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 로마인 후손들의 나라

2016. 8. 29. 14:55여행/여행기





루마니아, 로마인 후손들의 나라
(발칸 반도 여행)





이번 여행은
발칸 반도의 루마니아로 들어가서 불가리아와
옛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되면서 탄생한 세르비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크로아티아를 거쳐 슬로베니아로 나오는 여정으로 잡혀있다.
그리스 시대부터 도시국가의 식민지로, 로마 시대에는 로마의 영토로 편입되어
식량 공급원과 물자조달로 로마의 번영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발칸 반도.
동로마와 서로마의 경계가 되고 동로마의 정교와 서로마의 가톨릭, 게르만족, 슬라브족,
오스만투르크의 이슬람, 훈족의 아틸라와 서고트족 등의 각축장이 되었던 지역.
다양한 종족과 종교와 문화가 뒤섞여 있는데다 외세의 지배까지 겹쳐
역사적으로 분쟁이 잦아 '세계의 화약고'라고 불리는 지역, 발칸반도!
발칸 반도의 많은 나라들을 돌아 보지만 마케도니아와 알바니아,
최근 세르비아에서 독립한 코소보는 여정에 빠져 있다.

제일 먼저 들리는 루마니아는
'로마인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과 토지'라는 뜻을 가진 나라지만,
루마니아에 대한 이미지는 소련군 주둔, 독재자 차우셰스쿠, 드라큘라, 집시,
코마네치 망명 등 거의 부정적인 이미지들만 떠오르는데 실제로는 어떤 모습일까?
물론 루마니아에 대한 관심부족의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루마니아 뿐 아니라
이번에 여행하는 나라들 모두 제대로 아는 것 없이 엇비슷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니 준비없이 떠나는 것이 부담되지만
'보는 만큼 알게 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중간 경유지 카타르 도하 공항)

루마니아는 카타르를 통하거나 터키를 통해 입국한다.
배낭을 멘 사람들은 킬리만자로 등정하러 가는 팀이다.
내년에는 갈 수 있으려나..







(카타르 도하 하마드 공항은..)

지난번에 올 때보다 공항 규모도 커지고 많이 달라졌다.
상징이 된 노란 곰(작품명 : 우울한 곰)을 비롯하여
설치 미술이 있어 환승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보낼 수 있다.
아이들이 뛰놀 수 있는 작품들도 설치되어 있었다.









(하늘에서 본 도하)

인공 섬에 세워진 고층 건물들이 장난감 같다.





(루마니아 상공)







(5시간을 날아 도착한 부카레슈티 바네사 국제공항)





(루마니아 지도, 물고기 모양이다)

루마니아(루마니아어: Romania 로므니아)는
남동부 유럽의 공화국으로 발칸반도 북동부에 위치.
공용어는 루마니아어. 수도는 부쿠레슈티. 넓이 23만 7500km².
인구 2273만. 북쪽은 우크라이나, 북동쪽은 우크라이나·몰도바,
남쪽은 불가리아, 북서쪽은 헝가리, 남서쪽은 유고슬라비아에 접해 있으며
동쪽은 흑해에 임함. 북부를 카르파티아산맥이 관통하나 국토의 대부분은
비옥한 평야이며 다뉴브 강의 여러 지류가 흐름. 옥수수·밀·담배·
해바라기·목화를 재배함. 석유·천연가스 등 지하자원이 풍부하며
화학·철강·기계공업이 발달. 과거에 석유 생산지로 유명하기도 했다.
통화는 레우(RON)이며, 일인당 GDP는 10,161$(2014) 주민은 루마니아인.
종교는 루마니아정교. 루마니아는 유럽의 국가들 중 오늘날에도 여전히
취약하지만, 다키아를 식민지로 삼은 로마인들의 후손이 주변의
슬라브 세계 속에서 그 언어와 독창적 문화양식을 유지해 왔다.
2004년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에 가입했고,
2007년 1월 1일 EU의 정식 회원국이 되었다.





