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산은 인간을 실망하게 하지 않는다.

2018. 2. 27. 22:59山情無限/지리산





지리산, 산은 인간을 실망하게 하지 않는다.



일시 : 18. 2. 16~17

코스 : 중산리 - 로터리 대피소 - 천왕봉 - 장터목 대피소 - 천왕봉 - 중산리

위치 : 경남 산청군 시천면, 함양군 마천면







삼세번, 세 번 만이다.

올해부터 한동안 소원했던 산을 가까이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그 마음을 시험이라도 하듯 지리산이 멀게만 느껴진다.

첫 번째는 장터목 대피소 예약을 해 놓았는데 갑자기 감기몸살이 왔다.

쉽게 나을 줄 알았는데 2주일이나 가는 바람에 가지 못하고, 두 번째 예약을 하고 나니

고맙게도 지리산에 눈이 올 것이라는 예보까지 해 주어 설경을 만날 기대에 부풀었다.

너무 기대한 탓일까! 과유불급(過猶不及), 과하면 부족함만 못하다는 말을 증명하듯..

지리산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시골집에서 막 출발하려는데.. 폭설로 지리산 전 구간 등산로가

폐쇄되었다는 문자 한 통이 이렇게 사람을 실망하게 하다니.. 풍선에 바람 빠지듯 부풀었던 기대도

무너져 내렸다. 그래도 가야지.. 호시탐탐, 설날에 대피소 예약을 하고 배낭을 챙겨 시골에 갔다.

다행히 이번에는 컨디션도 좋고, 날씨가 흐리다고는 하나 폭설이 내릴 계재는 아니다.

그래, "꿈은 이루어진다."는 거창한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마음먹고 실천하면 되는 것.

그러나 두 번의 기회를 놓치는 바람에 늦은 설은 봄철 산방기간(2.15~4.30)에 들어가

주능선이 막히고, 많은 등로가 폐쇄되어 버린 것. 겨울 지리산에 들면 설화와 빙화가 

절경인 연하봉-일출봉 구간과 빙폭이 아름다운 한신계곡 그 길을 걸어야 하는데..

아쉽지만 천왕봉에 오를 수 있는 것만도 감사해야지.





아무도 없는 길. 그러고 보니 오늘이 설날이지..

탐방안내소에 도착하니 어디까지 가느냐고 묻는다.

 장터목 대피소까지 갈 것이라고 하니 또 예약을 했느냐며 확인을 한다.

장터목 대피소에는 샘터 물도 얼어서 나오지 않고 생수도 없다고 하니

산에서 머물 동안의 물을 챙겼다. 무게가 거의 박 배낭 수준이다.

산행은 속도와 무게와의 전쟁인데..






통천길.. 하늘로 통하는 길

이 어지러운 인간 세상을 떠나 하늘로 가보자.






칼바위를 지나 조금 더 진행하면 나오는 다리를 건너면 

장터목 대피소와 천왕봉으로 길이 갈린다. 나는 천왕봉으로 오르고

와이프는 장터목 대피소로 직행한다. 중산리에서 천왕봉 오르는 것은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사다리 같이 곤두선 계단 길을 치고 오르니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망바위가..






로터리 대피소 직전 헬기장에서 본 천왕봉.

천왕봉은 손에 잡힐 듯 바로 머리 위에 있는데..





배낭에 물이 있지만 물을 아끼려다 보니 목이 더 마른 것 같다.

스포츠 음료라도 사서 목을 축여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로터리 대피소에는

음료수는 없고 그 귀한 생수를 팔고 있었다.






법계사 입구 샘터도 말랐다. 가뭄이 심하기는 심하다.





지금까지는 몸 풀기. 이제부터 본격적인 산행이다.

이전엔 여기 사립문이 하나 있었는데..








눈길이 열리고, 눈길을 따라 오르니 개선문





천왕봉은 아직 머리 위 그 자리에 있다.

힘들게 한 걸음 한 걸음 옮긴 만큼 고도가 높아지고

정상에 가까워 졌겠지만 생각만큼 줄어든 거리가

실감나지 않는다.





다져진 눈길은 눈길이라기보다 얼음길이다.

그래도 이게 어딘가!





아직도 동쪽 하늘은 구름이 낮게 내려 앉아 있다.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잠시 조망의 즐거움을..

멀리 반야봉과 그 너머로 고개를 내민 무등산이 어렴풋하다.






동쪽과 남쪽 하늘은 구름이 짙은데 다행히

서쪽과 북쪽 하늘에는 구름이 옅어지고 있다.

제석봉 일몰을 볼 수 있으려나..






드디어 정상 턱 밑,

언제나 정상 직전이 제일 힘들지, 산이나 세상사나..

어쩜 산행이 인생사와 그렇게 흡사한지..





가파른 계단을 오르다 돌아본 모습







아 천왕봉!









아무도 없는.. 칼바람만 몰아치는 황량한 천왕봉에서

더 머물 수가 없다. 바람이 세차 몸을 가누기도 힘들다. 춥기까지 하다.

실눈으로 사방을 한 번 돌아보고는 쫓기듯 내려섰다.

고적(孤寂)도 여유가 있어야 즐길 수 있는 것.


옛 속담에 "입춘 추위는 꿔다 해도 한다"거나

"입춘 추위에 김칫독 얼어터진다"라고 하며

봄이 온다는 입춘 즈음의 몹시 매운 날씨를 빗댔는데

내일 모레가 우수인데 이곳 날씨가 이렇게 매섭다니

과연 천왕봉은 천왕봉이로고..





이제 장터목 대피소로 직행해야겠다.

이런 상황이라면 제석봉에서 일몰 보는 것도 무리일 것 같다.





생명은 경이로운 것

황무지에서도 꽃을 피우고

 눈 속에서도 생명은 자란다.






