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구름에 갇혀 눈꽃 밭 길을 묵언수행하듯 걸었다

2018. 12. 26. 20:06山情無限/지리산




지리산, 구름에 갇혀 눈꽃 밭 길을 묵언수행하듯 걸었다.


2018. 12.17 ~ 18

백무동-백무능선-장터목대피소(1박)-천왕봉-세석대피소-한신계곡-백무동(원점회귀)

홀로



 





겨울비가 주적주적 내린다.

도심에는 비가 내리지만 높은 산에는 눈이 내릴 것 같다.

영남알프스 가지산, 신불산에도.. 그리고 지리산에는 더 많은 눈이 많이 내리겠다.

눈 생각을 하니 갑자기 지리산 눈길을 걷고 싶어졌다. 달갑지 않은 겨울비가 높은 산에

눈을 데리고 왔다니 금세 생각이 바뀐다. 그래, 같은 상황이라도 생각하기, 마음먹기 나름이다.

대피소 예약 현황을 보니 장터목대피소 예약 인원이 20명 남짓이다. 얼른 예약하고

시골 가는 길에 배낭을 챙겼다. 마침 지리산도 가을철 산방기간이 끝나 주능선이 열렸으니

장터목대피소에서 세석대피소 구간을 걸을 수 있겠다. 한신계곡은 빙판을 만들고 있겠지.

어머니 만나러 가는 길에 지리산까지 들렀다 올 수 있으니 금상첨화 아닌가?

이전엔 잘 몰랐지만 떠나와서 보니 고향이 지리산 인근이라는 것이 참 좋고,

사는 곳이 영남알프스 인근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12:35, 백무동탐방지원센터 통과


12시 조금 전에 백무동에 도착하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있으니

주차요원이 유료주차장이라며 하루에 5천 원씩 이틀 치 만 원을 내라고 한다.

그냥 나와 주차장이 딸린 식당을 찾아 점심을 먹고 주차를 시켰다.

근사한 점심까지 먹었는데 7,000원이다.





이리 가면 하동바윗길을 거쳐 장터목대피소가 나오고,

저리로 가면 한신계곡을 거쳐 세석대피소로 갈 수 있다.

오늘 이 길로 올랐다가 내일 저 길로 내려올 참이다.





어제 울산은 비가 왔지만

서부 경남에는 눈이 내렸다길래

지리산에도 눈이 많이 왔을 거라 생각했는데

하동바위까지는 생각한 만큼 눈이 많지 않았다.

낙석 위험 때문인지 하동바위를 멀리 떨어져

건너는 다리가 새로 생겼다.






참샘, 참샘에서 목이 마르지 않았으나

생수 한 바가지를 들이켰다. 지리산에 샘이 많이 있지만, 

4계절 물이 마르지 않는 샘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바래봉샘, 임걸령샘, 선비샘, 이곳 참샘 정도.

원래 이같이 갈수기에도 물이 솟는 샘을 참샘이라 하는데

이곳 샘이 참샘이라는 이름을 가로챘다.





참샘에서 가파른 길로 백무능선에 올라섰다.

장터목대피소는 오른쪽. 왼쪽으로 가면 창암산이 나온다.

장터목대피소까지 이제 두어 번만 힘을 쓰면 될 것 같다.






능선에 올라서니 밟는 느낌이 올 정도로

눈이 제법 쌓여있다. 황량한 겨울 산의 이불이

산죽 같았는데 눈이 소담스럽게 산죽을 덮고 있다.







전망대에서 배낭을 내리고 장터목대피소도 조망해 보고

잠시 휴식하려 했는데 걷던 길을 멈추니 갑자기 체온이 떨어진다.

겨울산행은 쉬지않고 움직이고, 걸어야 한다

사진만 두어 장 찍고 다시 길을 나섰다.





장터목대피소가 가까워지자 눈이 제법 쌓여 발목이 빠질 정도다.





올 때마다 느끼지만, 장터목대피소는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다. 설레며 마음도 가다듬기 전에 기다리던

연인이 문을 열고 불쑥 들어 오는 기분이랄까.

장터목대피소에 도착하니 차가운 골바람이

바늘로 찌르듯 볼을 때리며 맞이한다.

인사치고는..






장터목대피소 예약자가 20명 조금 넘는다더니

장날 같던 장터목에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취사동에

들어서니 10여 명이 식사 중이거나 식사 준비로 분주하다.

식사 준비를 하다 일몰 상황을 보려고 잠시 나왔더니

구름 속에서 홍시 같은 빨간 해가 동그란 얼굴을 내밀고 있다.

카메라를 가지고 다시 나갔더니 그새 사라져 버렸다.

결정적 순간을 놓쳤다. 홍시같이 빨간 해는

그냥 가슴에 담았다.


*


중앙 홀 2층 창가 자리를 배정받았다.

