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진정한 평화를 기원하며..

2016. 12. 21. 21:56여행/여행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진정한 평화를 기원하며..
(한 발의 총성이 1차 세계대전의 발발 원인이 되고..)





발칸반도 하면 세계의 화약고, 그 중에서
보스니아 하면 내전으로 국민들이 참혹한 고통을 받던
모습이 연상되는 나라. 아직도 분쟁과 전쟁의 불씨가 꺼지지 않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로 향한다. 세르비아에서 보스니아로 갈 때
높은 산지 도로변 산촌의 모습은 평화롭기만 한데 이런 나라가
언제 또 다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세계의 화약고라니..

"미국의 최신예 전투기가 핵 시설이 있다고 짐작되는
북한의 영변 지역에 폭격을 단행한다. 북한은 이를 침략으로
규정하고 즉각 반격에 나서 휴전선 일대로 공격하여 내려온다.
남·북한 간의 공방전으로 한반도 중부 지방은 삽시간에 초토화된다.
전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하여 북한은 생화학 무기를 동원하고,
이로 인하여 서울 시민 456만 명이 몰살당한다."

이것은 소설 속의 한 장면이 아니다.
북한의 핵 개발 의혹이 불거져 나왔을 때, 1994년 미국이 세운
북한 선제공격 시나리오('OP PLAN 5027' 작전) 내용의 일부이다.
미국은 서울 시민 456만 명이 희생당하는 이 엄청난 재앙을 예상하면서도
이 시나리오를 실행하려 하였고, 백악관의 최종 결재 직전단계까지 갔다.
우리 민족을 끝장낼지도 모르는 전쟁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바다 건너
백악관에서 결정되고 시작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정말 끔찍한 일이다.
작금의 상황은 어떤가!
이 땅에는 얼빠진 인간들이 지금도 그런 소리를 지껄이고 있다.
우리가 소리 높여 평화를 외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전쟁은 야만이고, 전쟁은 종말이다"
전쟁은 아니다! 우리 평화를 이야기 하자.
세계의 화약고 보스니아로 향하면서
해보는 생각이다.







(고원지대에 있는 큰 마을과 산촌의 모습)

세르비아에서 보스니아로 가기 위해 산맥을
넘기 위해 고도를 높이는데 제법 큰 마을이 나타났다.
이내 집도 드문드문 하더니 산촌 풍경이 펼쳐진다.









(인적 드문 산촌의 모습)

지나가는 자동차를 보고 손 흔드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맘이 짠해 진다.







(산속에서 만난 휴게소)

미시령 길 같은 꾸불꾸불한 길을 한참을 돌아 오른다.
높이를 더하니 구름 속에 안개비가 내린다. 오는 차를 한 대도
만나지 못한 길을 얼마를 달렸을까. 고도 1,100m를 넘기고서야
휴게소가 나타났다. 휴게소에서 20분간을 쉬어 가야 하는데 초겨울
날씨같이 쌀쌀하다. 휴게소가 추워서 차 안에서 시간을 보내면
좋겠건만 운전기사는 차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아 지도와 국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osnia and Herzegovina)는
남동부 유럽 발칸 반도에 있는 나라로 동쪽 및 남동쪽은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북쪽과 서쪽은 크로아티아와 접하며, 북부는 보스니아, 남부는 헤르체고비나로 나누어져 있다.
보스니아는 보스나 강에서, 헤르체고비나는 15세기 이 지역의 통치자에게 붙였던 '공작'이라는
뜻의 헤르체그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거의 내륙국에 가까워 해안선의 길이는 21km에 불과하다.
국토의 중앙과 남부는 산지, 북서부는 구릉지, 북동쪽 시바 강 유역에 비옥한 평야가 있고
남단 끝 네레트바 강 유역이 평지일 뿐 나머지 지역은 대부분 산지로 되어 있다.
철광석, 망간, 아연, 은, 대리석 등의 지하자원이 산출되고 있으며, 풍부한 삼림자원과
수자원을 개발하여 공업화를 진행하고 있다. 내륙 지방의 상당 부분은 여름엔 덥고
겨울엔 눈이 많이 내리는 대륙성 기후다. 국토 남단 끝 지역은 평야 지대로 지중해성
기후가 나타난다. 수도는 사라예보(Sarajevo). 넓이 5만 1129km2. 인구 436만 5000명.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는 '구성 민족'이라 불리는 3대 민족 집단이 있다.
가장 규모가 큰 집단은 보스니아인(인구의 48%)이며, 두 번째는 세르비아인(37%),
세 번째는 크로아티아인(14%). 정치적으로 보스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 중심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국토의 51%)과 세르비아인 중심의 스릅스카 공화국
(48.5%)으로 사실상 갈라져 있다.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는
민족보다는 지명을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병합됐다가 1918년 유고슬라비아의 일부가 되고 1946년 공화국이 된다.
1992년 4월, 구유고 연방으로부터 독립하였다. 보스니아 내전으로 고난을 겪었으며,
이로 인한 민족 간 갈등은 여전히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내부 분열 위기는 현재진행형으로 이슬람교, 세르비아정교, 가톨릭교가 민족주의와
연결되어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 나라는 시장 경제 체제를 지향하는 의회 민주주의
국가로, 유럽 연합의 회원국 잠재 후보국, 2010년 4월에 탈린 정상 회의에서
가맹 행동 계획을 부여받으면서 북대서양 조약기구 후보국이 되었다.
2002년 4월 유럽 평의회 회원국이 되었으며, 2008년 6월 13일에
설립한 지중해 연합의 창립 회원국이다.

