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 우체국 / 안도현

2017. 9. 21. 23:26시,좋은글/詩







바닷가 우체국 / 안도현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 파도 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었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세월을 큰 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 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체국이 빨갛게 달아오른 능금 같다고 생각하거나
편지를 받아먹는 도깨비라고
생각하는 소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소년의 코밑에 수염이 거뭇거뭇 돋을 때쯤이면
우체통에 대한 상상력은 끝나리라
부치지 못한 편지를
가슴 속 주머니에 넣어두는 날도 있을 것이며
오지 않는 편지를 혼자 기다리는 날이 많아질 뿐
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삶이 때로 까닭도 없이 서러워진다.
우체국에서 편지 한 장 써보지 않고
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편지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질 것이다
바다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쓸쓸해지는 저물녁
퇴근을 서두르는 늙은 우체국장이 못마땅해 할지라도
나는 바닷가 우체국에서
만년필로 잉크 냄새나는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쓰는
소년이 되고 싶어진다
나는 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사랑을 한 게 아니었다고
나는 사랑을 하기 위해 살았다고
그리하여 한 모금의 따뜻한 국물 같은 시를 그리워하였고
한 여자보다 한 여자와의 연애를 그리워하였고
그리고 맑고 차가운 술을 그리워하였다고
밤의 염전에서 소금 같은 별들이 쏟아지면
바닷가 우체국이 보이는 여관방 창문에서 나는
느리게 느리게 굴러가다가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아는
우체부의 자전거를 생각하고
이 세상의 모든 길이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로도 가는 것을 생각하고
길은 해변의 벼랑 끝에서 끊기는 게 아니라
훌쩍 먼 바다를 건너가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소리를 우표 속에 그려 넣거나
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 문학동네, 1999




안도현(安度昡, 1961. 12. 15 경북 예천)
원광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과를 졸업,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세상의 '겉'과 '속'에 대한 상상력과 시작품「간격」(외 30편)의 창작 실제>로 석사학위,
<서정의 갱신과 창작 실제 : 창작시「국화꽃 그늘과 쥐수염붓」 외 67편을 중심으로>로 박사학위.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낙동강〉이 당선되면서 등단.
대학 졸업후 익산시 이리중학교 국어교사로 부임중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
1998년 제13회 소월시문학상 대상 수상. 2002년 노작문학상 수상.
2005년 이수문학상과 2007년 윤동주문학상을 수상.

2007년 현재 '시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016년 현재 노무현재단 전북지역위원회 상임공동대표이며
한국작가회의 소통위원회 위원장,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정교수로 재직중.

전통적 서정시에 뿌리를 두고 개인적 체험을 주조로 하면서도

사적 차원을 넘어서 족과 사회의 현실을 섬세한 감수성으로 그려낸다.

연어들이 번식을 위해서 바다에서 강으로 가는 과정을 배경으로 사회를 비평한 《연어》의 작가.
한겨레 21에 원고지,타자기, 워드프로세서로 글쓰는 도구가 바뀐 이야기를 쓰기도 했다.


대표작품으로는

『그리운 여우』1997, 창작과비평사,

『외로울 때는 외로워하자』1998, 샘터사,

『바닷가 우체국』1999, 문학동네,

『그 작고 하찮은 것들에 대한 애착』1999, 나무생각,

『나 대신 꽃잎이 쓴 이 편지를』1999, 하문사,

『외롭고 높고 쓸쓸한』2000, 문학동네,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2000, 이가출판사,

『이름이 란이라는 여자애가 있었다』2000, 동아일보사,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2001, 현대문학북스,

『그대에게 가고 싶다』2002, 푸른숲,

『관계』2002, 문학동네,

『짜장면』2002, 열림원,

『안도현의 아침엽서』2002, 늘푸른소나무,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2004, 창비,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2005, 문학동네,

『연탄 한 장』2006, 비앤엠,
『그 풍경을 나는 이제 사랑하려 하네』2006, 이가서,

『비목어』2007, 예담,

『간절하게 참 철없이』2008, 창비,

『연어』2008, 문학동네,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2008, 창비,

『괜찮아 네가 있으니까』2009, 마음의숲,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2009, 한겨레출판사,

『연어 이야기 (연어 그 두 번째 이야기)』2010, 문학동네,

『잡문』2015, 이야기가 있는 집 등이 있다.




- Berg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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