(루마니아 초대국왕 카를1세의 기마상)

루마니아 초대 국왕 카롤 1세는
루마니아의 근대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한다.
부친 쪽으로 프러시아 국왕을 배출한 호엔촐레른-지그마링겐
왕가 출신이며, 모친 쪽으로 프랑스 국왕 보나파르트 나폴레옹과
아주 가까운 친척 관계라고 한다. 그는 루마니아에 입성한 1866년 4월부터
군주로 인정받았으며 그해 5월 10일에 루마니아 공으로 정식 취임하였다.
루마니아가 완전한 독립국의 지위를 얻자 카롤 1세는 1881년 3월 14일에
루마니아 공에서 루마니아 왕으로 승격하여 1881년 5월 10일에 또 한 번
성대한 대관식을 치렀다고 한다. 1914년 10월 10일 시나이아의
펠레슈 성에서 사망할 때까지 왕의 역할을 다했다고 한다.







(루마니아 국립미술관)

옛 공화국 궁전으로 일부를 국립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다는데 문이 닫혀있다. 정원에는 제법 많은
조각 작품들이 군데군데 전시되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카를1세의 옛 겨울 궁전이었으나 현재는 국립중앙도서관으로
사용 중. 루마니아의 수도 부카레슈티는 발칸반도 교통의 요충지로
발칸의 파리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다웠던 도시였지만 차우셰스쿠의
독재정권 이후 회색빛 건물들로 가득 찬 도시가 되어 첫인상이
차갑게 느껴지지만 이제는 독재 권력의 상징이 관광자원이 되어
여행객을 끌어 들이고 있다고 한다.





(구 중앙정보국 건물)

개인 소유가 되었으나 구 비밀경찰 파견소였던 연유로
허물어 신축하지 못하고 아래 2개 층은 그대로 보존하면서
그 위로 현대식 건물을 증축 중이라고 한다.







(구 공산당본부 건물과 혁명광장, 그리고 혁명기념탑)

차우셰스쿠가 마지막 연설을 했던 구 공산당 본부 건물.
그 앞의 혁명광장은 1989년 차우셰스쿠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12월 혁명이 일어났던 곳. 1939년에 화재와 혹시 폭동이 일어나면
왕궁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왕궁 앞 광장',
공산정권 시절에는 '공화국 광장' '공산당 본부 앞 광장'이라 불렸으나,
1989년 혁명 이후 '혁명광장'이라고 불리고 있다. 혁명광장은
1989년 25년간 독재를 이어온 차우셰스쿠 정권을 몰아낸 시민혁명이
일어난 광장으로, 당시 희생된 이들을 기리기 위해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25m 높이의 첨탑 조형물인 혁명 기념비(위령비)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있다. 광장 주변의 석조 건물에는 지금도 탄흔이
선명하게 남아 격렬했던 순간들을 떠올리게 한다.

1989년 12월 21일 정오 차우셰스쿠 대통령의 연설이
5분 만에 중단되고, 대통령 지지 집회가 아수라장으로 변하면서
루마니아 12월 혁명이 발발했다. 그는 옥상에서 헬기를 타고 급히
탈출했지만 헬기조종사의 기지로 잡히고 그해 12월 25일 총탄을 맞고
처형되었다. 당시 시위 장면은 국영 텔레비전을 통해 루마니아
전역에 중계되었고 후에는 전 세계에 방송되기도 했다. 그러나
혁명 후에도 공산당 간부들이 여전히 실권을 행사했기 때문에
'반뿐인 혁명' '도둑맞은 혁명’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루마니아 현대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임에는 분명하다.

이외에도 혁명광장 주위에는 정부종합청사,
비밀경찰본부, 국립도서관 등 루마니아의
중요한 건물들이 밀집되어 있다.





(독재자 차우셰스쿠와 부인 엘레나 / 참고 자료)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구두 공장 직공으로 일하면서 공산주의자로 활동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소련이 루마니아를 점령하자,
소련은 루마니아 공산주의자로서 소련군을 열렬히 맞아들인 그를
루마니아 공산당 간부로 임명한다. 차우셰스쿠는 소련의 후원으로 승진을
거듭하여 1964년 루마니아 최고 권력자 자리에 까지 올랐다. 차우셰스쿠는
1971년 북한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의형제를 맺는다. 그는 북한 사람들이
김일성을 '민족의 태양'이라고 부르듯 자신을 '카르파티아 산맥의 천재'로
칭송하게 하고, 자신의 아내 엘레나 차우셰스쿠를 '자애로운 어머니'라고
부르게 하며 권력 2위 자리에 임명했다. 그는 북한을 다녀온 후로 모든
루마니아 국민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시작한다. 고아 출신을 불러 모아
자신의 친위대인 세쿠리타테(보안대)를 만들었다. '차우셰스쿠의 아이들'
이라고 불린 세쿠리타테 대원들은 사회주의 체제였던 루마니아에서
높은 월급을 보장받고 최신식 무기를 지급받았다. 그들은
차우셰스쿠가 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제거하며,
루마니아 전역에 도청기 300만대를 설치했다.

