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2. 18. 00:49ㆍ山情無限/지리산
지리산, 설날 산에 들었으나..
2019. 2. 5 ~ 6
홀로
백무동 - 하동바위 - 장터목 - 제석봉 (원점회귀)
지리산은 가깝고도 먼 산.
심리적으로야 늘 마음속에 있으니 가깝고도 편안한 이웃 같다.
물리적으로는 울산이 서울보다 가깝지만, 지리 북부 백무동이나 추성리를
대중교통으로 가려면 서울보다 멀다. 아니 불편하다. 그러나, 고향에 가면
지리산까지는 거리가 제법 되지만 마치 지리산 어느 자락같이 아늑하고
한달음에 달려갈 것 같이 느낌이 든다. 하여 설날 고향을 갈 때는
산행 채비를 하고 가서 설날 지리산에 들러 하루를 묵고 집으로 온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지리산을 찾다보니 연례행사같이 되었다.
이번에도 연례행사를 치를 참이다.
단골 식당도 오늘은 장사하지 않는다. 그렇다. 오늘이 무슨 날인가!
점심을 해결하고 산에 들려고 했으나 문을 연 식당이 없다. 유비무환(?).
오는 길에 마천 슈퍼에서 준비한 빵과 우유로 점심을 대신하고 입산한다.
물론, 오늘도 사장님의 배려로 비싼 공영주차장이 아닌 펜션 마당에 주차했다.
게으른 사람 설날 지게 지고 나선다더니 내가 그 꼴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설날 서둘러 집을 나서 산에 들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해 본다.
간절함, 그렇다. 지리산에 들고 싶은 간절함 때문이다.
산에 들면 다른 생각을 안 하려 하지만,
갑자기 병마와 싸우고 있다는 김형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 하동바위가 나오고, 참샘까지 올랐다.
배낭 내려놓고 생수 한 바가지를 마신다.
아! 상쾌한 이 느낌..
속 빈 강정은 실속 없음을 말하겠지만,
이 나무는 그것과는 다르다. 어쩜 외양은 멀쩡한 것 같아도
이런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허우대가 멀쩡해 보여도 속이 병들고
비어 있으면 오래 버티기 힘든 것 아닌가.
참샘에서 능선 오르는 길이 가파르지만
창암능선까지만 오르면 한층 마음이 편안해진다.
조망도 트이고, 수더분한 길도 정겹다. 시작이 반이고,
거리상으로 절반이나 되고, 이제 높여야 할 고도도
400여 m밖에 안 되니까 여유가 생긴다.
친구인듯한 여성 두 분,
세상 사는 이야기는 산에 와서 다 하는지..
남들이 들으라고 하는 이야기는 아닐 텐데.. 추월해서
앞서갈 형편은 못 되고, 그렇다고 걸음을 멈추자니 땀이 식을 것 같고..
하여 속도를 늦춰도 이야기 소리는 귓전에 맴돈다.
간격이 벌어지지 않는다.
난 조용히 걷고 싶은데..
하동 바윗길로 오를 때는 꼭 쉬어 가는 곳.
장터목대피소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인다. 조망도 좋다.
지리 등줄기와 등줄기에서 갈빗살 같이 흘러내린 능선들이 이루는
험준함. 골마다 언뜻언뜻 운해라도 피어오르면
동양화 한 폭 같은 모습을 보여 주는 곳.
장터같이 그렇게 산객들이 붐비던 장터목 대피소도
오늘은 한산하기만 하다. 취사장에 들어서니 한 팀이 먼저 와 있었고,
5시가 가까워지면서 속속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오늘도 반야 낙조를 보여주지 않으려는 모양이다.
설날은 백무동 식당만 쉬는 것이 아닌가 보다.
일찍 저녁을 해결하고 잠자리를 배정받았다.
