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고가 아니고, 몽골리아

2016. 9. 29. 01:40여행/여행기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다녀온 몽골리아




추석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갑자기 추석 때 몽골을 가지 않겠느냐는 김형의 제의.
몽골 좋지요. 가고야 싶지만 추석에는 시골도 가야하고
서울 처가에도 가야하기 때문에 그냥 잘 다녀오시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끝난 줄 알았는데 며칠 후 저녁 먹는 자리에서 또 이야기를 꺼낸다.
일정을 확인하니 다행히 추석 다음날 늦은 시간 인천공항 출발이란다.
그럼 서울에 있을 때니 공항으로 바로 가서 합류하면 될 것 같았다.
  친구따라 강남간다더니.. 몽골을 이렇게 찾게 될 줄이야..
추석날 9시간 넘게 걸려 서울까지 운전하느라 피로도 덜 풀린 상태지만
다음 날 인천공항으로 달렸다. 추석기간이 1년 중 가장 바쁜 때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정신없이 추석을 보낸 것도 처음이고, 급하게 여행을 떠날 때도
있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여행을 떠나는 것도 처음인 것 같다.
차려진 상 숟가락 하나 올리듯 갈 수 있는 것도 감사한 일 아닌가!
몽골, 몽골하면 징기스 칸이 먼저 떠오르고, 우리 민족과
얼굴 생김이나 풍습이 비슷한 나라, 고려를 그렇게 괴롭혔던
원나라가 생각나고, 봄철 황사를 일으키는 고비사막이 궁금하고,
그 사막에서 볼 수 있다는 별빛도 보고 싶다.
징기스 칸이 말 달리던 몽골의 평원과 원나라의
흔적과 쏟아지는 별을 만날 수 있으려나?
기대가 부푼다.







(울란바토르)

이틀간 묵은 블루스카이 호텔과 호텔에서 바라 본 시내 모습
금요일 밤 8시 경에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몽골 징기스 칸 국제공항에 도착하니
자정 직전.. 곧바로 호텔로 이동하는데 30여 분 걸리다 보니 벌써 하루가
지나가 버리긴 했지만 몽골은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몽골리아)

정식 명칭은 몽골 올스(Монгол Улс) 즉, 몽골국이다.
"몽골 올스"에서 "몽골"(Монгол)은 "용감한"이라는 뜻을 가진 부족
이름에서 유래된 명칭으로 민족 이름을 뜻하고, "올스"(Улс)는 몽골어로
"나라" 또는 "국가"를 의미한다. 직역하면 "몽골 민족의 나라"라는 뜻.
몽골 초원에는 흉노, 돌궐 등 여러 유목 민족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1206년 징기스 칸의 몽골 부족이 초원을 통일하고 대제국 몽골 제국을 건설했다.
14세기 말에 몽골 제국이 몰락하자 몽골 초원에는 다시 여러 부족이 나타났다.
몽골과 중국 명나라를 차례로 정복한 청나라의 강희제(재위 1661~1722)는
몽골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몽골을 내몽골과 외몽골로 분리시켰다.
만주족의 발흥 과정에서 내몽골은 부족들이 일찍 후금과
연합을 이룬 지역이고 외몽골은 후에 복속한 지역이다.

19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나라가 위기에 빠지자,
외몽골은 그 해 12월에 혁명(제1차 혁명)을 일으켜 자치를 인정받았다.
1913년 티베트와 우르가(울란바토르)에서 몽장조약을 체결하였고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이 일어나자 1920년에 국민당이 외몽골의 자치를 철폐시켰으나,
그 해에 반중국·민족해방을 목표로 몽골 인민당이 결성되었다.
1921년에 담딘 수흐바타르가 혁명군을 조직하여 제2차 혁명을 일으켜
독립하였다. 현재 내몽골은 중화인민공화국 내의 영토이며, 외몽골은
1924년 11월 26일에 중화민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정부 형태를 군주제에서
인민 공화제로 고쳐 국호를 몽골인민공화국으로 정하고, 세계에서
2번째로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다. 그 후 소련의 영향력이
강화되었으며, 몽골은 중소 국경 분쟁 발생시 소련을 지원했다.
소련이 해체된 후 1992년 2월 13일에 민주주의를 채택하여
계획경제체제를 폐기하고 시장 경제정책을 도입하였다.

