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왼쪽 허리를 낡은 의자에 기대며 네 노래를 듣는 좌파적 저녁 기억하는지 톰, 그때 우리는 눈 내리는 북구의 밤 항구 도시에서 술을 마셨지 검은 밤의 틈으로 눈발이 쏟아져 피아노 건반 같던 도시의 뒷골목에서 톰, 너는 바람 냄새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지 집시들이 다 그 술집으로 몰려왔던가 네 목소리엔 집시의 피가 흘렀지, 오랜 세월 길 위를 떠돈 자의 바람 같은 목소리 북구의 밤은 깊고 추워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노래를 듣던 사람도 모두 부랑자 같았지만 아무렴 어때 우리는 아무것도 꿈꾸지 않아 모든 걸 꿈꿀 수 있는 자발적 은둔자였지 생의 바깥이라면 그 어디든 떠돌았지 시간의 문 틈 사이로 보이던 또 다른 생의 시간, 루이 아말렉은 심야의 축구 경기를 보며 소리를 질렀고 올리비에 뒤랑스는 술에 취해 하염없이 문밖을 쳐다보았지 삶이란 원래 그런 것 하염없이 쳐다보는 것 오지 않는 것들을 기다리며 노래나 부르는 것 부랑과 유랑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여전히 모르지만 두고 온 시간만은 추억의 선반 위에 고스란히 쌓여 있겠지 죽음이 매순간 삶을 관통하던 그 거리에서 늦게라도 친구들은 술집으로 모여들었지 이탈리아 양아치 탐정 파울로 그로쏘는 검은 코트 차림으로 왔고 콧수염의 제왕 장 드 파는 콧수염을 휘날리며 왔지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시였고 움직이지 않는 모든 것들의 내면도 시였지 기억하는지 톰, 밤새 가벼운 생들처럼 눈발 하염없이 휘날리던 그날 밤 가장 서럽게 노래 불렀던 것이 너였다는 것을 죽음이 관통하는 삶의 거리에서 그래도 우리는 죽은 자를 추모하며 죽도록 술을 마셨지 밤새 눈이 내리고 거리의 추위도 눈발에 묻혀갈 즈음 파울로의 작은 손전등 앞에 모인 우리가 밤새 찾으려 했던 것은 생의 어떤 실마리였을까 맥주 가게와 담배 가게를 다 지나면 아직 야근 중인 엥겔스의 공장 불빛이 빛나고 마르크스의 다락방에서는 여전히 꺼지지 않은 불빛 아래서 누군가 끙끙거리며 생의 선언문 초안을 작성하고 있었지 누군가는 아프게 생을 밀고 가는데 우리는 하염없이 밤을 탕진해도 되는 걸까 생각을 하면 두려웠지 추웠지 그래서 동이 틀 때까지 너의 노래를 따라 불렀지 기억하는지 톰, 그때 내리던 눈발 여전히 내 방 창문을 적시며 아직도 내리는데 공장의 불빛은 꺼지고 다락방의 등잔불도 이제는 꺼졌는데 아무도 선언하지 않는 삶의 자유 끓어오르는 자정의 라면, 고양이들만 울고 있지 그러니까 톰, 그때처럼 노래를 불러줘, 떼 지어 몰려오는 눈발 속에서도 앙칼지게 타오르는 불꽃의 노래를 그러니까 톰, 지금은 아픈 왼쪽 허리를 낡은 의자에 기대며 네 노래를 듣는 좌파적 저녁
―계간『서정시학』(2012. 봄)
박정대
1965년 강원도 정선에서 출생.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 1990년 『문학사상』에 「촛불의 미학」 외 6편으로 등단.
현재 무가당 담배 클럽 동인, 인터내셔널 포에트리 급진 오랑캐 밴드 멤버로 활동 중.
- 시집 - 『단편들』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아무르 기타』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 『삶이라는 직업』 『모든 가능성의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