남자는 20명이 조금 넘는 것 같다. 잠깐 누워있다는 것이 깜빡
잠이 들었다. 소등한다는 방송에 깨었는데 소등 후에도 옆에서는
배낭 정리하는 소리가 오래도록 들렸지만, 아직 초저녁인 데다
내일 새벽 일찍 출발하려면.. 이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나에게 있었다. 평소 늦게 자는 습관은 대피소에서
잠들기 어렵다. 잠 오기를 기다리는 사이 여기저기서 코 고는 소리가
합주를 시작하면 잠은 도망을 한다. 초저녁에 토막잠까지
잤으니 오늘은 언제 잠이 올까..
알람을 5시에 맞추어 두었는데 아뿔싸! 잠을 깨니 6시 30분.
일출 시간이 7시 25분인데.. 알람 소리는 아예 듣지 못했다, 주위가
조금 소란스럽다는 것은 잠결에 느꼈으나, 꿈속에서 들리는 소리로 알고
일어나지 않았다. 인원도 몇 명 안 되었으니 평소보다 조용했을 것도
원인일 수 있으나. 3시까지 잠들지 못한 것이 결정적인 원인.
갈 사람은 갔지만, 아직도 방에는 몇 사람이 자는 것 같다.
머리로는 이왕 늦은 것 잠이나 푹 잘까 하는데,
손은 배낭을 챙기고 있다.
나와 비슷한 형편의 외국인이 앞에 가고 있다.
바쁘게 걸으면 아슬아슬하게 천왕봉에서 일출을 볼 수 있을 것 같지만,
근래 컨디션이 바닥인 데다, 어제저녁이 부실했는지 허기가 진다.
무리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좀 편하게 즐기자.
이렇게 여유 있고 좋은 것을..
사람들은 참 영리한 것 같아도 자기 스스로 벽을 쌓고
벽 속에 갇히고, 이제는 그 갇힌 벽을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을 친다.
고생을 사서 한다. 욕심을 조금 줄이니 이렇게 편한 것을..
그도 나와 같은 마음인 것 같다.
비슷한 모습이지만, 천왕봉에서 보던 모습과는
또 다른 모습. 오늘 같은 날이 아니면 어찌 제석봉에서
여유롭게 이런 모습을 볼 수 있겠나?
으레 오를 것으로 여기던 정상을 줌으로 당겨본다.
당연히 올라야 할 산객들이 오른 천왕봉, 사람인지 바위인지 잘 구분되지 않으나
자세히 보니 사람이다. 개미보다 작게 보인다. 직선거리 1km도 안 되는데 말이다.
조금만 멀어져도 사람을 구분할 수 없을 것 같다. 더 멀어지면 산도,
더 멀어지면 지구마저도.. 광활한 우주 가운데서는 지구도 점 하나,
먼지 같은 작은 존재
"코스모스"의 저자 칼 세이건은
지구에서 60억km 떨어진 보이저 1호가 잡은 지구를 보고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이라며, "여기 있다! 여기가
우리의 고향이다"라고 시작되는 감동적인 소감을 말했다.
"이곳이 우리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 당신이 들어 봤을 모든 사람,
예전에 있었던 모든 사람이 이곳에서 삶을 누렸다.
우리의 모든 즐거움과 고통, 확신에 찬 수많은 종교,
이데올로기들, 경제 독트린들, 모든 사냥꾼과 약탈자,
모든 영웅과 비겁자, 문명의 창조자와 파괴자, 왕과 농부,
사랑에 빠진 젊은 연인들,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
희망에 찬 아이들, 발명가와 탐험가, 모든 도덕 교사,
모든 타락한 정치인, 모든 슈퍼스타, 모든 최고 지도자,
인간 역사 속의 모든 성인과 죄인이 여기 태양 빛 속에
부유하는 먼지의 티끌 위에서 살았던 것이다.
지구는 우주라는 광활한 곳에 있는
너무나 작은 무대이다."
아가씨 젖무덤 같은 하동 금오산
금오산 정상부근 데크는 다도해가 한눈에 들어오고,
지리 천왕봉도 조망되는 특급 전망대로 야영하기 정말 좋은 곳인데..
이제는 야영할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렸으니..
해가 떠오르려는지 구름의 위쪽 밝은 띠가 불타는 것 같다.
