 심하다.
탕헤르 (대서양으로 지는 해) ☞ 사진 클릭
저녁 무렵 스페인에서 모로코로 들어올 때 들린
탕헤르에 도착했다. 저녁을 먹고 나오니 해가 막 지려한다.
탕헤르는 모로코의 북부에 위치한 항구도시로 지중해와 대서양이 만나는
5세기까지 로마 제국의 영토였으며, 이 일대 중심지로 번영을 누렸고,
그 후 반달족의 침임을 받았다가 비잔틴제국과 아랍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15세기 이후 유럽 세력이 영향을 미쳐,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등이 다툼을 벌였다가
선포되고 자유무역항이 되었다. 이때 많은 유럽인들이 들어와 살았고,
유럽인 아랍인 유대인이 어울려 사는 국제도시가 되었다.
여러 문화권의 혼재로 독특한 문화를 발산하던 탕헤르는
이러한 이유로 1956년 모로코령이 될 때까지 많은 예술가들이
찾아 작품활동을 한 세계적인 명소가 되게 된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으로 유명한 들라쿠루아(Delacroix),
원색의 개성을 표현한 야수파 마티스도 이 곳에서 여러 작품을 남겼고,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로 유명한 테네시 윌리암스도 이 곳을 찾았고,
윌리암 바로우즈도 유명한 '네이키드 런치'를 이곳에서 집필하였다고 한다.
그의 소설에서 나오는 '인터존'이라는 도시가 바로 탕헤르.
바로 'international zone'에서 착안한 것이라고..
(노을지는 대서양에 발도 담그고, 백사장도 걷고..)
(그들은 시간이 되자 메카를 향해..)
(다시 모로코에서 스페인으로)
아침 일찍 탕헤르에서 스페인 타리파로 향했다.
(다시 돌아온 타리파항)
(론다 가는 길의 풍경)
전망 좋은 곳에 자리한 별장들.. 컨트리 클럽까지..
해변도로에서 출발한 A-397도로는 고도를 점점 높혀간다.
고도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1910m인 Torrecilla 산 중턱 윗부분으로
저 앞쪽으로는 산중턱에 마을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론다 (해발 고도 723m에 위치한 고도) ☞ 사진 클릭
말라가에서 북서쪽에 위치한 론다는 말라가주 주도.
BC 6세기경 켈트족이 최초로 이 지역에 아룬다(Arunda)라는 이름의
정착촌을 세웠고, 이후 고대 페니키아인이 제법 큰 규모의 마을을 세웠다.
현재 도시의 시초는 기원전 3세기에 로마 제국의 장군이자 정치가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건설한 요새화된
마을로 기원전 1세기에 로마 황제로부터 시의 칭호를 받았고 한다.
도시 주변은 해발 750m급의 높고 웅장한 산이 둘러싼 거친 산악 지대.
과달레빈강(Rio Guadalevin)이 도시 한가운데를 흐른다.
론다는 투우의 발상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1785년에
건설한 에스파냐에서 가장 오래된 투우장 중 하나인 론다 투우장
(Plaza de Toros de Ronda)에서는 지금도 가끔씩 투우 경기가
열린다고 한다. 1793년에 건설한 120m의 깎아지른 절벽에 세워진
대표적인 관광 명소 누에보 다리(Puente Nuevo)를 비롯해
많은 문화유산이 도시 곳곳에 남아 있다.
(저기~ 절벽위 하얀집이 헤밍웨이가 살았던 집이 있다는데..)
(론다 투우장)
투우의 발상지로 알려진 도시 론다.
투우장은 도시의 서쪽 외곽에 있으며 에스파냐에서
가장 오래된 투우장 가운데 하나. 1779년에 건설을 시작해
1785년 5월에 완성한 투우장은 지름 66m의 원형으로 최대 수용 인원은 약 6,000명.
현재 스페인에서는 투우와 소몰이 축제에서 황소들이 결국은투우사의 칼에 잔인하게 죽는 것이
투우 금지 반대론자들은 투우가 스페인의 오랜 문화유산으로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해 온 점을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투우와 소몰이축제 금지가 확산되고 있다.
