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비아, 유고슬라비아의 맹주로서의 영광은 가고..

2016. 10. 29. 01:08여행/여행기




세르비아, 유고슬라비아의 맹주로서의 영광은 가고..
(어떤 지도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국민은 울고 웃고..)




일반적으로 발칸반도 여행은 동유럽을 거쳐
북부의 아름다운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를 돌아보지만 
발칸반도를 제대로 보고 싶어서 루마니아로 들어와서 슬로베니아로 나가면서
발칸 7개국을 돌아보기로 했다. 현대사에서 세계의 화약고로 불리는 발칸반도.
옛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해체되면서 독립한 나라들.. 지금은 7개의 독립국으로
도생하고 있지만 언제 다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그 지역을 가 보고 싶었다.
세르비아.. 유고 연방의 정통성을 이어가는 나라라고 하지만
초라한 모습은 애잔한 마음이 들게 한다.

지정학적으로 흑해와 에게 해, 아드리아 해로 둘러 싸여있는
발칸반도는 북으로는 부동항 확보를 위해서 러시아가 남진정책을 추진해 왔고,
남쪽에서는 터키, 서쪽에서는 합스부르크왕국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지속적으로
압박해 온 지역.
동로마 제국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200여 년(1194~1386) 받다가 다시 오스만 터키(1395~1908)
지배를 500여 년 간이나 받다가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독립하기 시작했다.
발칸반도가 세계의 화약고로 불리는 것은 1차 세계대전이 발칸반도에서 일어난 한 발의 총성에서
 시작되었고, 2차 대전 이후 티토가 강력한 카리스마로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통치하다가
1980년 그가 죽자 연방이 해체되면서 각 공화국의 분리 독립과 이를 저지하려는 세르비아계
유고 연방간의 전쟁을 시작으로 민족갈등(슬라브 족, 세르비아 족, 이슬람 족,게르만족)과
종교 갈등(카톨릭, 이슬람교, 동방정교회), 복잡하게 그어진 국경선과 EU와 러시아 등
정치적 이해관계까지 복잡하게 얽히고 설켜 있어 언제든지
전쟁이 다시 발발할 소지가 다분한 지역이다.









(불가리아-세르비아 국경통과)

오늘은 소피아에서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로 이동하는 데
400km나 되는 이동거리도 거리지만 어젯밤 프랑스 남부 해안도시 니스에서
발생한 테러로 84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했다는 뉴스까지 겹쳐 갈 길이 멀어 보인다.
2014년 이집트 타바에서 일어난 버스폭탄테러로 이스라엘에서 요르단으로 넘어가려다
국경이 삼엄해지고 검문검색이 심해지면서 한동안 국경에서 머물렀던 생각이 스친다.
소피아에서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교회를 둘러보고 베오그라드를 출발했다.
소피아를 출발한지 1시간 남짓 달려 도착한 국경에는 트럭과 버스, 승용차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어찌 하겠나 이것도 여행의 일부인데.. 13:40에 도착하여
16:25에 국경을 통과했으니 무려 3시간이나 국경에 묶여 있었던 셈이다.
국경을 통과해도 갈 길은 멀다. 아직도 330km나 달려야 한다.





(베오그라드까지 152km가 남았다고 알리는 이정표)

지금 시간 오후 6시 40분, 1시 반에 소피아를 출발하였는데
아직도 베오그라드까지는 2시간 가까이 달려야 한다.







(도나우 강의 지류 벨리카모라바 강)

Nature Park Sicevacka Klisura 자연보호구역에 속하는
Sicevo 캐년 협곡은 스브를리그(Svrljig) 산맥과 수바 플라니나
(Suva Planina) 산의 남쪽 경사면 사이에 Kunovica 고원을 만들었다.
Sicevo 협곡은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자연적인 통로.





(짙은 구름 아래 붉게 타는 노을)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 즈음,
베오그라드 외곽에 위치한 숙소에 도착했다.
소피아를 출발한지 7시간.. 오늘은 이동하는데
거의 하루를 보낸 셈이다.