이 부근의 설경도 지리의 풍경에 한몫하는데..





통천길을 올라 통천문을 빠져 나간다.





눈과 바위와 소나무를 만나면 그게 절경이지..







고개만 내밀고.. 숨이 차 보이는 이정표

눈이 적어도 1m는 쌓여 길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것이다.

눈이 쌓인 만큼 길은 높아지고 나무의 가지는 내려와 길을 막는다.

조금 전 숲길을 엉거주춤한 자세로 힘들게 빠져 나왔지만

그래도 폭설이 만든 눈길이 좋다.










제석봉을 지난다.

제석봉에서 일몰을 보려던 생각은 이미 접었지만

휑한 바람이 얼굴을 할퀴며 지나간다.

이곳 삭풍도 알아 줘야 한다.






조심조심.. 한 발 한 발 내딛기가 힘들다.

장터목대피소 내려가는 길은 완전 빙판길이 되었다.

비료부대라도 준비해올걸..





드디어 장터목 대피소

지리 산문을 들어선지 6시간, 오늘도 막판에 힘이 부쳤다.

물로 배낭이 무거운데다 점심까지 건너 띄었으니..


가뭄으로 샘물이 준데다 얼어서 사용할 수 없는데다

대피소에는 생수도 떨어져 모두 사용할 물을 지고 왔다.

국가적 차원에서 사대강 사업으로 썩어버린 강도 되살려야 하고,

지구적 차원에서 사막화와 물 부족 문제도 해결해야 할 당면과제다.

지리산과 영남알프스가 산행하기 좋은 산인 것은 다른 것들도 많지만

그 중에서 물이 풍부한 것도 한몫했는데 이제 지리산에도,

영남알프스에도 샘의 물이 많이 줄어들고 있다.

환경파괴의 부메랑이다.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은 기우제를 지내기만 하면 비가 온다고 한다.

그 비결은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멈추지 않기 때문이라는데

이제 그들도 점점 힘들어 질 것 같다.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저녁 준비하다 말고 뛰쳐나가 사진을 찍으려는데

바람이 얼마나 센지 카메라는 흔들리고.. 손이 시려

두 장을 연거푸 찍을 수도 없을 정도다.





잠을 못 잘 정도로 바람이 세다.

2호실은 바람소리도 유난하게 센데다 춥기까지 했다. 11시 경에 대부분 잠에서 깼다.

견디기 힘든 추위.. 대피소 직원을 깨워 온도를 올려달라니까 지금 상태가 최고로 높인 것이란다.

제기랄.. 새벽부터 산행을 하려면 몸이 좀 풀려야 하는데 밤새 소금을 구웠으니 천왕봉에서

얼마나 떨어야 할지. 사실 대피소는 특급호텔보다 더 비싼 요금을 받으면서 서비스 정신은 제로다.

가져간 옷 다 껴입고 핫 팩까지 동원해서 겨우 2시경 잠들었다.


오전 5시 현재 장터목은 기온 -14.9℃ 풍속 16.8m

기상청 예보에 지리산은 기온이  -18℃에 풍속은 25m라더니

이럴 땐 그 예보가 맞으려나 보다.






천왕일출 만나러 가는 길

제석봉에서 부터 돋기 시작한 동쪽하늘에 햇귀는

걸음이 더뎌 마음만 더 바쁘게 한다.







다행히 10분 전에 도착하여 살포시 얼굴을 내미는 태양을 만났다.










해가 뜨자 기지개를 켜며 어깨 걸고 일어나는 산, 산릉들

이렇게 새로운 하루가 열리고, 오늘이라는 날이 주어졌다.

내가 한 것이 아무 것도 없지만 오늘 하루가 또 선물로 주어졌다.

이건 순전한 은혜다.






인증사진 한 장 남기고..







정상에서 사방을 한 번 둘러본다.

장수 덕유산, 합천 황매산, 의령 자굴산까지 찾아본다.

장쾌한 지리 주능선 그 뒤로 무등산까지 조망된다.





천왕봉을 쉽게 내려서지 못하는 산객들..










중봉 가는 길은 문이 굳게 닫혀 있다.






이제 내려 설 시간.

이전 겨울에는 밧줄 잡고도 미끄러지면서 올랐던 길인데

이제는 나무계단이 설치되었다. 편하기는 하다만..

 






내려서는데 아름다운 모습들이 펼쳐지며 발길을 붙든다.





















조망의 즐거움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아쉽지만 내려가야 다시 오를 수 있는 것





로터리 대피소를 지나..

원래는 여기서 아점으로 라면을 끓여 먹고 가려 했는데

중산리에 가서 점심을 먹기로 하고 통과





오르고 있는 산객들은 내려가는 산객을 부러워한다.

산이 좋아 산에 들었으면 산에 오래 머무는 것이 더 좋은 일일 텐데도 말이다.

특히, 산을 좋아한다는 산꾼들이 제일 앞서서 걸으며 제일 먼저 산을 빠져 나간다.

이것 이율배반 아닐까!






장터목에서 내려오는 길과 만나는 삼거리 휴식처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칼바위를 지나 숲길을 조금 걷다 보니 이윽고 날머리..

중산리에서 천왕봉으로 오른 것도 하산한 것은 참 오랜만이다. 이번에도 봄철

산방기간이 아니었다면 백무동에서 하동 바윗길로 올라 한신계곡으로 내려섰겠지..

지리산 산신령이 되었을 허만수 추모비에 눈인사를 하고 산행을 마무리한다.

올 설에는 끊겨가던 전통(?) 하나를 이은 것 같아 다행이다.

인간은 산을 실망하게 해도 산은 인간을 실망하게 하지 않는다.

 숙제같았던 산행을 마칠 수 있음에 감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