역사적인 투우장이 궁금 했지만 투우를 반대하면서
투우장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그 돈이 투우를
지속시키는데 도움될 것 같아서 그냥 패스.
(누에보 다리 하부까지 내려갔다가..)
누에보 다리는 18세기에 건설한 다리로 자연과 인간이
함께 아름다운 풍경을 빚어내고 있다. 아찔할 정도로 까마득한
120m 깊이의 협곡 밑바닥까지 닿은 거대한 다리는 그 모습이
장관을 이루어 수십 년 동안 에스파냐의 모든 인공 구조물 가운데
가장 빈번하게 사진 촬영의 대상이 되었으며, 현재도
전 세계의 사진작가들이 선호하는 장소이다.
(스페인에서 가장 스페인다운 도시) ☞ 사진 클릭
스페인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모두 만날 수 있는 세비야.
마드리드 남서쪽 540km 떨어진 안달루시아 지방 세비야주의 주도.
70만명에 가까운 인구가 거주하는 스페인에서 4번째로 큰 도시.
쇼윈도우의 화려한 플라멩고 의상, 강렬한 투우경기장 포스터, 미니정원을 품은 파티오,
서기 711년부터 1248년까지 계속된 무어의 지배는 세비야를 비롯한
전 안달루시아 지방에 크나큰 흔적을 남겼다. 인류 최초로 지구 항해사
마젤란이 세계일주를 시작한 세비야 항은 스페인과 아메리카 대륙간 무역에서
대표 항구로 그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당시 세비야는 예술 방면에서도 발전을 하여 대예술가
벨라스케스를 배출했다. 그 후, 300년 흑사병이 돌고 과랄키비르 강에 침적토가
1980년 안달루시아의 수도가 되었고,
관광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세비야!
(세비야 ABADES BENACAZON 호텔)
수영복 챙겨오지 않은 것이 많이 아쉽다.
말라가 해변에서도 그랬고, 탕헤르 해변에서도 그랬는데
42℃까지 오른 세비야에서 깨끗한 수영장을 보니 더 그렇다.
호텔은 정원관리도 잘 하고 있었다.
정원을 둘러 보는데 스페인과 모로코에서 지겹도록
생각지 않은 호텔 정원에서 달려있는 올리브 열매를 보다니
뭔 보물을 발견한듯 반가웠다. 나 원 참..
(1992년 국제 박람회 개최장소 스페인 광장)
(CD도 한 장 사고 사진도 한 장 찍고..)
(스페인에서 제일 규모가 크다는 세비야 대성당)
원래 있던 이슬람 모스크를 허물고 1402년 1세기에 걸쳐
완공한 대성당. 로마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과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에 이어 유럽에서 세번째로 큰 성당으로 폭 116m, 길이 76m 규모.
예배당에 있는 격자무늬의 목제 제단은 세계 최대규모로,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장면들을 황금으로 섬세하게 조각해 화려함을 더했다.
예배당 안쪽으로 높은 아치기 끝나는 곳이 왕실 예배당(Capilla Real)이며
좌우에 알폰소 10세와 모후 베아트리스의 묘가 안치되어 있다. 주제단 중앙에는
세비야의 수호신인 역대 왕의 성모를 모셔 놓았다. 대성당 곳곳에슨 프란시스코 고야,
성당 북쪽 오렌지 중정에는 분수대 중심으로 오렌지 나무가 심어져 있다.
나무 위로는 세비야의 랜드마크 하랄다 탑이 보인다.
(중앙제대)
(콜롬버스의 무덤)
4명의 거인은 스페인의 4대 왕국인
카스티야, 레온, 나바라, 아라곤을 상징한다고..
이탈리아 사람이었던 콜럼버스는 카스티야 왕국 이사벨 1세 여왕의
그의 강력한 후원자 이사벨 여왕이 죽고 난 후, 콜럼버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던
콜럼버스, 과연 그는 어떤 인물일까?
1506년 죽을 때까지 자기가 발견한 땅을 인도라고 믿었다고 한다.