1977년 루마니아에 지진이 발생하자 그는
"시가지를 재건축해야 한다"며 사치스러운 '인민궁전'을 건설하기로 하고
전통있는 문화재들을 마구 파괴한 뒤 36만㎡(잠실야구장 26개 넓이)
땅에 궁전을 짓기 시작했다. 1984년부터 5년간 루마니아 국민총생산의
30%가 투입되었다. 이 후 차우셰스쿠의 사치와 기괴한 악행으로
루마니아는 동유럽 빈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는 1989년 공산당 본부건물에서 가진 지지집회에서
대중 연설을 하면서 들끓는 민심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화자찬만
늘어놓자 화가 난 군중이 반(反)공산당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성난 군중 앞에서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와 엘레나 차우셰스쿠 부부는 "시끄러워!
조용히 해!"라고 소리쳤다. 이 모습은 그대로 루마니아 국영 방송국에서 전국에
생중계로 방송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분노한 루마니아 국민들은 용기를 내어
차우셰스쿠의 퇴진을 요구하자 부부는 헬기를 타고 국외로 도망가기 직전
헬기 조종사의 기지로 탈출에 실패하고 체포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1989년 성탄절인 12월 25일, 루마니아의 재판관들은 만장일치로
'시민들에 대한 대량학살과 국가 경제 파탄 죄'로 차우셰스쿠 부부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절대 권력을 행사하던 악명 높았던 독재자는
처참하게 90발의 총탄을 맞고 그렇게 갔다.





(크레출레쿠 정교회)

혁명광장 맞은편에 있는 크레출레스쿠 정교회는
전형적인 루마니아 정교회로 18세기 이 지역의 귀족이며 대법관이었던
이오르다케 크로출레스쿠(Iordache Kretzulescu)와 그의 아내 사프타(Safta)가
기부하여 세운 비잔틴 로마네스크 양식의 정교회로 100년 뒤 루마니아의 유명한
화가 게로게 타타레스쿠(Gheroghe Tattarescu)가 내부벽화를 그렸다고 한다.
이 교회 근처에는 공산당 본부와 연결된 비밀통로가 있었는데
이 통로는 대각선 방향으로 광장 밑을 가로질러 정교회와
연결되어 있어 혁명당시 땅 속에서 비밀경찰이
나타나서 그 존재가 확인되었다고..









(부쿠레슈티를 대표하는 건축물 중의 하나인 루마니아 음악당)

고대 그리스 신전을 연상시키듯 정면에 6개의
이오니아식 기둥들이 배치되어 있는 로매니안 애뜨니엄은
1888년에 세워졌는데 1882년 루마니아 국립은행 설계를 담당했던 프랑스
건축가 알베르 갈레온의 설계를 토대로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건설되었다.
당시 대중들의 기부로 지어졌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음악당 앞의 정원에는
루마니아의 유명 시인 미하이 에미네스쿠의 동상이 있다. 약 600석의 좌석이
마련된 내부 콘서트홀은 벽면이 프레스코화로 되어 있으며, 붉은 바탕의
반구형 천장은 금박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벽면의 프레스코 화는
로마제국의 황제 트라야누스에 의한 정복에서부터 대 루마니아를
실현하기까지 루마니아의 중요한 역사적 순간을 담고 있다.
음악당에서는 연간 많은 음악축제가 열리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루마니아 유명 작곡가이자 화폐 5 Lei의 모델인
조르주 에네스쿠의 음악회가 있다.





(육군 문화성(Cercul Militar National))

1912년에 건축된 건물로 도서실, 강의실 등이 있으며
군대에 대한 사회교육용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인민궁전 입장하기 전 전시실에서..)









