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내민 손 따뜻하게 잡아주는 연인 같은 산

2017. 2. 1. 17:31山情無限/지리산





지리산, 내민 손 따뜻하게 잡아주는 연인 같은 산

(겨울 우중산행도 나름 멋있었다)


2017. 1. 29~30

거림-세석대피소-장터목대피소-천왕봉-중산리





이게 아닌데 / 이게 아닌데 / 사는 게 이게 아닌데
이러는 동안 / 어느새 봄이 와서 / 꽃은 피어나고
이게 아닌데 / 이게 아닌데 그러는 동안 / 봄이 가며 꽃이 집니다
그러면서 / 그러면서 / 사람들은 살았다지요
그랬다지요

그랬다지요 / 김용택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설날 시골 갈 때는 배낭을 챙겨가서

지리산에 들렸다 오는 것이 연례행사였는데 근래에는 그러지 못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그래서 일단 대피소 예약부터 하고,

지리산에 들 준비를 해 가지고 시골에 갔다.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지리산에 비 온다는

예보는 없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큰맘 먹고 가려는데 겨울비라니.. 여기서

그만 둘 수는 없지. 우중산행 한 두번 해 본건가! 게으른 일꾼 설날 지게지고

나선다더니 다급한 마음에 설날 오후에 읍내 시장을 뒤져

일회용 우비 2개와 고무장갑을 구입 우중산행준비를 하여

지리산으로 향했다. 소원했던 님 만나러 가는 심정으로..




얼마만인가? 덕산면사무소 주차장에 주차시켰다.

일단은 거림으로 올라 중산리로 내려올 계획이지만 맘 내키면 유평리로 올 수도 있으니까..

덕산까지 왔으니까 좀 일찍 내려와 남명 조식선생의 유적지 덕천서원은 들려야겠지.

생각은 훨훨 날듯 마냥 자유로운데 몸이 제대로 따라 주려나..





덕산에서 버스로 거림으로 와서 거림탐방안내소를 통과한 시각은 10시 35분

거림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비가 주룩주룩 내렸는데 지금은 소강상태, 다행이다.

비가 오더라도 신발에 물이 안 들어 갈 정도만 왔으면 좋겠다.






미산 선생님 아니신가?

정말 한 번 만나 뵙고 싶었는데 지리 자락에서 이렇게 조우하다니..

역시 만날 사람은 이렇게 만나게 되나 보다. 왠지 기분이 좋더라니까.

셀카로 단체(?) 사진을 한 장 찍으려 했으나 셀카를 사용해 본 적도 없는데다

폰이 비에 젖어 그런지 제대로 조작을 못해 따로 한 장씩..

선생님 내내 건강하시고, 지리사랑 이어가시길..







질척이는 길을 얼마쯤 걸었을까 언뜻언뜻 눈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눈길로 변했다. 눈길이라지만 비와 영상의 기온과 비로 범벅이 되어

질척이기는 더하지만 그래도 눈길이어서 기분은 낫다. 겨울 산은

눈을 맞으며 걸어야 제 맛이지만 겨울비도 그런대로 맞을만하다.

봄비를 맞으며 남부능선 걷던 것이 새삼 생각난다.





(거림, 세석대피소, 의신 갈림길)


그동안 지리산도 따뜻했나 보다. 예년 같으면 이 주위가 거의 빙판이 되어 있을텐데..





임시 샘터에 들러 우선 생수 한 바가지 들이키고.. 물맛 한 번 좋다!





세석대피소 가는 길.. 여기는 제법 눈이 두텁게 쌓여 있다.






세석대피소 턱밑인데도 구름속이라 오리무중..

대피소가 안 보였는데 순간 구름이 엷어지면서 마술같이

 대피소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사진은 사실을 왜곡하기도 한다. 특히, 폰카는.. 지금 이런 풍경이 아닌데..







대피소 주변 초저녁 풍경..