부정적인 면은 숨겨져 있고, 위대한 탐험가로만 포장하여 알려지고 있다.
콜럼버스와 그의 부하들은 역사가들에 의해 '홀로코스트(집단학살)이라고
도덕이 제대로 서지않은 금에 눈 먼 잔혹한 정복자였다.
그러니까 아즈텍 문명의 파괴자 코르테스와
잉카 문명의 파괴자 피사로의 롤모델이 콜럼버스였던 것 아닌가?
역사는 강자의 기록이 아니라 객관적인 윤리로 쓰여져야 한다.
콜럼버스는 잔혹한 정복자, 문명파괴자로서의 모습도
(세비야 대성당 종탑까지 올라가 본다)
104m 높이의 하랄다 탑에 오르니
세비야 대성당을 비롯한 시대가 한 눈에 들어온다.
34층까지 올라가는 탑은 계단을 만들지 않았는데
그건 말을 타고 올라가기 위해서라 한다.
플라멩고, 집시들의 한이 서린 노래, 춤 ☞ 사 진 클릭
플라멩고는 15세기경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에 정착한
집시(gypsy)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음악과 춤으로 알려지고 있다.
18~19세기경에 이르러 현재의 형태에 가까워졌으며, 축제와 연회를 통해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플라멩코의 주요 형식은 20세기에 무대 공연으로
발전하면서 정해졌지만, 엄격한 형식보다는 기본 동작을 중심으로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변화와 리듬, 박자를 중요시한다.
또한 춤만큼 노래와 기타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플라멩코는
이들의 조화로 완성되는 예술이라 할 수 있다. 강렬하고 독특한
정서 때문에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다. 플라멩고는
그라나다와 세비야 지방이 2대 중심지이다.
(관절에 무리가 갈 정도로 구두를 강렬하게 내었다)
특별히 춤에 대해서는 바일레플라멩코(baile flamenco),
음악에 대해서는 칸테플라멩코(cante flamenco)라고 한다.
흔히 플라멩코의 3대 요소라면 춤을 뜻하는 엘 바일레(el baile),
노래를 뜻하는 엘칸테(el cante), 기타를 뜻하는
엘 토케(el toque)를 일컫는다.
또한, 플라멩코의 분위기도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죽음과 절망 등을 다뤄 비장감을 동반하는 것,
음악에 동양적 색채가 가미되거나 감동을 일으키는 것,
그리고 사랑과 삶의 기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플라멩코 공연에 쓰이는 주요 용어로는 남성 무용수를 뜻하는
'바일라오르(bailaor)', 여성 무용수를 뜻하는 '바일라오라(bailaora)',
남성 가수를 뜻하는 '칸타오르(cantaor)', 여성 가수를 뜻하는
'칸타오라(cantaora)'가 있다. 기타 반주자는 'guitarister' 또는
'토카오르(tocaor)’라고 한다.
플라멩고는 노래, 춤, 연주(기타)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최초에는 노래와 손뼉치기(박수:palmas)가 주요 연주수단이고
기타와 발구르기도 이후에 추가된 것이다. 현대의 플라멩고는
베이스 기타와 눕혀놓고 올라앉아 연주하는 북처럼 생긴
"cajon(까혼)" 등 타악기가 추가되었다.
(플라멩고는 집시들의 한이 서린 노래와 춤)
안달루시아의 사크로몬테 언덕에는 예전에 집시들이
동굴 속에서 살았다고 한다. 오랫동안 이곳 저곳을 떠돌아 다니며
방랑생활을 하던 집시들은 이 곳에 모여 살면서 자신들의 슬픈 처지를 노래와
춤으로 표현하게 되었다. 이것이 차츰 외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오늘날과 같은 정열적인 플라멩고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플라멩코는
단지 음악으로뿐만 아니라 집시 문화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순수한 플라멩코에서는 캐스터네츠를 쓰지 않고 사파테아드(구두 소리),
팔마(손뼉치는 소리), 피트(손가락 퉁기는 소리)로 구성되며, 콰드로 플라멩코에서는
관중의 할레오(장단을 맞추어 지르는 소리)도 섞여 열광적인 정경을 전개한다.