투숙 인원이 많지 않아 자리도 띄움띄움인데 맞은편에 서울서 오셨다는

세 분, 잠깐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공통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자굴산에

선산이 있다는 분, 산과 여행을 좋아하는 것은 물론이고, 나이도 갑장 아닌가!

창문을 때리는 바람 소리는 매섭지만, 방안에는 온기가 돈다.

히터 온도를 그렇게 높인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다.


*


이른 밤에 잠 오기를 기다려야 하는 대피소에서는 

잠 들기가 쉽지 않았는데 오늘은 여느 때와 달리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일찍 잠들면 일찍 깨는 법. 자정쯤에 깬 잠은 밤을

 하얗게 새우게 했다. 하긴 밖에 나가서 찬 바람까지 맞았으니..

천왕일출이야 태양과 구름과 바람이 결정할 일인데 야심한 밤에

하늘을 보러 나간다고 변할 게 있을까. 한 치 앞도 모르는 인생인데

주제넘게 하늘의 일까지 예측하려고 할 게 뭐람.






지리산에 들었다고 꼭 천왕일출을 봐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지난밤 두터운 구름을 보고 일출에 대한 기대는 접었지만,

새벽 무의식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배낭을 꾸렸다.

그리고 발걸음은 천왕봉으로 향한다.







두터운 구름에 붉은 기운이 돌더니

콩알만 한 하얀 점이 하나 언뜻언뜻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더니

갑자기 백열전등에 불이 들어오듯 환하게 밝히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절묘한 타이밍, 특별한 일출을 잡았다.





방금 막이 내렸는데.. 지금 천왕봉을 오르는 산객.

천왕봉에 오르는 산객이라고 꼭 천왕일출을 보러 오르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리 10경 중 제1경인 천왕일출을 만나는

행운이 따르면 더 좋을 테지만..





구름 장막 쳐진 적막한 천왕봉 정상에 두 사람이 있지만,

누구도 정상석 부여잡은 사진을 찍어 달라고도 찍어 주려고도 하지 않았다.

너무 춥고 손이 시려서다. 바람이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드세다.

올 한 해는 소백산 칼바람을 맞지 않아도 제정신으로 살 것 같다.






잠시 중봉 쪽을 바라보던 산객도 중산리 방향으로 내려서고,

장터목 방향으로 몇 사람이 내려갔다. 천왕봉은 일출도 일출이지만,

겹겹이 파도치듯 일어서는 산너울은 또 어떤가!

혹시 구름이 걷히면서 몽환적인 산너울을 보여줄까

기다렸지만 마냥 기다릴 수 없어 천왕봉을 내려선다.

역시 사진은 기다림의 미학!





눈길이 미끄러운 데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몸을 가누기가 힘들다.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내디딘다.

마치 처음 걸음을 배운 아이처럼..








오리무중이 아니라 20m 앞이 안 보인다.

겨울 산에 하얀 눈까지 쌓이다 보니 흑백사진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자연은 자연대로 존재하는 것, 이것이 자연의 일상인데

인간의 욕심으로 볼 것은 아니다. 이런 가운데도 북풍한설에 맞서

죽은 가지에서도 눈꽃을 피우는 모습을 보라





매서운 바람에 맞서 피운 꽃

눈물 속에 핀 꽃이 왜 아름다운가!

그 눈꽃 터널을 거저 지나간다.





통천문을 나왔으니 여기부터가 속세인가!






인간이 잘 난 척 교만하지만

자연 앞에서는 수증기 한 방울에도 못 미친다.

어떻게 죽은 가지에도 산 가지에도 하얗게 꽃을 피울 수 있을까

어쩌면 그렇게도 사소한 것에 얽매이지 않고 너그럽고, 공의로울까

인간은 자연 앞에 겸손할 일이다.











비바람 눈보라를 맞으면서도 자리를 지키는 모습이 아름답다.

제자리를 지키기 위해선 고통도 때로는 손해도 감수해야 한다.

사람이든 이정표던 제자리를 지킬 때 가치를 발한다.






겨울바람과 처절하게 맞서고 있는 고사목에

눈길 한번 제대로 주지도 못하고 쫓기듯 제석봉을 내려섰다.

그 순간 살을 후벼 파는 듯한 칼바람을 어떻게든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유유자적 하려 해도 그게 쉽지 않다.

이렇게 산에서는 쫓긴다. 





장터목대피소 취사장에 들리니 갑장 세 분이 식사 중이다.

오늘 연하천대피소까지 가는데 10시에 출발할 것이라고 한다.

기약 없지만,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갈 길 바쁜 내가 먼저

출발했다. 갑장들이여 안녕, 장터목대피소여 안녕!







연하봉, 연하선경이 이런 모습은 아닐 터.

과유불급이다. 구름이 많아도 너무 많다. 온통 구름 천지다.

