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7. 12. 20:46ㆍ여행/여행기
캄보디아 앙코르 왓과 비엣남의 하롱베이, 하노이를 다녀와서(1/3)
1. 앙코르 왓의 신비와 킬링필드의 악몽이 공존하는 캄보디아
○ 여행지 : 캄보디아 앙코르 왓 / 비엣남 하롱베이 / 하노이
○ 일 정 : 2008. 6. 27. ~ 7. 2. (5박 6일)
1. 08.6.27 (금) / 떠나는 날 : 울산 - 김해공항 - 호치민 - 씨엠립
2. 6.28 (토) / 둘째날 : 씨엠립 앙코르 왓, 따 프롬,
3. 6.29 (일) / 셋째날 : 씨엠립 톤레샵 호수 / 하노이 - 하롱베이로 이동
4. 6.30 (월) / 넷째날 : 하롱베이 해상관광
5. 7. 1 (화) / 다섯째날 : 하노이시 시내투어, 호치민 주석 유적지 관광
6. 7. 2 (수) / 돌아오는 날 : 하노이- 호치민 - 김해공항 - 울산
6.27(금) / 떠나는 날, 호치민시를 거쳐 씨엠립을 향하여
(드디어 비엣남 땅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호치민 탄손누트 공항'에 내리기 위해 비행기는 고도를 낮춘다)
김해공항에서는 '앙코르 왓'이 있는 캄보디아 씨엠립까지 가는
직항편이 없어 '호치민 탄손누트' 공항에서 Transit하여야 하는데
공항은 얼마 전에 확장을 하였다지만 운영은 좀 그렇다.
처음 이용하는 분들은 조심을 하여야 할듯...
씨엠립행 탑승게이트가 처음에는 17번이라 하여 찾아 갔더니
다시 2번 게이트로 변경되어 끝에서 끝까지 옮겨 갔는데
잠시 후 다시 17번 게이트로 변경되어 되돌아 왔다.
(호치민 공항에서 Transit하여 씨엠립 가는 길에...)
(드뎌 씨엠립 공항에 내렸는데 40도 가까운 날씨, 후끈한 지열에 숨이 막힌다)
비엣남은 15일 무비자 입국이지만,
캄보디아는 공항에서 20$를 주고 입국비자를 발급받아야 한다.
비자 발급받는데도 급행료 1$를 주지 않으면 순서가 뒤로 밀린다는데
가이드가 미리 급행료를 지불한 듯 제대로 비자가 발급되었다.
원 참! 자기 나라에 입국하는데 팁을 요구하다니...
(이틀동안 묵을 호텔에 여장을 풀고... 꽤나 시설이 좋다.)
(저녁 먹은 식당에서의 캄보디아 민속공연)
저녁은 '톤레샵 레스토랑'에서 '마스터 수끼'라는 메뉴로
먹고 싶은 야채와 고기, 면 등을 담아서 갖다주면 그것을 끓여 준다.
캄보디아 음식은 특색없는 여러나라 음식을 다 모아 놓은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 일본, 중국 관광객들이 다 보였다.
식사를 하면서 캄보디아 민속공연 '압살라 춤'을 보는데...
힌두교 신화에서 유래한다는 '압살라 춤'은 이후 앙코르 유적지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지만 수 천 수 만의 압살라 중 같은 것은 없었다.
표정과 머리장식, 옷 주름 등이 모두 조금씩 다르다.
부조속 천상의 여인들이 세상 밖으로 나온듯 하지만
짙은 화장과 화려한 의상의 무희들은 표정이 없다. 박제된 것 같다.
화려했던 옛 앙코르 제국, 그러나 지금의 캄보디아 현실은
과거의 영광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어서 부조속 압살라를 재현한
이 춤을 보는 느낌이 그리 즐겁지만은 않았다.
6.28(토) / 앙코르 왓, 따 프롬, 바이욘 사원
('앙코르 왓' 관광은 먼저 줄 서서 증명사진부터 찍고...)
'앙코르 왓' 입장하면서 무슨 증명사진 촬영이냐구요?
이전에는 입장권만으로 입장을 하였다는데 어느 때부터 입장객은 늘어나는데
입장권 판매는 늘지않아 조사를 해 보니 입장권이 부정 사용되고 있었다고,
이렇게 증명사진을 찍어 종일 목에 매달고 다니게 했다고 한다.
(하루동안 가슴에 달고 다녀야 할 입장증명서)
본인 얼굴이 들어간 신분증을 종일 달고 다녀야 한다.
입장료 인당 20$, 사진이 들어간 신분증이 채 3분도 안되어 나온다.
