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 백석

2018. 1. 29. 23:45시,좋은글/詩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 / 백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이리하여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지도 않고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장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 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출전 『백석시전집』, 창작과비평사, 1987.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은

1948년 10월 《학풍》에 발표된

백석의 대표작품으로, 민속적, 토속적 상상력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근대 자본주의의 물신화 속에서 살고 있는

근대인이 겪어야 하는 외로움과 덧없음의 감정을 노래하고 있다.

아내는 물론이고 모든 가족 일가와 떨어져 혼자 살아야 하는

순간에 자신의 외로움과 고독감은 한층 더 강하게 느끼게 된다.

근대사회에 와서 빚어진 이러한 고통을 사실주의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공동체적 유대가 깨진 근대인이 겪어야 하는 고독과 허무감을 노래한 작품이다.

백석은 고향의 지명이나 이웃의 이름, 자신의 고향인 정주 사투리를 그대로

시 창작에 옮긴 시인인데, 그것은 일제강점기에 모국어를 지키려는

그의 의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시,좋은글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 나의 어머니 / 오영재  (0) 2018.02.24
봄이 오기 전 / 김두일  (0) 2018.02.07
무엇이 남는가 / 박노해  (0) 2018.01.13
켈트족의 기도문  (0) 2017.12.31
[송년시] 섣달 그믐날 / 김남조  (0) 2017.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