새날은 이렇게 밝아 왔다.
또 하루가 값없이 선물로 주어졌다.
새가 꼭대기에 앉으니 솟대가 되었다.
오늘 좋은 일이 있을 것 같다.
이글거리는 모습으로 떠오르는 태양
오늘도 힘껏, 최선을 다해 살라고 응원하는 것 같다.
지리의 정기와 태양의 기운을 듬뿍 받은 느낌이다.
제석봉 고사목들도 세월과 함께 사위어 간다.
인간의 욕심이 산을 황폐하게 만들었지만, 산이 조금씩
살아나는 것 같다. 자연이 훼파되는 것은 잠깐이지만
복원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제석봉의 일출이 이렇게 장관일 줄이야!
태양이 구름을 태우고 하늘을 태우는 것 같다.
마른 나무에 꽃이 피기도 하고,
나무는 불도 때지 않았는데 굴뚝이 되고
제석봉에서 보는 유장한 지리 주능선,
반야봉, 종석대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반야봉 양쪽으로 남고리봉과 만복대까지..
고사목,
넌 사라지고 제석봉도 울창한 숲으로
옷을 갈아입어야겠지만, 넌 사진으로라도
살아남아야 할 멋진 모습이야.
제석봉에서 노닐다가 장터목대피소로 내려가는 길
산길이나 인생길도 오르기는 힘들고, 내려갈 때는 정말 조심스러운 것
그런 면에서도 산행과 인생이 흡사한 것 같다.
낭패 아닌 낭패..
오늘도 장터목 - 세석구간을 거쳐 빙벽을 이루고 있을
한신계곡으로 내려갈 계획이었는데.. 등산화에 채운 한 체인이 터져 버렸다.
이 상태로 빙판이 되어있을 한신계곡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위험한 일. 며칠 후
봄철 산방기간으로 주능선 등로가 닫혀도 어쩔 수 없다. 아쉽지만 안전이 우선이다.
참 그렇다. 내가 나이를 먹듯, 등산 장비들도 다 같이 나이를 먹는구나.
새로운 장비를 사면 얼마나 쓸까 싶어 새로 사지 않는데
안전에 관련된 장비들은 재점검을 해야 할 것 같다.
눈 부신 태양이 분신 같은 빛 방울들을 던진다.
부득불 한신계곡으로 내려가려던 계획을 수정했다.
그 바람에 한층 여유가 생겼다. 하나를 잃으니 다른 하나가 생긴 셈이다.
대피소에서 새벽에 먹으려던 수프로 아침을 대신하여 먹었으니 이제
내려갈 일 말고는 딱히 할 일이 없어 대피소 마당에서 산 너울을 담아본다
장쾌한 황금능선의 구곡산, 산청 주산 뒤로 고성 와룡산..
하동 금오산, 그 뒤로 남해 금산, 망운산까지..
여기는 또.. 지도를 찾아봐야겠다.
이전에는 박 배낭을 메고 지리에 들었으나
이제는 힘도 부치고 다른 사정으로 대피소를 이용한다.
약간의 불편도 있지만 이 산정에 대피소가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가!
근래에 와서는.. 이 대피소를 앞으로 몇 번 더 찾을 수 있을까?
이 지리산은 또 몇 번 더 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유한하기에 더 소중한 것들..
조심조심, 빙판길에서 애썼다고 부드러운 흙길도
잠시 잠깐 얼굴을 내밀었으나 이어지는 빙판길, 그래도 산죽밭 사이로 난
길이 정겹다. 오늘 하동바윗길 창암능선도 이 정도인데 빙벽이 되었을
한신계곡으로 내려가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다.
어느 산악인이 그랬다지
"등산의 완성은 집에 안전하게 도착하는데 있다."라고
갈림길,
창암능선에서 하동바위 쪽으로 내려서야 하는 지점.
지금 시간 10시.. 너무 일찍 내려왔나? 빙판길도 거의 끝났고,
벌써 반 이상 내려왔다. 지리산에 들어 이렇게 빨리 하산을 하다니..
