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 시인 / 이종섶

2017. 8. 1. 20:23시,좋은글/詩








무명 시인 / 이종섶


우크라이나에는 6명만 사용하는 언어가 있다 인도네시아에는 4명만 사용하는 언어가 있다
그들이 죽으면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언어들


지금도 몇 명만 아는 시가 있다 혼자만 아는 시가 있다  


 


―반년간『시에티카』(2010년 하반기 제3호)
―시집『바람의 구문론』(푸른사상, 2017)





이종섶(본명 이종섭)


1964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다.

200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기독교타임즈문학상,

수주문학상,

시흥문학상,

민들레예술문학상,

낙동강세계평화문학대상

등을 수상했다.

시집으로는

『물결무늬 손뼈 화석』(푸른사상, 2012)

바람의 구문론』(푸른사상, 2015)

등이 있다.




시어가 참 아름답고 기발한 이종섶 시인의 시 한 편 더



삽 / 이종섶


오래 쓰면 쓸수록 뾰족한 그곳이 둥그런 엉덩이처럼 변해가는 삽, 처음부터 찌르기 위해 만들어진 삽날은 흙을 갈아엎고 퍼 나르는 동안 닳고 닳아 유순하게 변화되기까지 수없는 세월을 홀로 울며 견뎌야 했다


조금씩 추해지는 표정을 감추려고 찬물로 세수하는 것도 잠시뿐, 쓰레받기로나 쓰이는 늘그막이 되어서야 위협적인 꼭지 부드럽게 깎여 거름더미라도 한 짐 푸짐하게 퍼주고 싶은 착하디착한 곡선으로 변한 것이다


땅을 파면 팔수록 산봉우리 닮아가고 모래를 뜨면 뜰수록 물의 흐름 배워가는 삽 한 자루의 성실한 노동 앞에 겸손히 머리 숙이고 싶은 날, 평생 맞서기만 하던 땅위에 서서 일방적으로 저지른 잘못을 사과라도 하듯 자근자근 눌러보는 삽날의 애교


나의 노년도 저랬으면 좋겠다 싶어 몇 군데 짚이는 곳을 슬며시 만져보지만 여전히 느껴지는 딱딱한 감촉, 남을 찌르며 살아야했던 아픔을 언제까지 겪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괴로운 밤 땅을 파기 위해 삽질을 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을 다스리기 위해 땅을 파야했던 삽 한 자루의 수행이 떠오른다


땅은 삽날을 갈아내기 위한 숫돌이었을까 강할수록 부드러운 숫돌을 사용해야 한다며 꼬리뼈의 흔적조차 완전히 없애버린 그곳을 내놓고 다니는 짐승 한 마리, 모든 것을 달관한 자세 하나 얻기 위해 날카로운 송곳니도 사나운 포효도 다 버렸다



-제10회 시흥문학상(2017) 대상 수상작

-웹 월간詩 [젊은시인들] 제6집 내게로 망명하라 초대시인 시선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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