국토 면적은 156만km²로 세계에서 19위이나,
인구는 2016년 어림 3,062,825명으로 인천시 인구 정도.
일인당 GDP는 $5,403(2012), 통화는 투그릭(MNT)





(징기스 칸의 몽골제국)

13세기 원 태조인 징기스 칸이 몽골 제국을 건국했으며,
동서양 여러 국가에 큰 영향을 주었다. 징기스 칸의 손자이자
몽골 제국의 제5대 칸인 쿠빌라이 칸 시절에는 국호를 원나라로
개칭하고 남송을 정벌하여 중국 전역을 지배했고 징기스 칸 때부터
확장된 몽골 제국의 최대 영토를 이룩해냈다.
몽골이 세운 원나라가 몰락해 몽골 초원지대로 물러난 형태인
북원이 1688년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복속하여 외몽골로 불렸다.
1911년 제1차 혁명을 일으켜 자치를 인정받았으나 1920년 철폐되었고,
러시아의 10월 혁명에 영향을 받아 1921년 제2차 혁명을 일으켜
현재의 형태로 독립하였다. 북쪽으로 러시아,
남쪽으로 중화인민공화국에 접하여 있다.

흔히 몽골을 몽고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 몽고라는 표현은 오랫동안 몽골족에게 시달렸던
중국인들이 우매할 몽(蒙)과 옛 고(古)를 조합하여
몽골족을 비하하기 위해 만든 단어라고 한다.
몽골로 불러 주어야 할 것 같다.












(자이승 전망대)

제2차 세계대전 승전기념탑으로 1965년에 세워졌으며
좌측의 발전소부터 우측의 타랑토울까지 울란바타르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오는 전망대. 2차 대전의 상황을 나타내는 벽화가 인상적이며 라마교의
상징인 오보도 볼 수 있다. 오보와 비슷한 것들이 시베리아, 중국 둥베이 지역,
티베트, 신장웨이우얼(新疆維吾爾)자치구 등지에도 분포하며, 한국의 서낭당도
이와 비슷하다. 기본구조는 돌무더기나 흙더미로 만든 기단(基壇) 위에 목간
(木杆)과 자연수목으로 꾸미는데, 규모와 형태는 지역에 따라 다르다.
몽골·티베트의 '오보(오부)'는 돌을 보기 좋게 원단 위에 목간과 기,
칼과 창 등의 무기를 세워 두는 것으로, 그 규모가 크며
군(群)을 형성하고 있는 곳도 있다.

이번 여행은 몽골에 머무는 시간이 고작 72시간.
첫날 울란바토르 시내에 있는 자이승 승전탑과 이태준선생 기념공원에
갔다가 1시간 30분 떨어져 있는 테를지 국립공원으로 이동하여 초원의
게르에서 하룻밤을 묵고, 아리야발 사원 산책과 징기스 칸 청동기마상을
관람하고 첫날 묵었던 호텔로 돌아와 다음날 시내의 간단 사원과
수흐바타르 광장 등을 돌아보는 일정이다.
짧지만 널널한 일정?











(이태준 기념공원)

몽골 울란바토르의 복드칸(Bogd Khan)산 자락의
자이승 승전탑 아래에 '이태준 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대암 이태준(李泰俊; 1883-1921) 선생은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1907년 세브란스 의학교에 입학, 세브란스 의학교를 제2기로
졸업한 이후 한국을 떠나 1914년 몽골로 이주, '동의의국'이라는
병원 개업 후 몽골인들의 각종 질병치료에 헌신하여 몽골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자랑스러운 한국인. 몽골사회에서 하늘이 내린 의사'로 존경 받았으며,
몽골 국왕의 주치의로 활동. 몽골 최고훈장인 '에르데난 오차르'를 받았다.
그는 존경 받는 의사로서의 활동과 함께 의열단 단원으로서 애국지사들과
연계하여 일제 타도를 위한 각지의 항일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태준 선생은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의형제를 맺은 분이기도 하다.
1921년 울란바토르(Ulan Bator)를 점령한 러시아 백군 운게른의
부하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2000년 7월 7일 이태준 선생의
업적을 기념하여, '이태준 기념공원'을 건립하였다.

