(인민궁전 실내 모습.. 살짝 맛보기)

1,2층에 넓고 높이 17m에 이르는 방들이 많이 있다.
방들은 돈만 내면 빌릴수 있다고 하는데 나디아 코마네치가 결혼식을
올렸던 인민궁전에서 가장 큰 방은 하루 빌리는데 15,000 유로 정도..
이 방에 깔려있는 양탄자는 세계에서 가장 큰 단일 양탄자라는데 무게가
자그마치 2톤.. 이 양탄자는 외부에서 주문한 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기계를
가지고 짠 것이라고.. 그리고 이 방의 천장은 광원 반사용으로 유리를
사용했다고 한다. 홀은 대부분 에어컨이 없고 대류 현상을 이용해서
냉방을 하고 난방은 벽에 가려진 라디에이터를 사용한다고..

내부는 투어를 통해 대회의장, 회랑, 마이클 잭슨의 공연이
있었던 테라스 등을 둘러 볼 수 있다. 성인 입장료가 25 Lei인데
사진촬영이 30 Lei라 실내 사진은 몇 컷만 살짝 담아 본다.





(방마다 화려한 샹들리에들이..)

인민 궁전에는 3,500 여 톤의 크리스탈과 480개의 샹들리에,
1,409개의 천정용 전구와 거울을 만들었다. 70톤 이상의 철과 청동으로
만들었으며 90만 cbm의 목재를 썼고 20만㎡의 양모 카페트와 문직(紋織)으로
짠 커튼과 금은으로 장식한 벨벳 등으로 장식되어 있다고..





(블라디미레스쿠 / Tudor Vladimirescu)

누군가 하여 검색을 해 봤더니..
1821년 왈라키아에서 일어난 민중봉기의 지도자라는군요.
그는 투르크 정부에서 세력을 떨치는 그리스인 지배층을 척결하고
루마니아 토착 대 귀족(boieri)의 약탈을 종식시키기 위해 왈라키아에서
민중봉기를 조직했다. 처음에 상당한 호응을 얻었으나 그가 결국
부쿠레슈티에 세워진 임시 귀족정부에 동조함에 따라 지지자들이
떨어져 나가고.. 투르크인들과 공모했다고 의심받아
군사재판에서 처형당했다고 하는군요.





(화려한 장식, 기둥은 코린트 양식)

1980년대에 건축한 건물인데 기둥머리(주두)는
이오니아 양식의 소용돌이에 아칸서스 잎 모양을 형상화한
코린트 양식.. 의회궁전은 규모도 규모지만 부분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섬세하고 화려하기까지 하다.







(의회궁전 발코니에서 본 통일대로)

독재자였던 차우셰스쿠는 대중에게 연설하기를
상당히 좋아했다는데 그 때문에 이 건물에도 그런 일을 하기에
적절한 공간이 아주 많이 배치되어 있다. 그중에 백미는 광장을 바라보는
테라스인데 그 테라스에서 보면 프랑스의 샹젤리제 거리를 본따 만든 광장과
중앙대로가 정면에서 한눈에 들어온다. 챠우셰스쿠는 사용도 못해 보고 죽었다.
이 테라스에서 대중에게 처음으로 말한 사람은 1992년 마이클 잭슨이었는데
그는 루마니아의 수도인 부쿠레슈티를 'Hello! Budapest!' 라고 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고..





(의회궁전(인민궁전) 전경)

독재자 차우셰스쿠가 남긴 부카레슈티의 상징적 건물.
'인민 궁전'이라 불렀다. 1971년 북한을 방문했던 차우셰스쿠가
현재 북한의 금수산태양궁전이라 불리는 주석궁을 본따 만든 건물이라고 한다.
지금은 루마니아 의회와 국제회의 센터 역할을 하고 있다. 당시에는 차우셰스쿠의
집무실과 거처를 목적으로 지어졌다. 가로 270m 세로 240m, 높이 86m, 깊이 92m
규모의 의회 궁전은 지하 4층으로 부터 지상 12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세계에서 행정기능을 하는 건물 중에서는 미국 펜타곤 다음으로 큰 건물이라고.
규모가 큰 만큼 이 건물을 건축하기 위해 주변에 있던 건물들을 다 무너뜨리고
주변에 살던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켰다는데 인민 궁전의 부지를 마련하기 위해
부쿠레슈티의 6분의 1을 깨끗하게 밀어버리는 바람에 역사적 건축물 파괴도
상당했다. 동방 정교회, 시나고그, 개신교만 해도 약 20개에 달하며, 철거한
가택만 수만 채에 이른다고 한다. 심지어 강제 이주시킨 건출물도 있다.
차우셰스쿠는 인민을 위한 궁전이라는 뜻으로 인민 궁전이라고 이름을
지었으나 그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인민 궁전은 차우셰스쿠의 가족,
고위 관료를 위해 쓰이는 등 독재권력을 위해 사용되었다.