플라멩고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고, 추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자신의 심경을 표출하기 위하여 추는 것이라고 집시들은 말한다.
그리고 플라멩코는 전 세계의 민족무용 중에서 가장 프로페셔널한
기교를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이제는 포르투갈이다)
EU 연합 국가간 내부적으로는 갈등이 있는 것 같아도
외형적으로는 한 나라나 마찬가지다. 특히 국경을 넘을 때는 아무런
제약이 없다. EU연합 여러 나라를 여행하더라도 처음 입국한 나라에서
입국심사를 받고 출국하는 나라에서 출국심사만 받으면 된다.
국가간 이동은 그냥 한 나라를 다니듯 자유롭다. 이전에는 국경에
검문소 흔적이라도 있었는데 이제 말끔해져 어디가 국경인지는
이정표를 보지않으면 알기 어려울 정도다.
포르투갈에 들어서긴 섰나보다.
그 사이 창밖 풍경이 변했다. 올리브 나무에서
콜크나무로 바꼈다. 콜크생산 세계 1위 국가답게
야산에는 콜크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파티마, 가톨릭 성지 ☞ 사진 클릭
포르투갈 중부, 산타렌에 있는 가톨릭 성지.
1917년 5월부터 10월까지 매달 13일이 되면 3명의
어린 목동 앞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죄의 회개와 로자리오의
기도를 권하였다는 유래 때문에 순례지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1930년 포르투갈 주교들은 파티마의 성모 발현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파티마의 메시지는 속죄, 묵주 기도, 죄인들의 회개를 위한 기도와 고행,
파티마 성지는 30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광대한 광장과 광장 북쪽에 신고전주의 양식의
대성당이 건립되어 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을 찾아 참배한다.
중앙에 64m 높이의 중앙종탑이 있고 좌우 주랑에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그린 벽화가 그려져 있다고 하는데
지금은 성당을 보수중이어서 주랑과 성당내부는 볼 수는 없었다.
수정 십자가가 인상적이다.
(나에게 십자가의 의미는?)
(저녁미사와 촛불행진)
오비도스 ☞ 사진 클릭
포르투갈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주말 여행지라고 한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오비도스의 역사는 12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게르만과 무어인의 침략을 받아 오던 마을이 12세기에 그들로부터
독립하여 귀족들이 거주하는 마을로 성역화된다.1282년 오비두스
마을에 반한 디니스 왕은 그의 아내인 이자벨 왕비에게 이 마을을
결혼선물로 주었다. 1441년에는 국왕 아폰수 5세(Afonso V)가 왕자 시절에
사촌 이자벨과 이 마을의 산타 마리아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다.
마을은 이후 16세기까지 많은 왕들이 이 마을을 왕비에게 선물하면서
1834년 이곳은 '왕비의 마을'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마을의 성벽과 성은
13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지어졌고, 이 중 오비도스 성은
13세기 디오니시우스 왕의 지시로 건축 된 것으로 전해진다.
12세기에 지어진 산타 마리아 교회 또한 도시의 랜드마크 중 하나로,
포르투갈의 도자기 타일 예술품인 아줄레주(Azulejo)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도시 성벽 앞에는 1570년에 건축된 3km 길이의
아치형 용수로가 있어 당시의 관개시설을 짐작할 수 있다.
성벽을 따라 마을을 내려다 보며 돌길을 거닐면
마치 중세에 와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을 따라)
(눈길 가는 곳마다 셔트를 눌러댄다)
(마치 중세로 되돌아 간듯한 느낌)
까보다로까, 포르투갈의 땅끝마을 ☞ 사진 클릭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 또다른 시작점이 되는 곳.
아찔한 해안 절벽밑으로 대서양의 거대한 파도가 거세게
몰아치며 더 이상 발 내딛을 곳이 없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와 날카로운 바람을 등지고 우뚝 서 있는
십자가상의 기념비에는 '이곳에서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는
포르투갈의 유명한 시인 카몽이스의 시구가 새겨져 있으며
그 밑으로는 호카 곶 현지의 좌표가 기록되어 있다.