연하봉도 나도, 조망도 구름에 갇혔다.






바로 앞 1667봉도 안 보인다.

1667봉에서 연하봉 쪽으로 보면 구름이 능선을 경계로

꼭 땅따먹기하듯 밀고 밀리는 풍경이 장관인데 오늘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도 하고, 휘몰아 치는 바람에 겁을 먹고

1667봉도 그냥 넘는다.





이런 길은 사나흘 동안 마냥 걸어도 좋을 것 같다.

아무 생각 없다. 그냥 좋다. 아 이 순간 정말 좋다.

뽀드득뽀드득 소리도, 발밑 감촉도 좋다






어제 백무능선을 오르면서 본 산죽이 유일하게

유색이었는데, 여기 또 산죽과 올가을 뭇사람들을 유혹하며 마음을

빼앗았을 단풍나무가 겨우 흑백 세상을 면하게 해 준다.






삼신봉에 이르자 구름이 터진 틈으로

 파란 하늘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빛이 생명이다.

햇볕이 드니 눈도 더 하얗게 본색을 내며 살아나고,

어둠에 짓눌렸던 기분도 살아난다. 날이 맑아지니 더 정겨운 길.

장터목대피소에서 세석대피소까지 이 길이 정말 좋다.






촛대봉 위 하늘,

태양을 가린 구름이 무지갯빛을 발한다.

얼마 만에 보는 태양인가?






촛대봉에서.. 백두대간에서 낙남정맥으로 분기되는

영신봉이 바로 앞에 보이고, 그 뒤로 반야봉은 아직도 봉우리가 구름에 닿아 있다.

지나온 연하봉도 마찬가지.. 그 뒤로 제석봉과 천왕봉은 아직도 구름 속이지만,

흰옷을 입은 장쾌한 지리 주능선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영신봉 아래 세석대피소가 눈 앞에 나타났다.

여름이면 이곳에 야생화가 천상의 화원을 이루는데

겨울이 되니 하얀 눈꽃이 만발했다.





지리산을 전세 낸 기분이다.

천왕봉 정상을 혼자 지키기도 했고,

장터목대피소를 출발하여 세석대피소까지 오는 동안

만난 사람이라곤 네댓 명이 전부. 이 큰 세석대피소도 적막하다.

아침 겸 점심을 준비하고 있는데 부산서 왔다는 청년 두 명이 도착했다.

조금 있으니 연하천으로 향하던 서울 갑장 세 분이 세석대피소에 들렸다.

 장터목대피소를 떠나 오면서 기약도 없이 다시 만나기를 기약했는데..

다시 만남이 이렇게 빠르게 이루어질 줄이야.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갑다.

청년들은 장터목으로, 갑장들은 연하천으로, 나는 한신계곡으로..

뿔뿔이 흩어지며 모두 갈 길로 간다.

갑장들.. 다시 만날 날이 오겠지?

사진이나 한 장 담아둘걸..






세석갈림길에 서서,


언제나 갈림길에 서면 기분이 묘해진다.

갈 길이 정해져 있을 때는 덜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여러 생각이 든다.

뒤돌아보면 로버트 프루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이 더욱 마음에 와닿는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지금의 나는 각 순간순간의 갈림길에서 내가

의식을 했든 의식하지 않았든 그 갈림길에서 선택한 선택의 결정체다.

뒤돌아보면서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일까! 역사에 가정이 없듯

인생에도 가정이 없지만 말이다.






이 길로 오기를 기다렸다가

환영이라도 하는 듯, 눈꽃 터널을 만들어 반긴다.


힘들게 올라섰던 능선에서 내려서기가 아쉬워 뒤돌아보니

태양을 가리며 낮을 밤같이 어둡게 하던 구름도 걷혀 하늘은 청명하게

본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짙던 구름은 양같이 순해져 하늘을 유유히 떠 간다.

광양 앞바다도 아스라이 보인다.






한신계곡으로 내려서면서 서울서 왔다는 일행을 만났다.

아 이렇게 멋진 길을 택하다니.. 대장의 안목이 탁월한 것 같다.

방금 점심을 먹었다는 데도 강권하며 밀감 2개나 떠맡긴다.

 고맙고 미안하다. 나는 줄게 아무것도 없는데..





이런 연리목이 여기에 있었나?

이 길로 제법 다녔는데 오늘 처음으로 보는 연리지다.

어떻게 한 번도 보지 못했지? 아마 가파른 길에 신경을 쓰며

발밑만 쳐다보다 보니 못 본 것 같다. 오늘도 혼자 이 길을 걸었다면

못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상단부에서 조금 내려서니 길은 벌써 빙판이 되어있다.

오늘 같은 날은 특히 조심해야 한다. 낙엽 밑 빙판길이 위험하듯

빙판을 눈이 덮고 있으니.. 오히려 한겨울 빙판길보다

더 신경을 써야 할 것 같다.