인민궁전은 1983년 차우셰스쿠의 지휘 아래
건축가 안카 페트레스쿠가 설계하고, 700명의 건축가와 약 2만 명의
인부가 동원되었다. 궁전은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대리석, 크리스탈,
약 480개에 달하는 샹들리에 등 전적으로 루마니아 자재만을 사용하도록 했다.
당시 국가적 빈곤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막대한 공사비를 들이고 노동력
착취문제를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크고 화려한 의회 궁전을 지어냈다.
무리하게 지었던 탓에 결국 차우셰스쿠는 이곳에서 살아 보지도 못하고
궁전이 거의 완성될 무렵인 1989년 12월 혁명으로 생을 마감했다.
상상 이상의 화려한 내부 모습과 큰 샹들리에를 볼 때마다 탄성이
나오고 대리석 복도를 신나게 걷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화려한 궁의
모습이 독재자의 비참한 말로와 인민들의 피땀으로 지어졌다는
건축이야기가 오버 랩되면서 씁쓸한 감정도 들었다.









(통일 대로 / Bulevardul Unirii)

통일광장.. 교통의 요충지이자 현대적인 건물들로 가득한
부쿠레슈티 번화가에 있는 광장이다. 약 4km나 되는 통일대로의
중앙에 있으며 통일대로 서쪽 끝에는 의회 궁전이 있다. 통일 광장의
한가운데 큰 분수를 중심으로 의회 궁전까지 작은 분수가 연결되어 있다.
프랑스 파리 상젤리제를 모방했다고 알려진 통일대로는 부티크나 상점,
레스토랑이 들어서 있는 파리와는 달리 공산당 간부들의
거주지였던 거대한 아파트가 줄지어 있다.





(안팀 정교회 입구)

어두운 데도 금장 모자이크가 화려하게 빛난다.











(안팀 정교회 / Antim monastery)

1713년 당시 왈라키아 공화국의 대주교이며 시인이자
세밀화가이며 웅변가이기도 했던 안팀 이비레아누(Antim Ivireanu)가
직접 설계하고 감독하여 완성한 건물로 특히 18세기 왈라키아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는 건물로 꼽힌다고 한다. 정교회 내부 그림은 19세기 루마니아의
걸출한 화가인 페트레 알렉산드레스쿠(Petre Alexandrescu)와 게오르게
타타레스쿠(Gheorghe Tatarescu)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1985년 차우셰스쿠 대통령의 도시화 계획으로
당시 교회가 위치했던 인근의 다른 건물들은 모두 밀어 버렸지만
안팀 교회는 이곳으로 교회를 통째로 피라미드의 돌 옮기듯이
무수히 많은 레일을 깔고 교회 원형 그대로 옮겨왔다고 하니
불가사의하게 느껴진다.





(루마니아 동전 10 Lei에 디자인되어 있는 안팀 교회 / 참고자료)







(32)





(기둥이 특이하다)

주두(capital, 기둥머리)는 코린트(Corinthian) 양식인데..
주신(shaft)은 나선형으로 특이한 모습이다.









(모자이크 장식)









(시가지 모습과 부카레슈티 개선문)





(가로수와 숲이 우거진 도심 공원은 참 부럽다)





( )





(루마니아는 평지가 많다)







(유럽은 주유소가 휴게소다.)

목적지가 지척인데 운전기사가
휴식시간이 되었다며 휴게소로 들어간다. 뭐 이렇게 융통성없는
기사가 있냐며 속으로 오해를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유가 있었다.
운전기사의 안전운행을 위해 자동차에 타코메타를 부착해 놓고
일일 8시간 이상은 운행을 할 수 없고, 2시간 마다 25분의 휴식,
4시간 30분 운행한 뒤에는 반드시 45분 이상의 휴식을 취하도록 강제하고 있었다.
얼마 전 봉평에서 큰 사고가 나자 국토교통부가 '제2의 봉평 사고'를 막겠다며
27일 내놓은 '사업용 차량 교통안전 강화대책'에서는 4시간 이상 연속 운행시
최소 30분 휴게시간 보장, 특별한 사정시 1시간 연장운행 허용이라는 대책을
내놓았다. 참 그럴듯해 보이지만.. 조금만 생각해 봐도 속빈 강정이다.
서울에서 출발한 차는 부산에 가서 휴식하라는 말이다. 이런 탁상공론식
대책은 없느니만 못하다는 생각이다.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양떼들이 모습이 종종..)