(하루 밤 유한 숙소)





(세르비아(Serbia))

세르비아 공화국, 약칭 세르비아는
유럽 중앙의 발칸 반도 중앙 판노니아 평원에 자리 잡고 있는 내륙국.
수도 베오그라드는 오랜 역사를 지녔으며, 남유럽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다.
세르비아인들은 발칸 반도에 정착한 후 세르비아 왕국을 건설했으며,
이 나라는 세르비아 제국으로 발전하여 14세기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16세기 세르비아 땅은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하였으며, 합스부르크의 침략을 받기도 했다.
19세기 초에 세르비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발칸 반도 최초로 입헌 군주 체제를 세웠으며,
뒤이어 영토를 늘리고 이 지역에서 봉건주의와 농노제를 폐지하는데 앞장섰다.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1918년에 보이보디나 주가 세르비아에 귀속되었다.

세르비아는 몬테네그로, 크로아티아 및 슬로베니아를 비롯해
여타 남 슬라브 민족들과 함께 유고슬라비아로 통합하여 존속하다가
1991년 유고 연방 해체된 이후 몬테네그로와 함께 세르비아-몬테네그로 연방
(신유고슬로비아 연방)을 구성하였으나 2006년 6월 5일 두 나라도 분리되었다.
2008년 2월 알바니아인이 다수를 이루는 남부 지역의 코소보가 독립을 선언했다.
세르비아는 코소보를 독립국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많은 나라들은 코소보를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있다.

공용어는 세르비아 어. 키릴 문자와 로마자 모두 사용되나,
키릴 문자의 사용이 보다 보편적이다. 공산주의 붕괴에 따라 1992년
계획경제에서 혼합경제로 전환하여 자본주의적 경제 발전을 시작했으나,
유고슬라비아 전쟁과 그로 인한 UN의 경제제재로 어려움을 겪었다.
광공업이 발달했지만, 헝가리나 폴란드에 비해 경제 발전이 뒤져 있다.
유럽 연합 가입을 신청한 상태이며, 국제적으로 중립국이다.
국토의 면적은 8.8만km², 인구는 약 800만 명,
인당 GDP는 $10,985이며, 통화는 디나르 (CSD).









(베오그라드(Beograd / Belgrade) 시내에 들어섰다)

옛 동로마시대에 흰 성벽을 쌓았다고 해서
흰 성벽, 흰 성채라는 뜻의 베오그라드라는 지명이 무색하게
전쟁을 거치면서 어두운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시내에 들어서니
날씨마저 추적추적 비를 뿌리고 있다.

세르비아의 수도, 인구 약 116만 명, 면적 360km²,
해발 약 125m의 도나우 강과 사바 강의 합류점에 위치하며,
베오그라드의 역사적 중심지역은 현재 칼레메그단이라 불리는 지역으로
동쪽의 강기슭. 19세기 부터 베오그라드는 남쪽과 동쪽으로 확장을 해왔다.
기원전 3세기부터 켈트족이 건설한 유서 깊은 이 도시는
서방 세계와 동방 사이의 교차점 역할을 해왔다.





(CTeBaH CTOjaHoBHn MoKpaHau)

공원에 흉상도 있는데.. 누군지?







(프랑스에 헌정하는 감사 기념비)

"A LA FRANCE" 세르비아의 전쟁 고아을 보살펴 주는
프랑스 여인을 나타낸 부조가 앞뒷면에 새겨져 있다.





(칼레메그단(kalemegdan))

세르비아의 오랜 역사적 자취가 남겨진 곳으로,
요새는 3세기 켈트족이 정착한 그 이후로 몇 세기에 걸쳐 축조되었으나
그 역사는 비잔틴 제국이 지배했던 1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비잔틴 제국이
이곳을 점령했을 당시 고트족과 훈족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535년
요새를 건설했다. 그 후 오스만트루크 제국의 정복과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요새는 여전히 2천여 년의 역사를 함께한베오그라드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처음 지어졌을 당시인 1세기 요새의 흔적, 실제 전쟁에서 사용한 각종 무기와 탱크가
전시된 무기 박물관, 유명 인사들의 흉상,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의 참전에
감사하기 위한 기념비를 비롯한 각종 조각상을 볼 수 있다.

