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앙코르 왓과 비엣남 하롱베이, 호치민의 비엣남을 다녀와서(3/3)

2009. 7. 12. 20:36여행/여행기




 


캄보디아 앙코르 왓과 비엣남의 하롱베이, 하노이를 다녀와서(3/3)

3. 비엣남인들의 영원한 벗 호치민의 유적지를 찾아






         ○ 여행지 : 캄보디아 앙코르 왓 / 비엣남 하롱베이
         ○ 일  정 : 2008. 6. 27. ~ 7. 2. (5박 6일)
            1. 08.6.27 (금) / 떠나는 날 : 울산 - 김해공항 - 호치민 - 씨엠립
            2.    6.28 (토) / 둘째날    : 씨엠립 앙코르 왓, 따 프롬,
            3.    6.29 (일) / 셋째날    : 씨엠립 톤레샵 호수 / 하노이 - 하롱베이로 이동
            4.    6.30 (월) / 넷째날    : 하롱베이 해상관광
            5.    7. 1 (화) / 다섯째날  : 하노이시 시내투어, 호치민 주석 유적지 관광
            6.    7. 2 (수) / 돌아오는 날 : 하노이 - 호치민 - 김해공항 - 울산







7. 1(화) / 비엣남인들의 영원한 벗 '호' 아저씨의 유적지를 찾아




(이틀동안 묵었던 하롱베이 '하롱드림' 호텔)





(비엣남 사람들은 아침식사를 길거리에서 간단하게 한다)





(카메라만 갖다대면 물건을 사라고 하여 몰래 찍다 그만 들켜 버렸다)





(하노이 가는 길에 비엣남의 지리와 역사 공부도 하면서)

비엣남의 지리와 역사, 문화에 대해 주마간산식 공부를 했다.
영원한 인민의 벗이면서도 추앙받는 호치민에 대한 설명에 존경심이 우러났다.
우리에게도 그런 지도자 한 분 있었으면 하는 부러움을 갇기도 하였으나
라이따이한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물론 공산당원이나 관료들은 큰 집을 가질 수 있다는데)

일반 주택은 폭 5m, 길이 20m의 땅에 6층까지 올릴 수 있다고 한다.
철저하게 정해진 면적의 땅을 임대받아 집을 짓는다.
땅은 50년 임대이고 집은 사유재산이라고 한다.





(비엣남은 벼농사를 4모작까지 한다고 한다,)

도로 좌우의 드넓은 들판에는 벼가 익어가는 모습도
보이고 한편에서는 모내기를 한 듯한 모습도 눈에 들어온다.
전 인구의 70%가 농사를 짓는데 농기구의 수입관세가
700%나 되어 농사는 대부분 전통적 수작업에 의존한다.

북부지역은 벼를 일년에 2모작 하고, 남부에는 4모작 한다.
두 벌 쌀, 즉 모내기하여 한번 생산한 다음 베어낸 줄기에서
다시 자란 이삭을 추수하는 두 벌 쌀은 쌀국수 재료가 된다.
비엣남에서는 53종류의 벼가 재배된다는데 쌀 수출국 세계 2위답게
80kg 한 가마에 3-4만이라면 우리의 1/4 수준아닌가?





('씨클로'를 타고 하노이 시내 투어)








(더운 날씨에 힘들어 하는 모습에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실내 분위기가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었다)





(하노이에서는 고급 레스토랑이라는 'Dong Son')

실내 인테리어를 청동제 유물들로 꾸며놓은 격조높은 레스토랑
'Dong Son'이 무슨 뜻인지 궁금하여 비엣남 역사를 찾아보니 역시...
비엣남 고대문화(청동기-초기철기) 시대의 '동 썬(Dong Son)문화'
(3000년 경 말기 청동기 초기 철기문화)를 뜻하는 것이었다.

"락 비엣(Lac Viet)족이 건설한 문화로 정교한 사회조직을
형성하고 채관기술, 야금술, 동광석의 제련기술을 보유하였다.
유적, 유물 분포지역이 홍하 삼각주 지역뿐만 아니라 응에(Nghe An)
지역까지 북부 비엣남 전역에 분포하였는데 난숙(爛熟)한 청동기 문화와
수도작 농업의 생산력을 바탕으로 최초의 국가인 '반 랑'국을 건국"
한 상당히 문화가 발달한 그 시대를 기리는 레스토랑이었다.