국기는 특이하게 가로 세로 비율이 2:1로,
파란색 바탕 가운데 국토의 모양을 나타내는 노란색 삼각형이 그려져 있고,
노란색 삼각형의 세 개의 변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구성하는
세 민족인 보스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을 의미한다고 한다. 
파란색과 흰색별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유럽의 일원임을 의미하며
노란색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구성하는 세 민족이 서로 협력하면서
아름다운 미래의 희망을 함께 창조한다는 뜻을.. 파란색과 노란색은
유럽기를 바탕으로 한 색으로, 파란색, 노란색, 하얀색은
중립과 평화를 의미한다고 한다.









(시내에 들어서니 트램과 모스크가 먼저..)

사라예보는 이슬람풍의 문화와 기독교 문화가
혼재해 있는 도시였다. 1984년 사라예보 동계올림픽 등
국제 규모의 스포츠 대회를 개최하느라 현대적인 건축물까지
더한 다양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드디어 호텔 투숙..)

베오그라드에서 점심을 먹고 곧바로 출발하였는데
현재 시간이 오후 7시 32분이니 꼭 6시간 30분이 걸렸다.
하긴 세르비아에서 보스니아로 국경을 넘어 왔으니..







(호텔 주변은 어둡고 음산하다. 날씨까지..)

시내 구경을 하려는데 오늘 도심에서 살인사건이
났다는 소식을 들으니 괜히 더 분위기가 음산하게 느껴진다.
사라예보 도심을 흐르는 Miljacka 강을 따라 도심까지
가보려던 생각을 접고 숙소로 귀환.





(사라예보(Sarajevo))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
트레베비치 산기슭을 흐르는 밀랴츠카 강의 좁은 골짜기에 있다.
시민의 거의 절반이 이슬람교도이며, 이슬람교적 특성이 강한 많은 모스크와
옛 투르크인들의 장터 등이 있다. 1415년에는 브르보스나라고 불렸으며,
15세기말 투르크에게 점령당한 후 교역 중심지와 이슬람 문화의 거점으로
발달했다. 오스만 제국이 1850년 사라예보를 행정중심지로 삼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1878년 투르크를 축출하고 1908년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공식적으로 합병했다. 1918년 사라예보 의회에서
유고슬라비아와의 통합을 선포했다. 철물과 카펫 제조를 비롯하여
오래 된 수공업이 맥을 이어오고 있다. 또한 사라예보 분지에서
채굴된 갈탄이 근처 일리야슈에서 코크스로 가공되며
용광로가 있어 주물용 선철을 생산한다.
인구 369,534명(2013), 면적 141.5㎢

1461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세워진 긴 역사를 자랑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암살되어
제1차 세계 대전의 시발점이 된 사라예보 사건으로도 유명하다.
대한민국에는 1973년 이에리사 선수가 주축이 된 세계탁구선수권 대회
단체전 우승으로 알려진 도시이기도 하다. 1984년 동계 올림픽 개최지이며,
보스니아 전쟁 중에 포위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사라예보 국제공항이 있는
교통의 중심지이자 1531년 대학교가 세워진 교육의 중심지이다.