칼레메그단(kalemegdan)은 터키어로
요새(kALE)와 전쟁터(Megdan)의 합성어







(요새의 출입문 위에 '클랙 타워'라는 감시 망루가 있다)

처음 칼레메그단 요새를 건설한 사람들은 켈트족으로
외부의 침략을 막기 위해 3세기경 건설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후 이민족의
침입으로 이 지역의 주인이 자주 바뀌면서 무려 40여 차례나 증축되었다고 한다.
동로마제국 때에 지어진 칼레메그단 요새는, 로마시대의 흔적과 비잔틴, 오스만트루크,
오스트리아 등의 침략의 역사와 나토의 폭격에도 여전히 유지되는, 베오그라드의
자랑스러운 상징으로 남아있는 곳, 도심 강변으로 군사용 성채와 성벽,
세르비아 왕국의 화려했던 흔적들을 보여준다. 무기박물관, 동물원,
빅토르 동상, 모스크, 예술가들의 흉상 등이 설치되어 있어 지금은
넓고 푸른 공간이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고 한다.







(칼레메그단 요새에 전시되어 있는 무기들)

이 무기들은 1,2차 세계 대전 때 실제로 전쟁에
사용되었던 것들이라고 한다.





(두물머리)

칼레메그단 요새는 해발 125.5m 지점에 있어 사바 강과
다뉴브 강이 만나는 풍경을 볼 수 있는 베오그라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망대로 손꼽힌다. 왼쪽이 사바(Sava) 강이고 오른쪽이 도나우(Donube) 강.
두 강이 만나는 지점 언덕 위에 천혜의 요새 칼메메그단 요새가 있다.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파괴된 칼레메그단 요새를 복구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강 건너 멀리 세르비아
제2의 도시 노비사드가 보인다.







(거리의 노점상들)





(칼레메그단 공원의 울창한 숲)







(유명한 '?'카페)

사르보나 정교회 맞은편에 있는 '?'카페.
1923년에 문을 연 '?'카페는 처음에는 이름을
'사보르나 교회 앞 카페'라고 불렀으나 교회 측에서 항의하여
이름을 변경하려 했으나 마땅한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로 하였는데.. 그게 유명하게 되었다고..









(구시가지 건물들)

도로 양측으로 늘어서 있는 고풍스런 건물들
베오그라드의 옛 명성을 말해 주는 것 같다.







(사보르나 정교회(Saborna Crkva))

사보르나 정교회는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치가
1837년에 착공하여 1845년에 완공한 고전주의 양식과 후기 바로크 양식이 혼재되어
정교회와 카톨릭의 건축 양식이 혼재된 모습인데 세르비아 정교회의 느낌보다는
가톨릭 성당의 느낌이 강하다. 내부에 세르비아의 유명한 조각가
Dimitrije Petrovic와 화가 Dimitrije Avramovic의 19세기 작품이 있다는데
시간이 없어 들어가 보지 못해 아쉽다.

아래 빌려온 사진 : 사바강 건너편에서 본
사보르나 정교회 모습













(크네자 미하일로(Kneza Mihaila) 거리)

베오그라드의 명동, 가장 번화한 거리로
공화국 광장에서 칼레메그단 요새까지 이어지는 보행자 거리로
1867년 거리가 들어서면서 베오그라드의 중심이 되었다고 한다.
베오그라드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답게 깨끗하고 세련되게 꾸며져 있으며
거리 곳곳에는 작은 분수, 화단이 있어 생기를 더해 준다.
거리를 따라 양쪽으로 유명 브랜드 상점, 갤러리,
카페, 레스토랑이 들어서 있다.