급경사 구간은 거의 내려선 것 같다.

"아래쪽으로 내려올 때는 단지 발만 들어도 몸이 저절로 쏠려 내려갔다.

그러니 어찌 선(善)을 쫓는 것은 산을 오르기 처럼 어렵고, 악(惡)을 따르는 것은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겠는가?" 남명 선생이 1558년(명종 13) 6월

지리산을 유람하고 쓴 '유두류록(遊頭流錄)'에 나오는 글이다.

그렇다! 선을 쫓는 것은 산을 오르기 만큼 어렵지만

악을 쫓는 것은 산을 내려서는 만큼 쉽다.






생명은 경이로운 것

끝내는 겨울도 이기고, 바위도 이길 것이다.





군데군데 빙판길이 되어 있다.

이렇게 자수하듯 얼굴을 드러내고 있으니

오히려 고맙다.





긴장감도 덜하고 지루함을 느끼며 터덜터덜 걸을 때 

산죽밭에 서서 백무동 3.7km를 가리키던 이정표는 더 지루하게

만들었는데 여기에 서 있는 이정표는 희망과 위안을 준다.

조금 더 걸었을 뿐인데.. 백무동 3km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이쁘게 보인다.







한신계곡의 물줄기는,
촛대봉과 영신봉 사이에서 발원하는 한신계곡 본류,
덕평봉 북쪽에서 발원하는 바른재골, 칠선봉 부근에서 내려오는 곧은재골,
장터목 방향에서 흐르는 한신지계곡 등 4갈래의 물줄기가 엄천으로 흘러들어
경호강이 되었다가 남강이 되고, 낙동강이 되었다가 드디어는 바다가 된다.





12년간 수행하던 도인이 마고할매의 셋재딸

지리산녀의 유혹에 빠져 폭포로 떨어져 죽으면서 "나의 道는 실패야,

나는 이만 가네"하고 떠나는 바람에 "가네소"로 불리게 되었다는

전설의 폭포. 검푸른 물빛이 등골을 오싹하게 한다.







한신지곡과 금줄이 쳐있는 한신지곡 샛길


백무동을 기점으로 한 등산로는

백무동에서 곧장 장터목대피소로 오르는 하동바위길,
세석대피소로 오르는 한신계곡(주곡) 길과 한신계곡에서

좌측으로 빠져 장터목대피소로 오르는 이곳 한신지곡 길이 있다.

한신지곡 길은 비지정 등산로로 폐쇄된 상태.





여기서 부터는 '가네소 자연관찰로'







'가네소 자연관찰로'는 넓은 계곡을 따라 이어진다.









백무동 계곡은 길도 계곡도 얼어붙기 시작했다.

겨울은 추워야 하고, 백무동 계곡은 얼어야 제맛이다.

한겨울 백무동 계곡이 꽁꽁 얼면 다시 찾으리라.





등로는 계곡에서 한참이나 멀어졌지만
저 아래에서는 계곡의 물소리와 빈 가지를 울리는 바람 소리가

조화를 이룬다. 홀로 묵언수행하듯 걷는 길에서 느끼는 자연의 소리다.
군데군데 '소음 금지'라는 안내 간판의 의미가 새삼스럽다.





한참 동안 고즈넉한 낙엽길이 이어졌는데

날머리 직전에 나타난 미끄러운 길은 끝까지 조심하라는 것 같다.

산행은 집에 안전하게 도착해야 끝난 것이다.





산문을 나선다.


딴 세상 같던 지리 산정에서의 하룻밤 이틀 낮.

귓전을 울리며 얼굴을 할퀴듯 드세게 몰아치던 북풍한설, 구름은

먼 곳을 두리번거리기보다는 바로 앞, 가까운 곳이 중요하다는 것을

교훈하듯 20m 남짓한 공간 안에 가두기도 했다. 죽은 나무, 산 나무 구별 없이

 피운 기적의 꽃, 눈꽃! 이번 겨울 들어 처음으로 눈길을 걸으니 얼마나 설레었는지..

무엇보다 전세를 낸 듯, 묵언수행하듯 걸을 수 있어 좋았던 그 눈꽃 만발한 길,

눈과 얼음이 어우러진 한신계곡 빙판 비탈은 또 얼마나 스릴있었는지, 드센 바람과

추위가 엄습해 도망치듯 천왕봉, 제석봉, 1667봉을 내려섰지만, 역설적이게도

포근했다. 지리산, 그 포근한 품에 안기면 참을 수 없이 목말랐던 그리움도 이내

사라지지만, 목말라 마신 바닷물이 더한 갈증을 불러오듯, 내려서는 순간

외려 더 큰 그리움으로 몰려온다. 하여, 찾고 또 찾을 수밖에 없는 산.

그대 이름은 지리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