(브란 성 매표소..)

작고 소박한 브란 마을은
루마니아를 찾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 와보고 싶은
동유럽 최고의 관광지가 되었다.
매표소가 장사진을 이룬다.





(브란 성(Bran Castle))

브란성이 이렇게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은
아일랜드의 소설가 브람 스토커(Bram Stoker)의 대표작
'드라큘라'가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다.
소설 '드라큘라'의 모델은 왈라키아 공국의 군주 블라드 체페슈(Vlad Tepes)로
그가 이 곳 브란 성에 아주 잠시 머물렀다고 해서 브란 성은 드라큘라의 성
(Dracula's Castle)으로도 불리고 있다. 아쉽게도 소설의 배경이 되었을 뿐
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큘라의 전설을
찾아오는 여행객의 발걸음은 끊이질 않는다.





(미로 같은 좁은 통로를 따라 올라가면)

상상했던 드라큘라가 나올 것 같은 음습한 분위기가
아니라 널찍한 방이 나오고 방에는 중세풍의 고풍스런
가구들과 갑옷을 비롯한 무기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 성 한복판의 우물)





(블라드 체페슈 / Vlad Tepes)

루마니아인들이 나라를 지킨 위인으로
존경하는 왈리키아 공국의 군주이기는 하나
소설 <드라큘라>의 모델로 더 유명한 인물.
블라드 체페슈가 트란실바니아 시기쇼아라에서 그가 태어난 1431년.
그 시기 왈라키아 공국은 오스만투르크에 끊임없이 침략의 위협에 시달렸는데 그는
어린 시절 그의 남동생과 함께 볼모생활을 하기도 했다. 돌아와서는
왈라키아 공국의 군주가 되고 세 번의 통치기간 동안 오스만투르크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루마니아를 구한 용맹한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런 그가 소설 드라큘라에서 잔혹하고 두려운 흡혈귀로 표현되었던 것은
아이러니할 수 있지만 거기엔 이유가 있다. 오스만쿠르크와의 전쟁에서
붙잡힌 포로를 잔인하게 처형하는 과정에서 그의 잔인함이 드러났던 것.
그는 뾰족한 꼬챙이를 항문에서 입으로 꽂아 포로를 죽였다고 알려진다.
그 방식 때문에 루마니아어로 꼬챙이를 의미하는 체페슈라는 별명이 붙었다.
사실 그가 좋아했던 별명은 따로 있었는데 소설의 이름 드라큘라였다.
용의 기사단이었던 아버지의 이름에서 가져온 용이란 뜻의 드라큘(Dracul)을
자신의 이름에 넣어 용의 아들이라는 뜻의 드라큘라(Draculea)를 사용했던 것.
이러한 배경이 되어서 소설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블라드 체페슈란 이름을
떨치게 되고 드라큘라의 대명사가 되었지만 실제로 오스만투르크와
과한 세금을 징수하던 작센인들로부터 루마니아인들의
삶을 구해낸 영웅이라 할 수 있다.





(브란 성은 드라큘라와 전혀 상관이 없는 곳)

13세기 독일 기사단의 요새로 지어진 성으로
이후 수 백 년의 세월동안 숱한 역사를 거치면서 지금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후손이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브란 성의 모습)

사실 브란 성을 드라큘라 성이라고 부른다고 하여
내심 기대했으나 실상은 기대에는 못 미쳤다.
조그마한 중세 성 하나로 이렇게 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상술에 놀랐다.





(마녀를 판별했다는 저울)

중세시대 마녀를 판별하는 방법으로
마녀로 의심되는 사람을 저울에 다는 방법이 있었다는데
저 저울이 그 마녀 판별 저울이라고.. 마녀는 빗자루를 타고
날아 다녀 가볍기 때문에 두 사람을 양쪽에 달아 가벼운 쪽이
마녀로 판정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방법도 있는데 마녀는
가벼워서 물에 빠지지 않을 걸로 생각하여 물에 빠뜨려
물에 가라앉을 경우 무고한 사람으로 생각해서
죽기 전에 건져내어 주었다고 하니..