이렇게 일찍 내려와서 무엇을 하지..
빙판 구간이 줄어들고 상태도 많이 좋아졌지만,
여기가 지리산 아닌가..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참샘에서 시원한 생수 한 바가지 들이키고,
잠시 쉬고 있는데 산새 한 마리가 빠르게 날아와서는
웬 이방인 인가 하고 힐끔힐끔 쳐다보더니
뭐가 그리 바쁜지 포르르 날아가 버렸다.
녀석 조금 더 머물다 가지..
곳곳에 이어지는 빙판길..
이런 곳은 길 아닌 곳이 길이 된다.
길은 빙판이 되어 있어도,
얼음 밑에도 봄기운이 돌며 물길이 힘차게 흐른다.
입춘이 지났다고 얼음도 갈려 입을 벌렸다.
위험해 보이는 부녀의 지리산행.
초등학교 6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 딸과 아버지.
딸은 운동복 바지에 운동화, 아버지도 아이젠을 차지 않았다.
조금 전 빙판길에서 아찔한 모습도 보였다. 체인젠을 벗어 주려고 했으나
괜찮다기에 그대로 왔지만 내가 불안해 보였다. 그냥 가는 데까지 가 보자며
산에 든 것 같지만 그럴 것 같았으면 이 길보다는 가네소 폭포까지
갔다 오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하동바위, 새로운 다리를 놓을 때
이전 다리는 철거를 하지 않고 흉물스럽게 이게 뭐람.
다시 한 번 더 할 일을 만들어 놓은 것일까?
아직 가을 같은 분위기도 남아 있지만
벌써 봄빛이 감도는 것 같다.
설날 지리산에서 석규 씨를 만나다.
아침 6시 40분에 울산에서 출발했단다.
울산서는 만나기 힘들어도 지리산에서 마주치다니..
세상이 좁아서일까, 울산이 넓어서일까?
정상은 거의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었는데
내려오니 파란 하늘을 캔버스 삼아 구름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
11시 20분, 하산 완료!
지리산에서 이렇게 일찍 하산한 적이 있었던가?
지금 다시 올라가도 될 시간이다. 어디로 갈까?
일단 점심을 먹고 생각해 보자.
자동차를 주차해 둔 옛고을 펜션, 식당.
점심을 먹으러 들렸더니, 밥이 없다면서 식은 밥을 덥혀 주시겠단다.
김치찌개와 맛있게 차려진 상. 맛있게 잘 먹었는데 그냥 가라고 하신다.
오늘은 영업하는 날이 아니어서 돈을 받지 않겠다며 극구 사양하신다.
어쩔 수 없어 그냥 나오긴 했지만 기분은 얼떨떨.. 이래도 되나
정월 초이틀부터 이렇게 빚을 지다니.. 기분 좋은 일이다.
나도 오늘 빚 갚을 사람을 찾아봐야겠다.
* * * * *
산행이 무게와 시간과 싸움이라지만
중요한 것은 몸 상태. 어제오늘 컨디션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내 페이스대로 홀산을 하니 크게 힘들지 않았다. 근래 산악회를 따라가면 초반에
늘 오버 페이스가 되어 고생을 했다. 작년부터 컨디션 회복이 잘 안 되는 것 같다.
수술 후유증은 회복되었는데, 자주 걸리는 감기와 일명 '테니스 엘보'라는
외측상과염이 문제다. 외측상과염은 6개월이 넘었는데도 나은 것 같다고도
계속 재발한다. 팔을 움직이기도 힘들 정도로 아플 때도 있다. 컴퓨터 마우스와 자판
두드리는 것도 하지 말라지만 지키기 어려운 요구다. 하긴 마우스 사용이 쥐약이다.
손을 안 써 보려고 이 와중에 '빅스비'와 '클로바'를 사용하는 것도 수확이라면 수확.
설날 지리산행은 코스를 변경하는 바람에 최단 거리로 쉽게 끝냈지만
산행한 이야기는 AI의 힘까지 보태어 오늘 겨우 정리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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