바람과 절벽, 붉은 등대만이 홀연히 남아있는 호카 곶에서는
푸른잔디와 들꽃 사이로 난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대서양의
물결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휴식이 된다.
호카 곶의 절벽 근처에서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건물이
바로 관광 안내소이며 기념품 숍이다.
(157)
(158)
(신트라)
리스본 근교의 여행지로 첫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인기있는 곳, 포르투갈의 왕족과 영국 귀족들의 휴양지로도
오랫동안 사랑받았던 곳. 울창하고 깊은 산 속에는 13∼15세기의
왕궁인 신트라성 궁전과 동화속의 그림같은 페나 성,
그리고 산 위에 지은 무어인의 성터가 신트라에서도 많이 찾는 곳.
그리고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는 신트라의 전경은 한 폭의
그림같다. 중세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마을 전체의 풍경과
식민지에서 가져온 외래종 수목과 토종 식물들이 조화를
이루어 도시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다.
영국의 시인 바이런은 이곳을 '위대한 에덴'이라고 묘사했고,
다른 많은 문학가들도 이곳의 아름다움을 앞다투어 찬양했다고 한다.
조용하고 아담한 고도(古都)로 아기자기한 숍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고,
아줄레주 타일로 장식된 옛 귀족풍의 저택과 건물들을 거리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또한 매년 여름이면 도시에 산재해 있는
교회나 공원에서 수준 높은 대규모 음악 페스티발이 열려
신트라를 찾는 여행객을 즐겁게 해 준다고 하는데,
잠깐 스치듯 지나가는 바람에 속속들이 보지 못하고
이동하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던 신트라.
(160)
(161)
(163)
하루를 묵으며 찬찬히 돌아 봤으면 좋겠다.
아쉬움이 많이 남기고 발길을 옮겼다.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 ☞ 사진 클릭
영어로는 리스본(Risbon), 포르투갈어로는
리스보아(Lisboa)라고불리는 포르투갈의 수도이자 가장 큰 도시.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구시가지는 저럼하고 풍부한 해산물,
정 많고 친절한 포르투갈 사람들로 인해 유럽인들의 주말 휴가지로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 리스본 항구에서 접한 테주 강(타호 강)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긴 강으로, 하류측의 방폭이 약 10km나
되어 강이라기 보다는 바다라고 할 만큼 규모가 크며
어느 곳에서나 멋진 석양을 감상할 수 있다.
현재 리스본 시내에 있는 대부분의 건물은
1755년의 대지진이후 폼발 후작의 지휘하에 정비된 것이다.
지진으로 인한 화재와 해일로 시가지의 3분의 2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그 이전의 역사적 건축물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서쪽 끝의 벨렘지구에는 본래 성채였던 벨렘 탑과 16세기
마누엘 양식의 제로나무스 수도원이 남아있다.
(포르투갈의 탐험가들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제로니무스 수도원)
리스본의 역사적인 구역 벨렘에 있으며,
이 도시에서 가장 훌륭한 역사 유적 중 하나이다.
이탈리아, 스페인, 플랑드르 디자인을 병합한 건축 양식의 걸작.
이 수도원은 '항해가 엔리크'가 세운 오래된 종교 암자가 있었던 자리.
1497년, 또 다른 탐험가인 바스쿠 다 가마와 그의 부하들이 인도로
출발하기 전 이곳에 머물렀다. 1499년 다 가마의 귀환을 기념하기
위해 마누엘 1세의 명에 따라 이 자리에 수도원이 세워졌다.
디오구 보이탁의 책임 아래 1502년 건축이 시작되었고, 1517년에는
스페인 건축가 조앙 데 카스틸류가 작업을 이어받아 계속했다.
프랑스 조각가 니콜로 샹테렌은 제로니무스 수도원에
르네상스 디자인의 요소를 첨가했다.
건축 비용은 동양에서 수입해 오는
특정한 향료에 매긴 세금 5퍼센트로 충당했다고 한다.
마누엘 왕이 죽자 건축이 중단되었다가 1550년 재개되었다.