(55)





(부쉬텐(Busteni) 산꼭대기의 거대한 십자가)

해발 2291m 부체지(Bucegi) 산의 카라이만(Craiman) 봉우리에
세계1차 대전 참전 용사를 기리기 위해 1928년에 세워진 28m 높이의
십자가로 카를 왕의 왕비가 세웠다는데 2014년 세계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십자가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고 한다.
브란 성 오고 가는 길에 보인다.





(56)





(시나이아 펠레슈 성(Pele? Castle))

루마니아 초대 왕 카롤 1세의 여름 별장으로 지어진 이 성은
그의 마지막 휴식처가 되었다. 1866년 카르파티아 산맥 위에 자리 잡은
시나이아를 처음 방문한 왕 카롤 1세가 아름다운 풍경에 빠져 지은 성.
성은 1873년부터 1914년까지 오랜 시간에 걸쳐 지어졌으며 성은
네오 르네상스와 고딕 리바이벌 양식 등이 혼재되어 있다.
카롤 1세는 서유럽의 궁과는 차별화된 독창성이 돋보이는 궁을 짓기 위해
심사숙고했고 독일의 건축가 빌헬름 도데러와 요하네스 슐츠, 66m의 중앙
시계탑을 만든 체코 건축가 카렐 리만 등의 손을 거쳐 진행했으며
이외 이탈리아 발바니아 그리스 독일 헝가리 터키 체코 등
유럽 각지 건축가들의 손을 빌려 탄생했다고 한다.

펠레슈 성은 1883년 유럽 최초로 전력 발전소를
통해 전기로 불을 밝히고, 중앙난방을 갖추기도 했다.
투어는 기본 45분이 소요되며 옵션에 따라 시간이 달라진다.
사진 촬영은 추가 요금을 지불해야 한다.







(67)









(무기 4천여 점이 전시되어 있는 무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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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방들과 가치 있는 소장품들..)











(화려하면서도 고풍스럽고 중후한 방)

루이 14세 스타일로 꾸며진 특색있는 공간,
비밀통로를 품고 있는 왕의 서재, 유리 공예로 유명한 이탈리아
무라노의 샹들리에 등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전시되어 있어
성을 둘러보는 내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그 당시 제작된 거울의 저 정도였다니..)

크기도 크기려니와 지금 기술로도 왜율(歪律)이 저 정도로 낮은
평탄한 거울을 제작하기 어려웠을 텐데.. 거울에 비친 모습이
실제 모습 같다. 감탄사를 연발한다.









(79)

공산 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루마니아의 마지막 왕인
미하이 1세의 소유였지만 국가에 귀속되면서 1957년 박물관이 되었고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가 집권한 15년 동안에는 개방하지 않았다.
현재는 다시 왕실 소유가 되었다. 성안에는 60개의 침실과 30개의 욕실을
비롯하여 집무실, 서재, 식당, 음악실, 알현실, 알현 대기실 등
160개의 방이 있으며 크고 화려하면서도 중후한 멋이 있다.





(천장화)





(유리 장식이 참 정교하고 아름답다)







(포토 존에서 한 장..)

동화에 나올 법한 탑들, 뾰족한 첨탑을 지닌 왕궁을 배경으로..





(역시 펠레슈 성은.. 웨딩촬영의 명소뿐만 아니라)

로맨틱한 결혼식장으로도 각광받고 있다고 한다.

루마니아의 결혼 풍속은..
교회나 호텔 같은 곳에서 하는 것은 비슷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밤새도록 흥겨운 전통음악과 함께 밤부터
새벽까지 열리는 피로연.. 10시간 가까이 춤추면서 즐긴다는군요.
특이한 것은 신랑 신부와 가족, 하객들이 함께 길을 행진하고,
길에서도 신나게 춤을 춘다는데.. 정말 흥미로운데
직접 볼 수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참고자료 / 루마니아 전통의상)

루마니아의 전통의상은 크게 7개 지역으로 나누는데
각 지역별로 의상의 옷감 형태와 색깔 장식 등이 차이가 난다고 한다.
루마니아 전통의상은 대부분 마, 아마, 직물, 모직을 기본으로 하여
셔츠는 남녀가 비슷하지만 여성의 셔츠에 자수의 양이 많다.
남자의 전통의상은 흰색 셔츠, 흰색 바지, 벨트, 모자, 조끼
또는 외투로 구성된다. 셔츠의 길이, 자수의 종류, 바지의 형태,
모자의 모양 그리고 조끼의 장식에 따라 지역적 차이가 있다.
여자 의상은 블라우스, 흰색 치마, 앞치마, 두건, 조끼 등으로
블라우스의 자수 위치와 모양, 색깔, 소매의 형태, 앞치마의
색깔과 자수의 모양이 지역별로 차이가 난다고 한다.