(하노이의 최고의 특급호텔인 대우호텔)





(비엣남 민중의 큰 별 호치민 유적지를 찾아서)





(먹을 수 있는 과일이라는데 이름을 잊어 먹었다)





(비엣남 인민의 영원한 벗 "호" 아저씨, 호치민 영묘)

독신으로 살면서 검소한 생활을 하였던 "호" 아저씨는
죽으면 시신을 화장하여 비엣남 전국에 뿌려 달라고 유언을
했지만 사후 방부처리하여 유리관 속에 안치되어 있다.

사망한지 40년이 되어 가지만 비엣남인들의 공경을 받고 있는
호치민은 하노이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영묘를 통해 꾸준히
참배를 받고 있다. 호치민의 영묘는 자국인들 외에도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호치민이 사망하기 전 비엣남 국민에게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했기 때문에 죽어도 후회는 없다.
다만 아쉬운 점은 국민에게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여 숙연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호치민 영묘 문 여는 시간
여름 : 오전 7시 30분부터 11시까지,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겨울 : 오전 8시부터 11시까지, 오후 1시 30분부터 4시까지
월, 금요일은 입장할 수 없는 날이어서 영묘는 입장은 못했다.





(현재도 주석이 집무를 본다는 주석궁과 유적들이 있는 유적지 들어가는 문)

하노이 주석구에 있는 호치민 유적지는
1954년 12월부터 1969년 9월까지(15년간) 호치민 주석이
기거하고 일했던 과정에 관련된 유적들을 잘 보존하고 있는 곳.
주석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고 호치민의 집무실 및
아름다운 주변을 산책하며 경관을 구경할 수 있다.

특히, 호치민의 검소하고 고귀한 품격을 표현하는
당시 생활모습과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전통가옥 나산(Nha San)을
살펴 볼 수 있는데 유적들은 아름답고 꽃 향기 가득한 공간에
잘 보존되어 있다. 수 많은 현지인과 외국인이 민족해방영웅의
생활모습을 보기위해 이 곳을 찾고 있다.





(대통령 주석궁이 햇빛을 받아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다.)





(의전용 차량, 평소에는 슬리퍼를 신고 걸어 다녔다고 한다.)





(호안키엠호수 주변에는 관광객과 내국인이 많이 찾는다)





(자세히 보면 나무줄기 같은데 하늘로 자라는 특이한 뿌리라고 한다.)





(호치민 주석이 1958년 5월부터 1969년 8월까지 생활했던 집무실)





(호치민 주석의 침실, 정말 검소하게 생활한 것 같다.)

호치민이 거주했던 집에는 식당과 부엌이 없다.
식사는 인민과 함께 어울려 먹었다고 한다.
"통일전쟁 당시 호언장담하기를 미국이 폭격을 아무리 해도
우리가 이길 것이다. 폭탄이 떨어진 자리에는 웅덩이가 생길 것이고
그 웅덩이에는 메기가 자랄 것이다. 우리는 그 메기로 배를 채우며
미국과 싸워 기필코 승리할 것이다
."라고...





(호치민 주석이 야외에서 집무하는 모습)