저 꼬마 친구도 여기까지 걸어서 왔다는 것 아닌가!

주능선 종주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대피소 유감] 그날 밤 세석대피소에서는 조그만 소동도 있었다.

자리에 갖다 놓은 담요 2장을 누가 훔쳐(?)간 것이다. 등산화는 개인보관함에 넣고 

키로 잠글 수 있게 하여 분실의 여지를 없앴으나 엄연히 거금을 지불하고 타다 놓은 담요를

가져 갈 줄이야. 대피소에 인성검사를 하고 들일 수는 없는 일.. 양심불량을 어떻게 해야  할까?

소등을 한 지 1시간도 더 지났는데 늦게 온 사람들이 2층으로 올라오느라 나무침상이 많이

삐걱거리고 짐 정리하는 소리가 소란스럽다. 아래층에서 잠들지 못한 사람들은 불편하겠다 싶다.

이번에는 또 소등을 한지 2시간이 지난 10시경 부자간인듯한 2명이 배낭을 메고 2층으로 올라와

취사장에 간 사람들 자리에 전을 벌이다 말고 안되겠다 싶었는지 빈자리를 찾으려

두리번 거리더니 내 옆자리로 와서 배낭을 푼다. 정확하게 30분 동안이나 바스락거렸다.

대피소에서 인성검사도 해야겠고, 배낭꾸리는 법도 확인하고 받아야 할지..

나중에 오는 사람을 1층에 배정하면 소란은 좀 덜할 듯하지만

  이렇게 무단으로 숙박하는 사람은 또 다른 방법을 찾아야할 듯..


잠이 확 달아났다. 자려고 해도 잠이 안 온다. 대피소에서 잠 제일 잘 자는 방법은

먼저 잠드는 것인데.. 자정 쯤 별이 나왔으면 별이나 찍자며 카메라를 챙겨 나왔는데

아직까지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별은 고사하고 내일 아침 일출도 보기 어려울 것 같다.

내일은 비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촛대봉 일출을 보려고 일찍 일어났는데 구름이 짙어 일출을 포기하고,

여유부리다 장터목으로 출발하려는데 동쪽하늘의 구름이 엷어지면서 붉은 불길이

비치는 것 아닌가! 이대로 구름이 걷힌다면 어떡하지.. 지금 시간이 7시 10분인데..

일출 전까 촛대봉에 오르지는 못할 것 같고.. 그러나 그런 안달도 이내 구름이 잠재워 줬다.

그 참, 해가 나오지 못하게 구름이 덮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다니..





(촛대봉 이정표)


자정에도 제법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새벽에 눈이 내린 것 같다.

능선에 오르니 세찬 바람이 얼굴을 할퀴는 것 같고, 어떤 바람은 씨름하자는 듯

몸을 이리저리 흔들어 댄다. 그래도 비가 아닌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능선 오른쪽은 바람이 머리 위로 날아가고 아래쪽은 잔다. 호젓한 길이다.





어디가 바위고, 눈이고, 나무인지.. 모두가 하나인 듯..

가까이서 봐도 모두가 산이다.





눈꽃..

그 처절한 분투.. 눈꽃은 죽은 나무에도 피우지만

그 꽃은 바람에 맞서 피우는 눈물보다 뜨거운 꽃





만약 겨울 산에 산죽이 없다면..

모든 나무들이 북풍한설에 맞서겠다고 옷을 다 벗고 맨몸으로

맞설 때 산죽 아니면 산이 살아있다는 것을 어떻게 보여줄까.

산죽이 겨울 산을 덮는 이불이라면 산죽을 덮는 이불은 눈이다.





가지는 바람에 순응한듯 뒤로 젖혀 자라지만,

눈꽃은 북풍한설에 장엄하고 비장하게 맞서서 쟁취한 자유!






여기가 포인트인데..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바람이 몰아치지만

연하봉으로 오르는 길이 보이도록 구름이 걷히기를 기다렸다.