위 사진은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전통의상이고
아래는 루마니아 동남부 지방의 전통의상





(펠레슈 성 주변을 순환하는 코끼리 열차)





(끝없이 펼쳐지는 해바라기 밭)

보기는 좋다만.. 각국의 산업이 특화되어 있는
유럽연합에 속해있으면서 해바라기 심어 어떻게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을까 싶다. 석유를 비롯한 풍부한 자원을 개발하여
이전의 잘 살던 시절로 돌아 갈 수는 없는지?







(넓은 벌판으로)

송전선과 스팀파이프, 송유관들이
들판을 가로 지르는 모습이 이채롭다.





(호텔의 만국기.. 태극기는 보이지 않는다)





(그곳의 따가운 햇살에 양말도 말리면서..)





(유류 가격표가 잘 보이게 설치되어 있다)

일반 휘발유가 5.24 레우(RON)로 한화로 약 1,430원
일반 디젤유가 4.90 레우(RON)로 한화로 환산하면 약 1,336원
우리나라 보다 가격이 조금 높은 것 같다.





(루마니아를 떠나기 전에..)

루마니아에 집시가 많은 이유와
차우셰스쿠의 막장 인구정책을 살펴보면..
2차 대전중 나치가 유대인과 함께 인종청소를 하며 집단학살을 하자
유럽전역에 흩어져 살던 집시들이 집중적으로 동유럽으로 피신해 왔는데
루마니아의 경우 집시가 전인구 2200만의 10%가 넘는 250만 명이나 되며
유럽전체 집시의 20%나 된다고 한다. 유독 루마니아에 집시가 많은 이유는
차우셰스쿠 정권이 자신들이 주창하던 '인민의 낙원' 구호를 정당화 하기 위한
수단으로 집시들을 적극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루마니아 정부는
집시들에게 교육기회를 비롯하여 각종 혜택을 주려고 하지만 '공부해서
뭐하냐?'며 주어지는 교육 기회마저 스스로 포기하는 등 제공하는
혜택도 수용하지 않아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차우셰스쿠의 막장인 인구증가 정책은 바로,
피임·낙태를 금지시키고 낙태시술을 하는 사람, 피임약을 복용하는 여자,
피임기구를 수입하는 사람까지 죽였다. 가정마다 의무적으로 자녀 넷을 두도록
강요했으나 지켜지지 않자 차우세스쿠는 '금욕세(사랑하지 않는 세금)'라는 항목을
신설해
자식이 없는 사람에게 과세를 했고 일부러 임신을 회피하는지 경찰을 운용해 감시를 했다.
40세 이하의 여성에게 아이를 5명 이상을 강제로 낳도록 했으며, 만약 아이 수를
채우지
못하면 무거운 세금을 물렸다. 기막힌 사실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까지도
세금을 물렸다고 한다. 인구증가 정책이 필요했거나 합리적으로 진행되었다면 모르겠지만
인구가 감소하는 상황도 아니었는데 야만적인 방법으로 출산강요를 한 바람에
두고두고 루마니아 사회와 경제에 주름살을 안겼다. 아이러니하게도
1989년 혁명 때 거리에 쏟아져 나온 청년층의 다수는 차우셰스쿠의 
출산강요정책으로 급증하기 시작한 세대였다고 한다.





(도나우강 저 건너가 불가리아)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국경으로 흐르는 도나우 강
(다뉴브 강)을 중간부분을 통과하면 불가리아 땅이다.
2박 3일이라지만 루마니아 수도 부카레슈티로 입국하여
브란과 시나이아 부카레슈티만 둘러보았으니 겨우 루마니아 맛만
본 격이다. 한 나라에 한 달을 머물러 있어도 얼마나 보고
얼마나 알겠냐만 아쉽지만 다음 목적지 불가리아로 향한다.
불가리아는 어떤 모습일까?



영화 '난 행복한 집시를 만났네' 주제곡
Szelem Szelem
Esma Redzepova & Ensemble Theodosiev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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