           <호치민 연표>

           1890년  5월19일 응우엔신꿍(Nguyen Sinh Cung: 호치민의 어릴때 이름)이
                           응에안(Nghe An)주 호앙쭈(Hoang Tru)지방에서 교육자 가정에서 태어남.
           1905-1910까지   6년간 후에에서 초등학교(Truong Quoc hoc Hue)를 다님.
           1911-1917까지   삶을 개척하기 위해 비엣남을 떠남.
                           프랑스로 가는 배에 몸을 싣고 주방일을 한며 파리에서는 사진사로 일함.
           1918년          프랑스 사회주의 당에 입적.
           1919년  1월     이름을 응우엔아이궉(Nguyen Ai Quoc)으로 바꾸고
           국제평화회의에  처음으로 비엣남민족의 자유혁명을 정치선언문으로 발표.
           1920년  7월     처음으로 민족과 식민지 문제에 관한 레닌(Le-Nin)의 책을 접하고
                           국제공산활동을 중단.
           1920년12월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의 모임에 처음으로 참석.
                           이 모임을 통하여 프랑스 공산당이 창립되고
                           호치민은 비엣남 역사상 처음으로 공산당원이 됨.
           1924년  6월     모스코바에서 제5차 국제공산당 회의에 인도차이나 공산당 대표단으로 참석 
           1925년  6월     비엣남 청년혁명동지회(Viet Nam thanh nien cach mang dong chi hoi)를 창설. 
                           이후 인도차이나공산당의 모체가 된다.
           1930년  2월 3일 홍콩에 거주하는 비엣남 공산주의자들을 규합하여
                           처음으로 비엣남 공산당(Dang cong san Viet Nam)을 창설.
                           이후 당이름을 인도차이나공산당(Dang cong san Dong Duong)으로 개명함.
           1935년  8월 7일 제 7차 국제공산당 회의에 참석.
                           이 회의를 통해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정식 국제 공산당에 가입.
           1941년  2월 8일 30년간의 외국생활을 청산하고
                           비엣남 중부 국경 팍보(Pac Bo)지방을 통하여 입국.
           1944 - 1945년   무장 혁명봉기를 준비하기 위해서 1944년 12월 22일 비엣남 선전 자유군
                           (Doi Viet Nam tuyen truyen giai phong quan)설립 명령 하달. 
                           이후 이는 비엣남 인민군대의 기본 모형이 되었다.
           1945년  8월16일 호치민은 민족해방 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고
                           이 회의에서 무력 항쟁 결의.
           1945년  9월 2일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독립선언문(Tuyen ngon doc lap)을 발표,
                           비엣남 민주 공화국(Viet Nam Dan chu Cong hoa)을 세우게 되었다.
                           이로써 동남아지역에서 처음으로 노동자의 나라를 만든 역사적 의의를 갖게됨.
           1946년  3월 2일 첫 번째 국회(Quoc hoi)에서 호치민은 비엣남 민주 공화국의 국가주석과
                           수상에 선출. 그리고 10년간 수상의 직분을 감당.
           1946년 12월20일 하이퐁만 관세에 관한 법적권리를 둘러싸고 비엣남과 프랑스인사이의
                           협상이 결렬되자 비엣남은 비엣남 전역에 걸쳐 프랑스와 무력 투쟁을 결의.
           1950년  9월     러시아와 그외 사회주의 국가관의 직접적인 교류, 홍보가 성공하여
                           처음으로 러시아와 협력관계를 맺음.
           1951년  2월     인도차이나 공산당(Dang cong san Dong Duong) 제 2차회의에서
                           모든 당의 명칭을 비엣남노동당(Dang Lao dong Viet Nam)으로 바꾸고
                           승리의 날까지 더욱 강하게 뭉치자는 정치선언함.
                           이 모임을 통하여 호치민은 중앙 비엣남노동당 집행 위원장을 맡는다.
           1954년  7월22일 인도차이나의 평화를 위한 제네바협정에 따라 남북을 잠정분할하는데 합의.
           1955년  6월     비엣남 민주 공화국 정부, 당대표를 이끌고 러시아와 각 사회주의 나라를 탐방.
           1960년  9월     제 2차 비엣남노동당 회의에서 2가지 개혁임무를 발표.
                           첫째, 북쪽에 사회주의 공화국을 건설한다.
                           둘째, 억압받는 남쪽을 해방시켜 전국 평화통일을 이룩한다.
                           이 모임을 통해서 호치민은 계속해서 중앙 비엣남노동당 집행 위원장으로 선출.
           1964년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북폭 등 미국 전면 개입
           1965년  4월     비엣남 민주공화국의 주석으로 선출.
                           이 회의에서 호치민은 모두다 미국과 맞서 싸워 조국을 구하자!
                           (Tat ca cho cuoc dau tranh chong My, cuu nuoc!)라고 선언함.
           1969년  9월 2일 오전 9시 45분 중앙 비엣남노동당 집행 위원장이자
                           비엣남 민주공화국의 주석인 호치민 사망.
                           중앙 노동당 정치부는 호치민의 시신을 보전할 무덤을 만들 것을 결정.
           1975년  4월26~30일 북비엣남군, 사이공 총공격, 남 비엣남 무조건 항복
           1975년  8월29일부터 호치민 주석은 광쯩광장에 세워진 묘소에서 고이 잠들게 됨.
           1976년  7월     비엣남 통일. 비엣남 민주공화국 -> 비엣남 사회주의공화국 국호 변경.