5분을 기다려도 구름이 걷히지 않아 갈까 했는데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래 사람들이 저기를 지나갈 때 찍으면 그림이 되겠다 싶어 다시 기다리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유부리며

사진 찍고 유유자적이라 10분을 더 기다려 저 길을 통과할 때 찍긴 찍었는데..

사진은 별무소득.. 발이 시리고 손가락이 아리고..

 눈물까지 난다. 조금만 빨리 가주시지..






무슨 천지가 개벽을 하나?





평소에 꽃을 피우는 나무도 겨울에는 눈꽃을 피워야 한다.

평소에 꽃을 피우지 못하는 나무도 겨울에는 눈꽃을 피워야 한다.





오롯한 길이다. 무얼 더 바라겠는가!

더 바란다면 그것은 욕심..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보여주지 않으려는데 억지로 보려고 하면 그건 죄짓는 것이다.






(장터목 대피소)


현재 기온 -12.6도, 풍속 4.4m, 그럼 체감온도는 약 -16도,

지리산에서 이 정도는 그렇게 추운 날씨는 아닌데 마음이 추워서 그런가?

장터목대피소에서 시간을 보내면 유평리로 가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취사장에 들려 아침을 해결하기로..







제석봉의 모습, 큰 고사목들은 거의 사그라들었다.

제석봉은 비탈길도 힘든데 북서풍을 맞으며 걸으려니 이건 2중고..

몸을 가누기가 힘들다.







눈은 평등하다. 대지를 이유 없이 다 포용한다.

그리고 꽃 피우지 못하는 나무에게도 꽃을 피울 기회를 준다.

눈꽃은 평등의 꽃, 자유의 꽃, 순수의 꽃






(이번엔.. 산적님 가족들을 만났다)


엊저녁 취사장 갔다 오는 길에 잠깐 인사는 나눴지만

그 후 만나지 못하고 출발하는 바람에 못 만나나 했는데.. 먼저 천왕봉 가는

길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지리산에서 제일 부러운 모습은 부자가 함께 

주능선 종주하는 모습, 이제 보니 온 가족이 함께하는 산행도 멋있다.










천왕봉이 가까워지자 바람이 빠르게 구름을 몰고 가면서 

언뜻언뜻 하늘을 보여준다. 야호!






오늘은 이 길을 전세 낸 듯 하다. 걷고 이 시간만이지만..





한 때 한 시절 남부럽지 않게 보란 듯이 정열을 태웠을 테지

세월은 가고 추억은 남는 것.. 아직도 버리지 못한 미련은 가지에 매달려 있지만..

애잔해 보이는 마른 잎, 버거운 눈꽃 사라질 때 떨어지지나 않을지..






카메라를 들고 구름이 걷히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광풍이 몰아쳐

몸의 중심을 빼앗는다. 하마터면 날개도 없는데 날아갈 뻔 했다.









이래서 겨울 산을 찾는 것 아니겠는가!

사람은 산을 실망시키나, 산은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는다.





산은 오르막길보다 내리막길이 더 조심스럽다.

특히 겨울 산은.. 인생도 산 같이 오르막길보다 내리막길이 더 힘들다.

특히 높이 올랐던 사람은 더욱 그럴 것이다.

오르막길이야 중력을 이길 힘만 있으면 되지만

내리막길은 조심할 것이 많다.






산길이 그렇듯 인생도 올라가면 내려가야 하는 것. 어쩌면 산과 인생이 그리 흡사한지..





천왕봉에는 산객들이 몇 사람 보인다.

이렇게 인적이 드문 것은 흔치않은데..






아! 이 기분,

여기서 서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동

힘들게 오른 만큼 애쓴 만큼 희열은 배가 되는 것.

물질이, 계산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실감한다.

속세(?)에서의 이해관계를 초월한다.

하늘과 가까워서일까!






일망무제!