(30)





(에티오피아에서 왔다는 일가족과)

행복한 모습을 보고 사진을 찍어줄까 했더니
반색하면서 나 보고도 같이 찍자고 한다.







(베오그라드 뒷골목에서..)







(자수 제품을 파는 노점상)









(개점을 준비하는 레스토랑의 꾸밈새가 예쁘다)





(블록으로 깔린 보도)











(길거리 사람들의 모습)

서로를 찍다 같이 씨-익 웃기도 하고~







(공화국 광장은 만남의 광장)

베오그라드의 중심이 되는 광장으로, 광장의
중심에는 세르비아를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해방시킨
세르비아의 영웅 미하일 오브레노비치 왕의 기마상이 있고.
주변에는 국립박물관(붉은 건물)과 광장 맞은편에 국립극장이 있다.
국립 박물관은 1844년에 세르비아 작가 Jovan Sterija Popovic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세르비아에서 가장 유서 깊고 중요한 박물관이다. 박물관의 오른쪽에 있는
국립극장은 Aleksandar Bugarski에 의해 1869년에 건축되었는데
지금까지 오페라, 발레, 콘서트, 연극 등
다양한 공연이 열린다고 한다.













(대중교통 수단들..)

베오그라드의 대중교통은 버스, 노면전차,
트롤리버스 택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베오그라드 스카다리야 거리)

19세기 중반부터 이곳에
술집과 음식점이 들어서면서 보헤미안들의 주 무대가 되었고
이후 예술인들의 거리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한다.
크네즈 미하일로 거리가 젊음의 거리라면
이 곳 스카다리야 거리는 낭만의 거리..









(코소보 사태 때 파괴된 건물들)

1999년 코소보 사태 때 나토(NATO)군의 공습으로 파괴된
당시 건물들을 방치하고 있다. 이런 모습도 관광 상품으로 이용하는가?
어쨌거나 전쟁은 최악의 선택. 세르비아가 동정을 받기에는 전쟁의 책임이 크다.
보스니아 내전의 주범국가, 코소보 사태 때 알바니아계 반군을 학살하고
인종청소 등을 자행하는 등 잔인한 모습을 보이는 바람에 미국과 EU의
NATO군을 불러들인 것 아닌가!

이 때 건물 외관은 크게 파괴시키지 않고 내부를
  완전 파괴해 버린다는 스마트 탄이 사용되었다나..




여기서 잠깐 역사속으로 사라진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살펴보면..



(유고슬라비아는..)

유고슬라비아는 20세기 대부분에 걸쳐
유럽의 남동부 발칸 반도에 연이어 존재했던 세 개의 나라를 말한다.
유고슬라비아는 "남(南) 슬라브인들의 땅"이란 뜻이다.

1929년 성립된 군주국 유고슬라비아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친독정권의 축출과정에서 독일군의 침입을 받았다.
안테 파벨리치가 유고 연방을 해체하고 가톨릭 독립국가인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선포한다.
파벨리치가 이끄는 우스타샤는 이 과정에서 60만 명 이상의 유태인과 정교회 사람들을
학살했다. 1943년 이후 티토가 이끄는 공산주의 파르티잔이 대독항전을 전개,
1945년 소련의 지원 아래 국토를 해방시키고 군주제를 폐지, 연방을 수립하는 한편
1946년 공산주의 신헌법을 제정했다. 국가원수에 취임한 티토는 1948년 민족주의를 주장,
소련의 지도권을 부인하다가 코민포름에서 제명된 후 "독자적이고 민족주의적인 공산주의"를
지향하였다. 비동맹 중립주의, 미·소의 권력정치 배격으로 대표되는 티토주의는 동구권에서
서방측과 관계개선을 도모한 이단자로 규정되었으나, 제3세계 비동맹운동의 지도자로서의
위상을 점하였으며 기업 자주영리·이윤제 등 시장경제 구조를 도입, 독자적인 공산주의
경제체제를 추진함으로써 1970년대에는 경제적 발전을 달성하기도 하였다.
1971∼73년 브레즈네프·코시긴 등 소련수뇌와 티토의 상호교환 방문과
1977년 소련의 불간섭원칙의 확인으로 양국관계가 호전되었으며
1970년대 대서방 접근은 더욱 구체화되었다.
1980년 5월 티토의 사망 이후 유고슬라비아는
연방간부회의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하였다. 연방의회는
연방원과 공화국·자치주원의 양원제이었다.