(1962년 6월 2일, 호치민은 격정의 삶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는 죽어서도 아시아 피압박 민중들에게 희망을,
총칼로 식민지 영토를 확장해 온 세계 열강들에게는 충격과 좌절을 안겨준
불멸의 전사였다. 색바랜 노동복에 왜소한 체구, 마른 발엔 언제나 낡은
타이어를 잘라 만든 샌들을 신었던 호치민. 그의 남루한 초상앞에서
베트남 인민들은 오늘도 경배를 하며 자리를 뜨지 못한다.

프랑스와 세계 최강 미국을 연이어 격퇴시킨 혁명가이자
불멸의 전사 호치민, 베트남 군대의 수장이자 국가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던
그가 남겼던 유품은 지팡이 하나와 옷 두벌, 다산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를 비롯한 몇 권의 책이 전부였다.





(호치민 박물관 / Bao Tang Ho Chi Minh)

꼭 들리고 싶었던 호치민 박물관을 들리지 못하다니...
호치민 박물관 출입시간도 영묘 출입시간과 같다고 한다.





(가이드가 열심히 설명을 했는데 무슨 건물인지...)





(한국의 위력, 아니 한글의 위력은 대단했다.)

캄보디아에서도 한글이 쓰여진 자동차를 많이 보았는데
비엣남에서는 캄보디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한글이 쓰여 있는
차가 많았다. 차의 종류만큼이나 내용도 다양했다. 본토에서는 제대로 대접도
못받는 한글이 적어도 캄보디아와 비엣남에서는 제대로 대접을 받고 있었다.
한글이 그대로 쓰여 있어야 차를 팔 때도 제 값을 받을 수 있다고 하니...
한글이 곧 돈이었다. 하롱베이에서는 현대, 롯데백화점 버스도 만나고
하노이에서는 울산행 우등버스도 만났다. 카운티 버스에 "개별화물"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사람을 화물취급하는지... 그것도 "물"자를 "롬"으로 써
"개별화롬"이 되었는데도 그건 대수가 아니다. 한글이면 무조건 된단다.
그런데 이 차는 귀한 한글이 지워지고 있으니 어쩌지...





(비엣남에도 한류열풍이 대단..., 가수 '비'의 포스터가 시내 중심가 몇 km에 걸쳐 걸려 있다)





(하노이 공항에서 호치민 탄손누트 공항으로, 탄손누트 공항에서 김해로...)





(일출을 찍으러 좌석까지 바꿨는데... 대만상공 저 아래 운해가 자욱하다.)





(07:30, 날개를 비틀며 김해공항에 내렸다)



이번 여행은 '신 7대 불가사의'를 찾아봐야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두번째로 시도한 곳인데 때가 잘 맞은 것 같다.
원래 여름휴가 때 가려던 것을 성수기를 피해서 가니 경비도 많이
절약되었고 여행지에서도 혼잡하지 않아서 좋았다.
이번 여행 도중 배탈이 나서 고생을 하고 돌아와서도 그 후유증으로
고생했지만 여행에서 건강에 조심해야겠다는 값진 교훈도 얻었다.

특히, 이번 여행에서 불가사의한 앙코르 왓의 신비와
에메랄드빛 호수같은 바다 위에 보석을 뿌려놓은듯 솟아있는 섬, 섬들...
그 섬사이로 유람선을 타고 비경을 즐긴 신선놀음의 환상적인 관광과는
또 분위기가 판이한, 인간이 얼마나 잔혹할 수 있는가를 확인한 킬링필드,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에 맞선 인격적인 혁명지도자가 이끈 통일전쟁,
그 통일전쟁에 끼어든 한국, 그리고 그 틈바구니에서 발생하는 라이따이한,
많은 것을 생각케 한 결코 가볍지만 않은 의미있는 여정이었다.
미국의 사상가 애머슨이 "위대한 지도자야말로 모든 인간성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다
"
라고 했듯 좋은 지도자를 세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사이공의 흰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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