유장한 주능선을 비롯하여 어깨 걸고 일어선 산릉이 아름답다.

골짜기와 산봉우리와 줄기들이 이루는 풍광이 한 폭의 그림 같다







지리산에 들면 옛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기를 떠올리며

상상해 본다. 그때는 변변한 등산복도 등산화도 없었는데 선비들이 갓 쓰고 오르느라

얼마나 고생했을까? 두류산에 올라 "가슴이 탁 트이고 시야가 넓어지다"라고 한

점필재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이런 글이 있다.


신사[1472년(성종 3년) 8월 17일] 새벽녘에 해가 동녘에서 솟아오르려 하자

노을이 영롱하게 빛났다. 일행 모두 내가 매우 지쳐서 다시는 천왕봉에 오르지 못하리라 여겼다.

그러나 나는 '여러 날 동안 날씨가 계속 흐리다 갑자기 맑게 개니 하늘이 나에게 베풀어 주는 것이

많구나. 지금 천왕봉이 지척에 있는데 힘써 오르지 않는다면 평생 답답한 마음을 끝내 말끔히

씻어버릴 수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새벽밥을 재촉해 먹고 아랫도리를

걷어붙이고서 지름길로 석문(石門)을 통하여 위로 올라갔다.

발에 밟히는 초목마다 모두 서리가 내려 있었다.

출처 :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 / 최석기 외 / 돌베개 중






이 길로 갈까 저 길로 갈까!

마음 같아서는 치밭목에 들렀다가 유평리로 가고 싶지만

지금 시간 11시 30분. 오랜만에 지리에 들어 무리하면 안 되겠다 싶어

중산리로 방향을 잡았다.





햐! 생각지도 않았는데 이런 모습까지..






지리산이 낯설다. 이런 계단이 있었나? 언제 생겼지?

그러고 보니 이 계단으로 한 번 내려간 것이 어렴풋하게 생각난다.

지금은 눈길어서 그렇기도 하고, 이 길로 잘 가지 않으니까.

어쨌든 지리산이 낯선 것은 그만큼 소원했다는 것






멋있다. 아름답다는 말밖엔..

곧 사라질 것이기에 더 아름답다.





샘터는 물이 말랐다.






중산리 방향에서 올라오는 산객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정상에서 1시간 만에 내려오긴 했는데 오른쪽 무릎에 신호가 와서

신경이 쓰인다. 로타리대피소에서 잠시 채비를 다시 하고 발길을 옮기며

무리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열심히 걸어 보려고 한다.

(중산리에서 나가는 버스가 시간마다 있는 줄도 모르고..)





장터목대피소, 천왕봉 갈림길

휴~ 이제 다 내려왔다. 무사히 잘 내려왔다.

천왕봉 길이 이렇게 가파른 줄 예전엔 미처 몰랐는데..

아마 무릎에 통증이 오고, 마음이 바빠서 더 그렇게 느껴진 것 같다.

천왕봉 길은 가파르고, 장터목대피소 길은 상대적으로 편하고

거리는 거의 비슷하다.(천왕봉 4.0km, 장터목 4.1km)





칼바위를 지나.. 칼바위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지리산도 오랜만이고, 이 길은 더 오랜만인 것 같다.

통천길문도 첨 보는 것.. 이전엔 이런 것 없었는데..ㅎ





우천 허만수 기념비에 잠시 묵례하고 주차장으로..


70년대 지리산을 찾는 많은 등산객들이 만날 수 있었던

지리산에서 30년을 야생한 산사람, 지리산의 산증인 우천은 “내가 안 보이면,

이곳에서 죽은 줄 알아라. 흔적 없이 지리산 품에 묻히고 싶으니 찾지 말라.”

우천이 지인인 모 산악인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라고 한다. 이 말을 끝으로 1976년 6월경

그렇게 좋아하던 세석의 철쭉을 뒤로 한 채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지리산

산신령이 되었을까 아직도 우천의 흔적은 찾을 수 없고 이곳에 추모비만 서 있다.