(간등사)

몽골을 대표하는 가장 큰 불교사원으로
1937년 사원파괴운동으로 많은 손실을 입고 소멸의 위기까지
몰리지만 종교탄압이라는 비난을 의식한 공산당국이 대외선전용으로
이 사원을 활용하면서 다행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현재
150명이 넘는 라마승들이 살고 있으며 1996년 달라이라마에 의해
점안된 높이 25m의 미그지드장라식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울란바토르 시 외곽의 모습)





(드넓은 평원)









(테를지국립공원)

서울보다 위도가 10도 이상 높은(북위 47°55′동경 106°55)데다
해발고도 고도가 1350m나 되니 곳에 위치해 있다 보니
벌써 늦가을 분위기가 물씬하다.













(오는 날이 장날..?)

몽골의 가을 하늘은 쾌청하기로 유명하다더만
  구름이 짙다. 오늘 밤 별 볼 일 있어야 할 텐데..









(하루 밤을 묵은 테를지국립공원 게르 주변 풍경)





(바위 봉우리에 올라..)

















(테를지국립공원에서..)









(테를지국립공원 유목민 게르 방문)

  게르에 들어갈 때 문턱을 밟지 않기..
몽골 전통문화와 음식 등을 체험할 수 있다.
이곳에서 몽골 전통차로 우뮤가 들어간 수테차와 마유를
발효시켜 만든 마유주와 몽골 전통 치즈도 맛 보았다.





(말 달리자!)

그냥 달리고 싶건만 말들이 야생성이 남아있어
위험하다며 마부 1사람이 말 2마리를 끌고 안내한다.
빨리 달리자니 조금 속도를 내긴 내었는데.. 글쎄..









(테를지국립공원에서의 망중한)

몽골 전통복장도 입어보고..







(여기도 별 관측지로 유명하다는 곳이라는데..)

위 빌려 온 사진 같이 별이 쏟아지는 밤을 기대했는데..







(몽골의 전통차인 수테차를 마시며)

전통 공연도 보았는데.. 잘 하긴 하였지만
나이어린 아이들의 공연은 안쓰럽기도 했다.





(넓은 비포장 도로)







(보기 힘든 솜다리가 지천이다)













(추색 짙은 아리야발 사원(Aryapala Temple))











(사원 앞 노란단풍이 든 나무 아래서)









(고려시대엔 해동청을 키우는 응방(鷹坊)이 있었다)

원나라는 고려를 친 뒤 사냥매를 보내라고 요구했다.
고려의 매를 해동청(海東靑)이라고 불렀는데, 이 매를 키우는
마을이 응방. 응방에 관한 기록은 1275년(충렬왕 1)에 처음으로 보이는데,
개경을 중심으로 지방의 역과 외군에 설치했다. 고려는 응방을 경영하기 위하여
몽골 기술자인 응방자를 불러오고, 지방의 응방에는 응방심검별감을 파견하여
매 잡는 일을 독려했다. 몽골에서는 매를 빨리 보내라고 재촉하기도 했다.
1283년(충렬왕 9)에는 응방을 관장하는 응방도감을 두기도 했다.
몽골황제 순제가 어린 시절 고려의 서해 섬에 귀양을 왔을
때에도 송골매를 키우며 전의를 다지지 않았을까.
무서운 속도로 꿩과 들짐승을 낚아채는 용맹한 사냥 새, 매.
그러나 지금 팔에 들여 있는 매는 줄에 묶여서 한국에서 온
나에게 잠깐 포즈를 취하고 주인이 주인의 주머니를 채워주는
놀이감으로 전락되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랄까..
몽골에서 매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오보)

우리의 서낭당과 비슷한 오보(OVOO).
보통 고갯길이나 언덕, 중요한 유적지 및 산꼭대기에
돌무더기를 쌓고 그 위해 나무를 꽂아 만든 것으로 나뭇가지에는 신성함의
상징인 '하닥'이라는 푸른 천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색의 천을 매달아 놓는다.
샤먼 신앙에서 출발한 오보는 이후 티베트 불교가 몽골제국의
국교로 수용되어 전파된 후 불교적 색채를 띠면서
더욱 확산되었다고 한다.