사라예보는 1914년 발생한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 사건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어 역사적으로 불행한 일로 유명해졌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1992년 3월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민족 간의 분쟁으로 내전의 중심지가 되었다.


전쟁 이후 안정을 되찾고 있으나 분쟁의 불씨는 여전하다
근래 관광지로도 다시 부상하고 있다.





(Art Museum)









(사라예보 도심을 흐르는 밀야츠카 강변 풍경)

아담한 도시 사라예보, 강을 따라 줄지어선 나지막한 집들..
그 가운데 위치한 모스크의 높다란 첨탑들.. 아래는 2차 대전까지는
사라예보의 시청으로 사용되다가 이후 국립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아직도 시청이라는 뜻의 비예츠니차(Vijecnica)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전쟁의 상흔)

오래된 건물은 온전한 건물이 없는 것 같다.
자세히 보면 총탄의 흔적이 심하다.







(비극의 역사현장 라틴다리를 배경으로)

라틴다리는 밀야츠카 강 위에 놓인 다리 중 하나로,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던 1928년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프로디 난트 대공과 그의 아내 소피아가 세르비아 민족주의 청년
'가브릴로 프린츠프'에게 암살된 비극의 역사현장이다. 뒤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저격당한 지점에 꾸며놓은 박물관이 보인다.









(역사를 바꾼 두 발의 총성)

역사박물관에 붙여놓은 그 때 그 순간을 설명하는 사진들..









(34)







(폐허로 남은 Ta?lihan)

Han은 오스만 시대 행상들을 수용하던 숙소로
19세기까지 사라예보에 50여개가 있었다고 하는데..
Ta?lihan은 1879년 불타 폐허가 되었다고..





(Hotel EUROPE)

꽤나 유명한 사람이 묵고 갔다는데.. 그가 누군지??







(이어진 골목인데도 완전히 다른 분위기)







(42)





(보스니아 정교회)

사라예보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명소인
갈색을 띄는 정교회는 다섯 개의 돔으로 이루어져 있다.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을 융합한 형태의 이 성당은
파리의 노트르담 사원을 모방하여 건축하였다고 한다.





(가톨릭 성당, 내부 모습)

사라예보 구시가지에는 4개의 종교 사원이 세워져 있다.
이렇듯 보스니아는 세계 4대 종교의 예배당을 한 곳에 품고 있는
다민족 다종교의 국가다.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던 1889년에 건설된
로마 가톨릭 성당은 신고딕 양식의 웅장한 건물로 사라예보에서
가장 큰 성당이다. 성당 앞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3세기를 가로지르는 )

선 하나를 경계로 동쪽과 서쪽이 완전히 다른 분위기.
가톨릭 성당의 십자가는 모스크의 첨탑으로 변하였고,
웅장한 석조 주택은 붉은 지붕의 기와집으로 변해 버렸다.
체스를 두던 사람들은 차를 마시며 담소를 즐기고 있다.
300년이라는 시간을 칼로 자른 듯 순식간에 바꿔 버렸다.
길바닥에 그어진 선에는 Sarajevo Meeting of cultures라고
쓰여 있었다. 흥미로운 모습이다.













(중앙광장 가는 구시가지 거리 풍경)

길거리 카페에는 커피를 마시며 담소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가시 후스랩-베이 모스크(Gazi Husrev-Beg's Mosque))

1530년에 처음 지어졌다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가장 오래된 모스크. 발칸반도 10대 모스크 중 하나라는데
사라예보 이슬람 문화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장소로 규모만
작을 뿐 형식은 전형적인 터키식 모스크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아가씨.. 대체로 키가 크다)











(구리세공사들의 거리 Kazandziluk에서)

골목 구석구석에 진귀한 오스만 제국의 유산들이 포진해 있다.
골동품 거리 특히 카잔드지록 거리는 사라예보에서 가장 오래된 거리 중의
하나로 '장인의 거리'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터키로부터 들어온 금속공예
전통과 기술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구리, 주석, 은 등으로
만든 온갖 수공예품의 향연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유네스코에서 공인받은 장인과 한 컷
직접 사인을 해 준 브로슈어가 어디 갔는지 찾지 못해
이름도 알 수 없지만.. 수작업으로 이렇게 정교하게 제작한다니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이고 제작한 제품에는 특별히 유네스코
문양을 넣고 있었는데 그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하였다.
벽면에는 클린턴을 비롯하여 세계 유명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이 많이 걸려 있었다.











(여기 또 다른 장인..)