유고슬라비아는 각 공화국들의 독립으로 인해 1991년 해체되었으며,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가 다시 새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만들었다.
이후 연방은 2003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로 국호를 바꾸었으며,
2006년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완전히 해체되게 된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해체, 각 공화국의 독립)

내전은 1991년 6월 27일 유고슬라비아 연방군이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막기 위해 슬로베니아를
침공함으로써 시작되어, 슬로베니아 → 크로아티아 → 보스니아 →
코소보 등지로 싸움터를 옮겨가면서 벌어졌다. 그 사이 주요 민족의
분포에 따라 6개 공화국, 2개 자치주로 이루어졌던 유고슬라비아 연방국은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신유고 연방·
마케도니아로 분리 독립되어, 민족 간 대립을 격화시켰다.

〈슬로베니아 내전〉인구의 90% 이상이 슬로베니아인으로
구성된 슬로베니아를 지배할 명분이 없는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10일간의 전투 끝에 이들의 독립을 사실상 묵인하고 철수하였다.

〈크로아티아 내전〉 크로아티아에서 무력 충돌이 일어나자
1992년 4월 14,000명의 유엔 평화유지군이 파견되어 완충 역할을 하였으나
유혈 충돌이 계속되었다. 세르비아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크로아티아인의
극단적 민족단체인 우스타샤가 세르비아인 50여 만 명을 학살하였기 때문에
크로아티아가 독립할 경우 이 지역에 소수민족으로 남을 세르비아계 주민이
다시 학대를 받을까 우려하여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막은 것이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내전〉 인구 450만 명의 보스니아는
이슬람계 43%, 세르비아계 32%, 크로아티아계 17% 등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중 이슬람계와 크로아티아계가 독립을 강행하자 세르비아계는
민족별 분리를 주장하여 무장 반란을 일으켰다. 이 지역의 내전은
다른 민족에 대한 '인종청소'의 양상을 띠어 방화·살상·강간이
자행되어 1995년까지 25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코소보 내전〉 세르비아 공화국의 코소보주(州) 주민의 90%를 차지하는
알바니아계 주민은 세르비아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여 코소보 해방군을
조직하였고, 세르비아 보안군은 이들을 색출한다는 구실로 알바니아인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이 지역에서의 '인종청소'를 경고하여 온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는 유고슬라비아가 이를 묵살하자 1999년 3월 24일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공습을 단행하여 계속 압력을 가하였다. 이 지역에서의 인명 피해는 아직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며 알바니아계 난민은 40∼50만에 이르러
인근 마케도니아 등지로 피난하였다.

코소보 지역을 제외한 유고슬라비아 내전은
1995년 12월 파리에서 세르비아·크로아티아·보스니아의
세 대통령이 평화협정에 조인함으로써 표면상 종식되었으나
크고 작은 30여 민족과 여러 종교가 혼재한 이 지역은
여전히 그 분쟁의 씨를 안고 있다.





(발칸의 도살자 밀로셰비치(Slobodan Milosevic))

유고의 정치가·신유고연방의 대통령.
1989년 세르비아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여러 민족이 혼재한
유고연방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촉발시켜 내전을 주도하였다.
'발칸의 도살자'라 불리며 인종청소를 벌였다.

2000년 민중봉기로 실각하였다.