두 명의 포르투갈 왕, 마누엘과 조앙 3세와 바스쿠 다 가마도
수도원 부속 성당에 묻혀있다. 수도원은 1850년 한 차례
증축되었으며 고고학 박물관과 해양 박물관이 있다.
제로니무스 수도원과 인근 타주강에 있는 벨렘 탑은
1983년 '히에로니무스회 수도원과 벨렘 탑'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 수도원은 포르투갈이 '발견의 시대'를
이끌어 갈 때 누렸던 영광을 반영하고 있다.
(53m 높이의 발견의 탑)
범선모양으로 대항해 시대 공헌을 했던 사람들..
엔리케 왕자, 마젤란, 바스코다가마 등의 순서로 조각되어 있다.
포르투갈의 번영을 이룬 대항해시대의 힘이 느껴지는 조각상이다.
이 자리가 인도양을 개척한 바스코다가마가 항해을 떠났던 곳이라고.
엘레베이터로 탑 전망대에 오를 수 있다. 요금은 3유로.
다른 곳을 두르고 오느라 시간이 없어 그만 패스.
(한 때는 해양왕국이었던 포르투갈)
유럽 이베리아 반도 서부에 있는 나라.
국명은 국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도시 포르투에서 유래한다.
포르투갈은 지중해,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4지역을 잇는 해상 교통의 결절점에 위치,
오늘날 에스파냐와 더불어 유럽에서는 후진국에 머물러 있다.
기원전 750년경 켈트족이 정착하여 그리스인 페니키아인,
카르타고인들의 지배를 받았다. BC 2C경 케사르, 아우구스투스의 원정으로
15세기 초 주앙 1세의 아들 항해왕 엔리케(Henrique)가 인도 항로와
브라질을 발견함으로써 스페인과 함께 해양 왕국이 되었으나,
1580년 왕가의 분규로 스페인에 합병(1580∼1640)되었다.
수도 리스본은 식민지로부터 몰려드는 부로 번창했으나,
왕실과 귀족의 낭비와 경제실패로 부르조아가 형성되지 못했다.
16세기 중엽부터는 영국에 경제적 종속이 심화되고, 브라질에서 인도에 이르는
국력은 쇠퇴해 갔으며, 사회적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었다.
1910년 공화파의 혁명이 일어나 마누엘 2세가 폐위되고 공화제가
인구는 2015년 어림 10,477,800명, 농업과 광업이
주산업으로 산업 경제구조는 유럽에서 가장 후진적이다.
2007년 현재 1인당 국민소득은 21,018 달러.
(파도가 치며 일렁이는 것 같은 리스본 광장)
광장은 물론 인도까지 대리석 조각으로
각양각색의 모습들을 표현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네델란드 착륙직전)
암스테르담 (잔세스칸스, 풍차마을) ☞ 사진 클 릭
암스테르담이라는 이름은 암스텔강의 댐에서 기원한다.
암스텔 강에서 1170년과 1173년에 일어난 홍수 직후, 다리와 댐을
건설하면서 마을이 형성 발전하였고, 이후 14C 초 도시로 승격되었다.
한자동맹으로 인한 무역업의 성행으로 암스테르담은 번영을 누렸다.
1515년부터 카를 5세(Charles Ⅴ)의 즉위와 함께 시작되었던 스페인의
지배 이후 새로운 세금의 부과, 기독교에 대한 종교탄압 등으로 인해
스페인에 대한 저항과 네덜란드독립전쟁(Eighty Year’s War)이
일어나게 되는데 암스테르담은 그 주요 거점이었다.
17세기 황금시대(Dutch Golden Age)에 무역의 발달로
암스테르담은 주요 항구로 발전하게 되었다. 1602년 네덜란드가 자바섬에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 아시아 무역을 독점하게 되면서, 암스테르담은
북미, 아프리카, 오늘날의 인도네시아, 인도, 스리랑카, 브라질에 이르기까지
세계적인 무역네트워크를 구축했다. 동인도 회사와 서인도회사의 많은 지분을
암스테르담의 상인들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암스테르담은 세계 최대의
상업도시이자 금융의 중심지로 발전한다.