(중앙광장은 비둘기 광장으로도 불린다)

올드 타운 일대의 이름은 바슈카르지아(Bascarsija)
터키어로 중앙광장을 의미하며 사라예보의 명소중 한 곳.
중앙 광장은 구시가지의 상징으로 불리는 세빌리(Sebilji) 샘이 있다.
언뜻 보면 우리나라 목조탑처럼 보이는데 작은 돌담 뒤로 갈색의 기둥과
돔 형태의 지붕을 한 외관이 인상적이다. 이것은 1745년에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세빌리 샘의 아래쪽 돌기둥에서 물이 흘러 나온다.
당시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갈증을 풀어 주었다고 한다.
여행 중 생수도 늘 사야 하는데 물을 공짜로 공급하다니 이게 웬일!
마침 목이 말라 세빌리 샘물로 목을 축였는데 이 물을 마시면 이곳을
다시 오게 된다는 속설이 있다니 사라예보를 다시 찾을 일이 있으려나..
이 광장을 중심으로 구리 세공업자들의 거리 등이 이어지고
현재는 대부분 카페와 레스토랑, 환전소, 기념품점, 호스텔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슬람 정취가 물씬 난다.









(터키에 온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히잡으로 머리를 가린 여성들, 곳곳에서 보이는 카펫,
벽돌을 차곡차곡 쌓고 단아하게 기와를 올린 건물 등은 시간을
거슬러 오스만 제국으로 돌아간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히잡을 쓴 예쁜 아가씨와 사진도 찍고..











(모스타르로 이동)

히치하이크하려는 배낭여행객.. 남의 일 같아 보이지 않는다.





(모스타르(Mostar))

헤르체고비나 지역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도시 모스타르.
헤르체고비나 네레트바 주의 주도로 네레트바 강에 자리 잡고 있는
이 나라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인 모스타르에 도착했다. 모스타르는
네레트바 강 바로 위 다리를 지켰던 "다리 파수꾼들"을 뜻하는 mostari로
이름 지었다고 한다. 기독교도들과 이슬람교도들은 강을 사이에 두고
기독교의 성당과 회교 사원을 별도로 건축했다.
한 지역에 동서양 문화가 서로 공존하는 특수한 지역이 된 것이다.
그 후 1992년부터 1995년까지 지속된 내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곳은
종교는 다르지만 분쟁이란 단어가 없는 평화로운 지역이었다.
그런 특수한 지역에서 발칸 분쟁 사상 가장 비극적인
유혈극이 일어나자 세계의 이목이 쏠리게 되었다.











(스타리 모스르 다리(Old Bridge Mostar, Stari most))

다리 위에 올라서면 앞뒤로 펼쳐진 네레트바 강이 높은 산과
어우러져 경치를 한층 신비롭게 만든다. 디나락 알프스 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이 모여 네레트바 강을 따라 흐른다. 네레트바 강은 크로아티아를
거쳐 멀리 아드리아 해까지 흘러간다. 스타리 모스트 다리 난간에서 금방 강으로
뛰어내릴 듯 포즈를 취하면서 구경꾼들로부터 돈을 걷는다.
한 참을 지켜봤지만 뛰어 내리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보스니아 내전 중에 파괴된 스타리 모스트 다리)

터키의 통치기에 건설되었다는 스타리 모스트 다리를 둘러싼
전쟁이 더욱 안타깝게 여겨지는 까닭은 서로 총을 겨눈 사람들이
전쟁 직전까지 서로 잘 알고 지내던 이웃이었기 때문. 길이 30미터에 불과한
짧은 길이로 기독교와 이슬람교도로 나뉘었지만, 이들은 수백 년 전부터 줄곧
한동네 사람으로 인식하면서 서로 방해하지 않고 공조하면서 살아왔다.
그런데 갑자기 민족과 종교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이유로 상대방을 죽이기 위해
총탄을 퍼부은 것이다. 인간이 종교와 정책에 의해 얼마나 쉽게 표변할 수 있는지를
설명할 때 항상 스타리 모스트 다리 이야기가 거론되는 이유다.
내전은 종식되었지만 문화와 종교가 다른 민족 간 화해와 연결의 상징물이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랍풍 다리로 알려진 스타리 모스트가 파괴되었다는 사실은
세계인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특히 유네스코가 스타리 모스트 다리를 복원하자고
역설하자 세계 각국의 지원이 쇄도했고 복원 작업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잠수부들은 강물 속에 수장된 다리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모두 건져 올렸고
터키의 건축가들은 1,088개의 돌을 꼼꼼히 재배치하여 재건했다.
이제 이 다리가 두 민족 간의 화해의 상징이 되었다는데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기원해 본다.