(파란 하늘이 아닌 구름 낀 풍경)









(징기스 칸 기마상)

대몽골제국 800주년 기념으로 만든 세계 최대 기마상으로
2010년 건물높이 10m, 기마상 높이 40m, 직경 30m, 중량 250톤으로
36명의 왕을 상징하는 36개의 기둥을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들었다.
이곳에서 은으로 된 말이 출토된 곳에 동상을 세웠다고 한다.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 갈 수도 있고 계단으로 올라 갈 수도
있는데 3층에 올라가면 징기스 칸의 아주 큰 얼굴이 마주한다.
칭기즈칸이 고향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최고가 아니면 성이 차지 않는 듯..)

소가죽으로 만든 이 신발도 세계에서 가장 크지 않을까?
하긴 징기스 칸을 생각한다면 그럴만도 하다.





(다시 울란바토르 시내로 들어 와서..)









(몽골 전통식당에서 저녁 먹고 PUP에서 몽골 맥주 한 잔)















(수흐바타르 광장)

몽골 혁명의 아버지 수흐바타르가
1921년 몽골인민정부 수립을 기념해 조성했다.
울란바타르의 중심부인 광장의 원래 이름은 몽골 공산혁명의 주인공인
담딘 수흐바타르의 이름을 딴 수흐바타르 광장이었으나, 2013년에 공식적으로
징기스 칸 광장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광장의 한 켠에 위엄있게 앉아있는
징기스 칸의 동상. 징기스 칸 양 옆의 기마상은 사준사구의 멤버인 보르츄와
수부타이이며, 그 가장자리에 각각 펼쳐진 동상은 몽골 제국의 대를 이은
아들 오고 타이 칸과 손자 쿠빌라이 칸이다. 원래 광장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동상들은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것으로 국회의사당 증개축 때
회랑을 새로 만들어서 동상을 집어넣은 것이라고 한다.

공산주의 시절에는 징기스 칸을 폄하하고, 징키스 칸에 대해
말하는 것도 금기시 되었다고 한다. 이 광장의 원래 주인공이었던
담딘 수흐바타르의 상은 광장 가운데 있다. 원래 있었던 상이지만
징기스 칸 동상이 생기면서 징기스 칸을 호위하는 듯한 형태가 되었다.
광장 근처는 국회의사당과 오페라 발레 극장, 공산주의 시대의 문화궁전,
몽골에서 제일 높은 블루 스카이 호텔, 몽골 국립역사박물관 등이 있다.
징기스 칸은 몽골인들이 존경하다 못해 신성시하는 인물이다 보니,
이 장소도 상당히 의미가 있는 곳으로 여겨지는 곳이다.
결혼식 때도 찾고, 몽골인들이 울란바토르에 오면 찾는 곳.
국가 주도 행사나 집회, 인기 뮤지션 콘서트, 축제 등의
용도로도 사용되는 공공장소이다.







(짧은 여정인데 시간은 더 빠르게 지나고..)

번갯불에 콩구워 먹듯 3박 5일간의 몽골 여행은 끝이 났다.
몽골에 머문 시간은 징키스 칸 공항에 도착하여 출발할 때까지
72시간 남짓. 몽골에서 자정을 넘긴 1시에 출발,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새벽 4시. 아직 공항철도도 운행하지 않는 시간. 급한 출장왔다 가는 꼴..
이번 여행은 속독하듯 몽골을 대략 훑어보았으니 다음에는 정독하듯
고려를 그렇게 괴롭혔던 원나라와 대 제국을 이뤘던 징기스 칸의 흔적도
찾아봐야겠다. 물론 맑은 날 사막에 나가 쏟아지는 별들의 향연도 봐야겠지.
역사는 돌고 도는 것, 몽골인들은 징기스 칸의 후예라는 자부심은 강하지만,
몽골제국이 몰락하자 청은 내몽골과 외몽골을 분리시켰다.
이후 외몽골이 중화민국으로부터 독립하여 현재에 이르지만..
현실은 인구가 300만 밖에 안 되는 약소국으로 전락해 쓸 힘도 없는
이 나라가 고려를 그렇게 괴롭히던 원나라이며 대제국 몽골제국을
건설했던 민족인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초라하기만 하다.
몽골을 보면서도 남북통일을 기원한다.
흩어지면 약해지고, 합치면 강해진다.
싸우면 죽고, 통일하면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