18세기 후반에 영국,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인해
1810년 홀란드(Holland) 지역이 프랑스 영토로 편입되기도 하였으나,
이후 1815년 네덜란드 왕국이 설립되면서 19세기는 암스테르담의
두 번째 황금시대를 맞이했다. 박물관, 기차역, 콘서트홀 등이 만들어지고
산업혁명의 여파로 암스테르담과 라인강을 연결하는 암스테르담-라인 운하,
북해와 최단으로 연결되는 북해 운하 등이 만들어졌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암스테르담은 기존의 도시경관을 보전하면서 도시를 확대하고
교외지역 개발에 힘썼으며 1977년에는 교외지역과 암스테르담
간에 지하철이 처음으로 운행되기도 하였다.
(잔세스칸스(풍차마을), 나막신 공장에서..)
(암스테르담 담 광장)
중앙역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있는 도심의 중심 담 광장.
광장 주변으로 왕궁과 신교회, 마담 투소 등 관광 명소가 산재해 있다.
동쪽에는 제2차 세계대전 전몰자를 추모하는 흰색 오벨리스크 형태의
위령탑이 서 있다. 백화점, 기념품점, 식당, 카페가 모여 있다.
유동인구가 많은 광장에는 각종 퍼포먼스가 열리고 있다.
(북부의 베니스, 암스테르담 운하 유람선 투어)
시의 중심은 여러 개의 운하로 둘러싸인 부채꼴 도시로,
반원형의 구시가는 크고 작은 운하가 사방으로 뻗어 있어
장관을 이루며 도시 형성과 개발 과정 자체가 도시의
상징이자 관광자원으로 인정받고 있다.
도시의 틀을 형성하는 암스테르담 운하와
암스테르담 방어선은 '암스테르담의 17세기 운하 연결망'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17세기에 인구의 증가로
운하와 다리로 북부의 베니스라고 불린다.
(이제는 집으로 갈 시간)
암스테르담에서의 시티투어를 마치고 중앙역에서
공항가는 길.. 암스테르담 시티투어를 하려고 새벽부터 설쳐
달려왔던 보람이 있다. 짧았지만 색다른 경험이다.
(검붉게 타는 노을 속으로 날아 올라서)
느낌을 조금이라도 생생하게 기록할 수 있는데 운영중이던 다른
포털의 블로그가 폐쇄되면서 정성들여 올린 내용들이 사라지는 바람에
블로그에 포스팅하는 자체에 회의가 생기고 힘이 빠져 맥을 놓고
우물쭈물하다 보니 벌써 여행을 다녀온지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여행은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행기를 정리하면서 보고 듣고 체험한
내용들을 확인하면서 되새김질하면서 정리를 해야 여행이 끝났다고
볼 수 있는데 곧 새학기가 시작되니 제대로 정리할 수 있을지?
산에 올라야 산 너머 산이 보인다. 여행이 그렇다.
여행을 다닐수록 더 모르는 것이 많이 생기고, 더 먼 곳에 대한
관심과 동경도 생긴다. 여행중 약 800년 동안 스페인을 지배한 이슬람의
문화에 대한 궁금점이 많이 생겼다. 이슬람에 대한 편견도 많았던 것 같다.
여행을 하면서 그 나라의 역사와 우리의 역사를 대비시켜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스페인 역사에서 대 전환점으로 1492년을 꼽는다.
그 해가 바로 콜럼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하면서 대항해 시대를 열었고,
레콩키스타(Reconquista, 재정복) 운동을 통해 711년부터 지배해 오던
이슬람 제국을 몰아내고 국토를 회복한 해이기 때문이다.
그 때가 우리에게는 성종 23년. 그로부터 2년 후에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절대 왕권 유지를 위해 2차례나 사화를 일으키며
피의 숙청을 하고 있을 때다. 대비된다.
여행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혀주고,
여행자의 눈에 비친 다른 환경 다양한 사람들의 삶과 일상을 보면서
42도를 오르내리는 따가운 뙤약볕, 눈부신 햇살을 받으면서도 하나라도 놓칠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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