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1. 12. 18:38ㆍ山情無限/영남알프스
영남알프스, 장대한 기골과 불타는 단풍 숲
2019. 11. 9 (토) 맑음, 15℃
나 홀로
배내고개-배내봉-간월산-간월재-신불산-신불재-백련골
사람들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통과의례를 거친다.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것이 있고, 개인적인 것도
있을 것이다. 어느 때부터인지 정확하지는 않으나
나는 영남알프스의 억새와 단풍을 보지 않고는
가을을 보낼 수가 없었다. 통과의례가 된 것이다.
그것도 병이라면 병이다. 아주 중한..
배내골 백련마을에 주차하고
배내고개로 돌아오려고 바쁘게 차를 몰고 가는데
버스가 나오고 있다. 백련마을에서 9시 출발하는 줄
알았는데 언제 8시 40분으로 당겨졌지? 잘못 알고 있었나?
할 수 없이 배내고개로 돌아와 주차요금 3,000원을 내고
산중에 있어도 늘 그리운 영남알프스에 든다.
자녀와 함께 산을 오르는 가족을 보면 부럽고,
산에 든 젊은 친구들을 보면 마음이 흐뭇해진다.
부산서 온 젊은 친구들.. 단체 사진을 한 장 찍어 달라기에
몇 장을 찍어주고 배내봉을 향해 우마고도로 오른다.
중국 윈난성에 차마고도가 있다만 영남알프스에는
옛날 장꾼들이 지나던 우마고도가 있다.
여기에 언제 샘(?)이 생겼지?
이 길을 오른 지 오래되었다는 말이다.
부끄러우면서도 반갑고 고마운 마음으로
물 한 바가지 들이킨다. 속이 시원하다.
크게 정감이 가는 정상석은 아니나
한 장 찍으려니 그마저도 인증사진 찍을 산객들이
줄을 서 있어 그냥 셔트를 눌렀다.
영남알프스 봉우리마다 천편일률적인 인공미 철철
넘치는 허멀건 정상석으로 도배한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다.
도대체 산과 어울리지 않는 저 모습.. 얼마짜릴까!
꼭 두루마기 입고 톱햇 쓰고 넥타이 맨 모습 같다.
신불산 공룡능선이라고도 하는
칼바위 능선과 주암 심종태 바위,
영남알프스의 골계미를 잘 보여 준다.
아직 11월 초순인데.. 잎이 다 졌다.
여느 때 같으면 단풍이 든 모습이었을 텐데..
올해 유난히 잦았던 태풍과 가을비 탓이리라.
서운하고 허전한 맘을 위로라도 하는 듯, 곱게 물든
단풍이 등불을 켜고 밝은 얼굴로 맞아준다.
유장한 능선, 낙동정맥이다.
오늘 들머리 배내고개에서 영축산까지는
백두대간 태백의 매봉산 분기점에서 갈래 쳐 부산 몰운대를
향해 줄기차게 내달리는 낙동정맥이 영남알프스를
지나면서 크게 용트림하듯 치솟은 구간이다.
그래, 여기 조망이 일품이지.
크게 바쁠 것도 없어 배낭을 내리고 잠자리가
앉던 자리에 앉듯 나도 내 자리에 앉았다.
전면으로 보이는 간월산 북동쪽 사면은
잎을 떨구고 나니 화사함은 덜해도 오히려
골계미가 드러나 좋다.
따 따 따~ 어디서 사고가 발생했나?
헬기 한 대가 정적을 깨뜨리며 간월산 위를 날고 있다.
산이 좋더라도 너무 흥분하거나 정신줄을 놓을 일 아니다.
한 산악인이 그랬다.
'성공한 등반은 살아서 돌아가는 것이다' 라고..
그렇다. 8,000m 고봉을 등반하는 산악인이 아니어도
우리도 안전하게 무사하게 돌아가는 것이 산행의
최종 목표가 되어야 한다.
정말 아름답다. 숨이 멎을 것 같다.
산의 정경이 한이 없다. 말 그대로 산정무한이다.