중산리에서 출발하는 버스가 이렇게 많은 것을..

천천히 내려와도 되는 건데.. 정보가 부족하면 몸이 고생하는 것

2시 50분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덕천으로 나와 자동차를 회수하고

간신히 문을 연 식당을 찾아 늦은 점심을 해결했다.

덕천까지 왔는데 덕천서원은 들렸다 가야지.





요즘같이 나라가 어지러운 때

'선비는 인생의 꽃이요, 국가의 원기이여 민족의 마지막 보루임'을 자임하고

선비들을 격려하여, 문하에 지조 있고 유능한 인물을 많이 배출한 남명 선생같은

올곧은 선비가 없는 것이 시대의 불행인 것 같다.

요즘의 선비? 대학교수쯤으로 보면 될까..

장사하는 대학에서 선거철만 되면 교수 본연의 임무인 연구와 학생지도를

소홀히 하면서 정치판이나 기웃거리는 무책임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폴리페서(Polifessor)들과 어찌 비교할 수 있겠냐만..


1576년(선조 9) 남명 조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최영경, 하항 등 사림들이 그가 강학하던 자리에 건립한 서원이며

조식유적지(사적 305).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602년(선조 35)에 중건되었다.

1609년(광해군 1) 현판과 토지, 노비 등을 하사받아 덕천이라는 이름으로 사액서원이 되었다.

덕천서원은 강우유맥 남명학파의 본산이 되었으며 인조반정 등으로 정치적 풍파를 겪었다.

흥선대원군에 의해 철폐되었다가 1930년대에 다시 복원되었다.

조식은 1501년(연산군 7) 삼가현(지금의 합천군)에서 출생하였는데

이황과 함께 당시 영남유학의 쌍벽을 이루었던 대학자로 실천적인 성리학을 중시하였다.

일체의 벼슬을 마다하고 현재의 산청군 시천면인 덕산에서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다가

1572년(선조 5년) 72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덕산 입구의 입덕문을 지나면

수령이 400년이 넘는 은행나무가 서 있는 덕천서원에 이른다.

입구의 홍살문을 지나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에 맞배지붕을 올린 솟을삼문인

시정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강당인 경의당이 있고 그 앞쪽으로 동재와 서재가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이 공부하며 거처하던 곳이고

경의당은 서원의 각종 행사와 유생들의 회합 및 토론장소로 사용되던 곳으로

 ‘德川書院’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서원의 중심 건물이다.






경의당 뒤쪽의 신문을 지나면 사당인 숭덕사가 나오는데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에 맞배지붕집으로 중앙에는 조식의 위패,

오른쪽에는 그의 제자인 최영경의 위패를 모셔 놓았다. 덕천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3월과 9월의 첫 정일에 제사를 지내고 매년 양력 8월 18일에는

남명선생의 탄생을 기념하는 남명제가 열린다.


죽고 못살던 연인이 사소한 일로 관계가 소원해지기 시작하여

점점 멀어져 마침내는 이별 아닌 이별로까지 발전했다가 한 쪽이 용기 내어 손 내민

바람에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고 다시 이전의 상태를 회복한 그런 이야기 같다고나 할까.

지리산, 찾지는 못해도 늘 마음에 두고 있었기에 다가갔을 때 반갑게 맞아줄 준비를 하고

있었던 마음 넓은 연인같은, 어머니같은 산.. 언제나 포근한 또다시 멀어지지 않기를 바라며..

이번 지리에 들어 미산 선생님도 만나고, 산적님도 만나고, 또 서울서 오셨다는

황준영씨도 만났으니.. 역시 산사람은 산에서 만나는가 보다.

여기에 남명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는 덕천서원까지 들릴 수 있었으니

무얼 더 바라겠는가! 산에 들면 이렇게 좋은 것을..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