(강 안쪽 가톨릭인들의 마을 모습)













(다리 건너 올드 타운의 모습)

작고 아담한 도시인데 곳곳에 전쟁의 아픈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숙연한 마음이 든다.
올드 타운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다다르자 매끈한 돌길이
올드 타운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이끈다. 상점에 진열된
물건들은 터키인 듯.. 터키풍 물건들이 가득하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인구중
48%는 이슬람을 믿는 보스니아인이고,
37%는 세르비아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인이고,
14%는 로마 가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인이라고 한다.







(모스타르 다리 위에서..)

모스타르는 네레트바 강을 사이에 두고
이슬람계와 가톨릭계가 사는 마을로 나뉜다.











(영화촬영 하는 중 인줄..)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
주위 시선도 아랑곳 하지 않는다.









(보스니아 내전(빌려온 사진))

강력한 카리스마로 유고 연방을 이끌던 티토가 사망하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유고 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한다.
그러나 유고 연방에 남기를 원했던 보스니아 내의 세르비아인들이 이를
인정하지 않고 유고 연방의 지원을 받고 1992년 4월 내전을 일으켰다.
내전으로 도시가 참혹하게 파괴되고 인종청소로 인해 주민의 강제이주와
대량학살이 일어나게 된다. 10만 명 이상의 이슬람계 보스니아인들이
사망하고 200만 명 이상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가톨릭 성당인데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이정표)

지나온 사라예보는 오른쪽 방향이고,
두브르브닉과 스플리트는 왼쪽방향을 가르키고 있다.
남색 빛 아드리아 해가 머지않은 것 같다.

이제 또 아드리아 해가 좀 더 가까운 성모 발현성지
메주고리예로 발길을 옮긴다.











(크리제바츠 산(Mt. Krizevac 520m) 중턱에 있는 기도소)

신부와 수녀가 기도하는 모습이 성스럽다.
십자가의 산이라고도 불리는 크리제바츠 산 정상에는
8.25m 높이의 십자가상이 있다고 한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거친 돌짝밭으로 십자가의 길이라는데 시간이 없어
중턱의 기도소까지만 갔다 돌아 내려왔다.











(성 야곱 성당(St. James Church))

성모 발현으로 전 세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성 야곱 성당.
1981년 6월 6명의 아이들이 마을 외곽의 크로니카라는 언덕 위에서
성모 마리아를 여러 번 보았다고 하여 관심을 끌게 되면서
가톨릭 신도들의 순례지가 되고 관광지가 되었다.







(치유의 예수 상)

무릎에서 성수가 흐르는 청동 예수 상.
청동상 오른쪽 무릎에서 불가사이하게 성수가 한 방울씩
맺혀 흘러내린다. 이 성수를 적셔 아픈 곳에 대면 낫는 기적이
일어난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청동상 앞에서 줄을 서
차례대로 손수건 같은 것으로 성수를 닦아 가져간다.
늘 청동상에서 물이 맺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노변의 과일 상)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시바 강이 흐르는 북동부와
네레트바 강이 만드는 남단 끝 지역만 비옥하고 나머지 지역은 대부분
산지로 되어 있다. 비옥한 메주고리예 지역은 과일 농사를 많이 하는지
길거리에서 과일을 파는 노점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트레비네로 이동하여 멋진 시간을)

메주고리예를 출발하여 석양이 질 무렵 오늘의 기착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최남단 스릅스카 공화국에 속한
트레비네에 도착하였다. 전쟁의 참혹함을 짐작할 수 있는 상흔이
곳곳에 남아있지만 생각했던 것 보다 밝은 모습이어서 안심이 된다.
지금 이 평화가 위장된 평화가 아닌 전정한 평화가 되었으면 좋겠다.
아담한 도시 트레비네는 아드리아 해로부터 약 20km 가량 떨어져 있는데
 아름다운 트레비슈니차강 (Trebi?njica River)이 이 도시를 통과해 흐른다.
산책을 나왔다가 호텔 맞은편 강변 Club Riva에서 양평에서 오신 선생님들과
내내 가슴을 짓누르던 무거운 생각들을 떨치고
멋진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