이런 영남알프스가 인근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가야 할 간월산과 다른 산 가지 못할 때
자투리 시간에 오른다고, 늘 만만하게 여겼던
문수산과 남암산. 산밖에서 산을 제대로 보니
조금 미안한 맘이 든다.
선짐이질등을 지나 간월산을 오르다
등로에서 잠시 비켜난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산줄기, 줄기들.. 잘 정돈된 빗살 같다.
한 무리가 빠지면 또 한 무리가 몰려온다.
오늘 간월산 정상은 장날같이 번잡하다.
영남알프스 조망은 가히 일품이다.
간월산 내려가는 길
오늘 참 많은 산객이 산에 든 것 같다.
오르는 사람 내려가는 사람, 데크마다
전을 벌리고 있다.
간월산 규화목을 지나
간월재에 내려서니 시장통을 방불한다.
엄마와 보조를 맞추며 오르던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이 '엄마 힘들어?' 하면서 챙긴다.
정겹고, 대견한 모습.. 앞지르기 망설여 진다.
능선에 올라 첫 번째 데크에서 보는 모습.
영축산 뒤로 정족산, 천성산이 보인다.
영축산에서 좌측 능선으로 꺾어 내려선 낙동정맥은
정족산, 천성산을 지나고, 부산 금정산을 거쳐
몰운대로 향한다.
신불산 정상,
여기도 인증사진 찍으려는 산객들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린다.
날씨가 좋아 일망무제로 조망이 펼쳐진다.
영축산에서 이어지는 영축지맥 뾰족봉 시살등
뒤로 보이는 산이 토곡산. 그 뒤로 보이는 유장한 능선이
지리산 영신봉에서 갈래 쳐 김해 신어산으로 향하는
낙남정맥.
그리고
첩첩 산줄기를 아래로 거느리며
위엄있게 우뚝 솟아있는 지리산 천왕봉.
천왕봉을 보며 지리산 못 가는 아쉬움을 달래본다.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작은 목소리로
가만가만 산정(山情)을 나누는 산객의 모습이 정겹다.
이야기도 때와 장소를 가려 나눌 때, 상황에 맞는
이야기를 할 때 품격이 느껴진다.
철각들도 있는 혼신을 다해 신불산을 뛰어 오른다.
JSCENO가 주최한 2019 KOREA ALPS High Trail
영남알프스를 한 바퀴 도는 40km와 20km
400여 명이 참여했다고 한다.
마지막에 코스를 안내하던 리본을
진행자가 수거해 가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일부 산악회에서 길 안내하느라 등로에 뿌린
안내표시도 후미대장(?)이 다 수거해 가는 것이
산이 좋아 산에 든 사람의 기본 아닐까!
신불재에서 단풍을 맞으려 백련골로 내려선다
시간은 최대한 늦추되 15;45분까지는 백련마을에
도착해야 한다. 아침에 차를 백련마을에 주차했더라면
붉은색 머금은 태양이 사광으로 부드럽게 단풍 숲을 밝힐 때
지나갈 수 있을 텐데.. 아직 중천에 떠 있는 태양은
모든 색깔을 공평하게 다 드러내고 있는 시간이다.
기대를 접어야 하나
내려다본 백련골은 중턱까지 잎이 다 지고
빈 가지로 벌써 겨울과 맞설 준비를 하고 있다.
한발 늦은 것인가? 그럴 리가 없는데.. 하면서
잎 다 떨군 나무 사잇길로 내려서니 정념을 제대로
태우지 못한 듯 미련에 겨운 단풍이 지지도 못하고
가지에 매달려 있다. 황량한 숲에 그나마
산죽이 있어 생기가 돈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조금 더 내려서니 나목들 사이에서
빨간 잎으로 단장을 한 단풍나무 한 그루가
대표라도 되는 듯 반갑게 맞이한다.
내가 더 반가운데..
점입가경(漸入佳境)이다.
내려설 수록 숲이 왁자지껄해 지며
숲이 점점 환하게 밝아온다. 여기저기서
저 좀 봐주세요, 저도 좀 봐주세요 하면서 경쟁하듯
이쁜 얼굴을 내미는 것 같다.
그래 언제나 실망은 금물이다.
희망만이 사람을 살리고,
희망이 기적을 불러온다.