세르비아 포자레바크(Pozarevac)에서 태어나 아버지는 1962년에,
어머니는 1973년에 각각 자살을 한 비극적인 가정환경에서 성장하였다.
1964년 베오그라드대학교를 졸업한 후 지방에 있는 공산당 산하기관인 경제연구소에서
여러 직책을 맡아 일하였다. 1984년 절친한 이반 스탐볼리치(Ivan Stambolic)가
세르비아 공산당의 새 지도자가 되자, 공산당 베오그라드지구당의 위원장을 맡았다.
1987년 9월에는 스탐볼리치의 뒤를 이어 공산당 당수가 되었으며, 1988년 중반
코소보 내 세르비아계 주민의 불만을 대표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가가 되었다.
세르비아계 주민의 지도자로서 그의 최종 목표는 코소보를 세르비아에 합병시키는 것으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많은 집회와 데모를 벌였고, 언론을 이용하여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세르비아계 주민에 대하여 범죄행위를 저지르고 있다는 허위사실을 유포하기도 하였다.
1989년 5월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대(大)세르비아주의를 제창,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촉발하였다.
이는 결과적으로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등지에 거주하는 세르비아계 주민들에게
헛된 민족주의를 고취, 세르비아에 의한 유고연방 통치라는 허욕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이러한 왜곡된 민족주의 정책은 다양한 민족이 혼재하는 유고에 필연적으로 내전이라는
유혈사태를 불러왔다. 크로아티아 내전(1991~1995)에서는 20만 명이 사망하였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내전(1992~1995)에서는 10만 명이 사망하였다.
또 1998년 야기한 코소보 사태에서는 1만 명을 사망하게 하였고,
이른바
'인종청소'를 벌인 결과 알바니아계 코소보 주민 85만 명이 고향에서 쫓겨나
난민이 되었다.이 같은 행위로 '발칸의 도살자'로 불렸고,

1999년 구유고슬라비아국제형사재판소에서 전쟁범죄와 학살죄,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기소되었고, 2001년 체포되었다.
전범으로 재판을 받던 중 2006년 3월 감옥에서 사망했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
지도자 같지 않은 지도자는 국민을 불행하게 만든다.
국민들은 지도자를 잘 뽑아야 한다.











(세르비아의 시골 풍경)

도심은 수많은 전쟁의 상흔이 아직도 아물지 않았지만 시골풍경은 평화롭다.
드리나 강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의 국경을 형성하는 사바강(Sava River)의 지류.
몬테네그로에서 발원하여 대체적으로 북류하여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세르비아의 국경을 따라
206km 길이로 세르비아 북서부에 있는 크르나바라(Crna Bara) 마을과 인접한 사바 강으로 흘러든다.
사바 강은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에서 다뉴브 강에 합류한다. 드리나 강의 길이는 약 346km.

유고슬라비아의 작가 이보 안드리치는 자신의 저서 <드리나 강의 다리>에서 고향인
비셰그라드 시에 문학적인 기념비를 세웠다. 이것으로 그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강을 건너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이다.





(오늘은 국경을 쉽게 통과했다)

세르비아로 들어 올 때 국경에서 긴 시간을 기다렸던 탓에
출국은 또 어떨까 했는데 국경을 통과하는 차량도 많지 않았고,
검문도 여권 확인만 하고 바로 통과시켜 주었다.

*      *      *

세르비아에서 전쟁의 야만성을 실감했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살아 온 발칸반도 사람들도 개인적으로는
모두가 순박하기만 한데 민족 간의 갈등과 종교적인 이념 등으로 아직도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고 반목하면서 살아 가고 있다니 다른 것이 불행이 아닌 것 같다.
전쟁만큼 참혹한 것은 없는데 정치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지방색을 이용하고 민족감정을 부추기고 심지어 전쟁까지 이용한다.
자신들의 말로도 결코 좋지 않은데 말이다.


보스니아는 또 어떨까? 하다가도 우리나라를 돌아 보니
일촉즉발, 벼랑끝으로 몰고 가는 이 땅의 상황도 위험하기 짝이 없다.

발칸반도 못지않은 한반도의 현실이 마음을 착잡하게 한다.
정말로 우리도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