정말 궁금하다.
어디서 이런 고운 색깔이 스며들고 돋아날까?
감동해서 흘리는 눈물을 수분과 나트륨, 스트레스 호르몬,
기타 성분 몇 %라고 분석했다고 눈물의 진정한 의미가 설명되지
않듯, '푸른 잎이 엽록소가 파괴되면서 그동안 보이지 않던
다른 색소들이 드러나는 것이 단풍'이라고 사전적 설명으로는
단풍이 고운 빛깔로 물드는 것을 제대로 이해시킬 수 없다.
단풍이 이렇게 곱게 물드는 것은 설명 불가한 기적이다.
내가 살아 있는 자체도 기적이지만..
때로는 텅빈 휑한 길을 걷기도 하지만..
깊이 연모하던 임을 만난 듯 가슴이 쿵쾅거린다.
숨이 멎을 듯하다. 이럴수록 심호흡을 하고 진정하자.
아! 이제는 이 가을을
보내 주어도 될 것 같다.
마치 인상파 모네의 '수련 연작'을 보는 것 같다.
무어라 말씀하셨나
돌아서 옆을 보면
화들짝 붉히는 낯익은 얼굴
무어라 말씀하셨나
돌아서 뒤를 보면
또 노오랗게 흘기는 그 고운 눈빛
가을 산 어스름 숲속을 간다
붉게 물든 단풍 속을 호올로 간다
산은 산으로 말을 하고
나무는 나무로 말하는데
소리가 아니면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 하루해는
설키만 하다
찬 서리 내려
산은 불현듯 침묵을 걷고
화려하게 천자만홍 터뜨리는데
무어라 말씀하셨나
어느덧 하얗게 센 반백의
귀머거리
아직도 봄 꿈꾸는 반백의
철딱서니
단풍 숲속을 가며 / 오세영
시몬 너는 좋으냐? 밟힌 낙엽이 영혼처럼 우는 소리가..
노랗게 물들어 지구의 한 모퉁이를 밝히는
나뭇잎 하나도 우리에게 교훈하는 이 가을.
가을에는 누구나 시인이 되고 철학자가 된다.
나도 이 나뭇잎 같이 곱게 물들어
주위를 한 뼘만이라도 밝힐 수 있었으면..
숲에서 듣는 소리는 침묵의 변덕이고
이 단풍 숲의 모든 색깔도 초록의 변덕이다.
영남알프스에는 구절초가 가을을 알리고
억새와 단풍이 온 산을 단장한다.
올해는 유한히 영알의 억새도 단풍도
고군분투한 것 같다.
벌써
억새는 꽃술을 딸 시집보내듯 날려 보냈고,
단풍도 이별하였거나 떠나보낼 채비에 바쁜 산정.
가을 숲은 풍요로운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외롭고
쓸쓸하고, 고독한 참혹의 계절, 이별의 계절이다.
지나는 날들이 세월을 밀고 끌고 가면서 같이 가잔다.
이제는 정말 움켜잡아야 할 것 보다 놓아 주어야 할 것이
많은 것 같다.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점점 줄어든다.
움켜쥔 모래알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듯
바람이 떡갈나무 성성한 구멍으로 지나가듯
많은 것들이 시간과 함께 사라지고 있다.
산을 내려오면 끝날 줄 알았는데
끝나야 끝난 것이다. 여기에 정말
모네의 수련 같은 모습이 발길을 잡는다.
이제 더 붙잡지 마라.
버스 시간이 다 되었다니깐
푸른 잎을 각양각색으로 곱게 물들인
가을은 산모퉁이를 돌아가는 것 같다. 이제 가는
가을은 잎을 떨군 나목의 머리 위로 겨울을 불러 올 것이다.
해 지고 찬란했던 가을이 가듯, 달력의 남은 두 장도
낙엽처럼 떨어져 세월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산다는 것은 이별하기까지 사는 것.
눈부신 태양만큼이나 찬란했던 모습들
멀리서 바라만 보아도 가슴벅찼던
그 모습들마저도 곧 희미해 지겠지
떠나가는 가을 빛 같이..
남은 시간에 최선을 다할 이유가
여기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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