(멀리서 볼 때는 돌무더기같더니 가까이 다가가자 본색을 드러낸다)
앙코르에는 수 많은 유적들이 널려 있지만
그 중 제일 유명한 '앙코르 왓'은 '사원의 도시'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많이 훼손되었지만 웅장하면서도 정교한 모습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햇살이 따갑다. 햇볕도 가려야 하고 비도 피해야 하고...)
(거대한 벽면 가득한 부조)
신화와 역사를 그림으로 표현해 놓은 것이라는데
그림 하나 하나를 뜯어보면 얼마나 정교한지. 절로 감탄한다.
예를들어 행군하고 있는 군인들 발걸음 마저도 선두는 느긋하고
후미는 달리듯 빠르게 움직이는 모습까지 묘사해 놓았다.
(1층 서쪽 회랑의 부조, 기둥에도 부조가 새겨져 있다)
(밖은 지열에 숨이 막히지만 안은 바람까지 불어 시원하다)
(남쪽 회랑 벽면 가득한 부조, 끝이 없다.)
거대한 산 같은 석조물을 현대의 첨단기술로 설계를 한다고 해도
상당한 기간이 걸린다는데 설계도가 한 장도 없다는 것이 놀랍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놀라운 것은 건축물 전체를 장식하고 있는
부조가 한 사람의 솜씨라는 것이다. 불가사의 중 불가사의가
바로 일의 량의 계산할 수 없는 이 부조라고 한다.
(15)
(곳곳에서 복원을 하고 있지만, 70% 정도는 복원이 불가하다고 한다)
(보면 볼 수록 감탄사가... 돌을 어떻게...)
(제3회랑 오르는 계단, 신들의 세계는 출입을 금지시켜 놓았다.)
제1회랑은 축생계, 즉 짐승들의 세계로 215m X 187m 높이는 4m,
제2회랑, 지금 서 있는 곳은 인간의 세계. 115m X 100m로 높이는 12m,
제3회랑 신계는 60m X 60m의 정방형에 높이가 25m나 되는데
가팔라서 기어 올라가야 한다. 그러나 얼마전 신들의 세계로 오르던
관광객이 떨어져 사망하는 바람에 지금은 출입을 금지시키고 있다고 한다.
안전하게 오를 수 있도록 보완을 한 후 출입을 허용할 모양.
(40도 가까운 날씨지만 그늘에 바람까지 부니 시원하다)
캄보디아를 방문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로
이 '앙코르 왓'을 보기 위해서 방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듯 하다.
어떻게 보면 캄보디아의 전부가 되어버린듯한 이 앙코르 유적들은
각 국의 많은 관광객들을 캄보디아로 불러 들이고 있다.
(6개월 전부터 3층은 올라가지 못하게 출입을 통제하고 있단다)
(21)
('앙코르 왓'은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이 건축물을 축성한 앙코르왕조는 13C 말부터 쇠망하기 시작하여
15C 경에는 완전히 멸망하여 '앙코르 왓'도 정글 속에 묻혀 버렸다.
1861년 표본채집을 위해 정글에 들른 프랑스 박물학자가 이곳을 발견,
그 때부터 다시 알려졌다. 그러나 이 지역은 1972년부터 외부인에게 폐쇄된
이후 낮이면 베트남군이, 밤에는 크메르루지의 게릴라가 번갈아 장악하면서
전화(戰禍)와 약탈로 훼손되어 수 많은 유물들이 조각난 채 나뒹굴고
대부분이 외국으로 유출되어, 완전한 복구는 어려운 상태이다.
현재는 '앙코르 왓'의 중요 유물 상당수가 없어졌고,
전체 유적의 70%가 복원불능의 상태로 파괴되었으며,
사원 근처 왕궁의 유물 약 1,000점이 도난, 파괴되었다.
유네스코에서는 1983년 이 유적지의 복원을 위해
조사단의 파견을 캄보디아 당국에 통보한 바 있다.
(동문쪽에서 바라본 '앙코르 왓'의 자태)
'앙코르 왓'은 크기로도 유명하지만 단일설계도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것이 놀랍다. 30년이 넘는 공사기간 동안 수없이
변경되고 증축되었을 텐데도 초기의 설계에 어긋남이 없다.
배치도, 대칭도, 구조도, 조화도 등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함을 자랑한다.
또한, '앙코르 왓'이 사원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다양한
건물들의 결합체로서 갤러리, 방, 별실, 탑, 정원, 중정,
연못, 성벽, 탑문 등 등 어느 하나도 구색을 갖추기 위해
지어진 것이 아니라 있어야할 곳에 배치되어 있다.
그래서 건축 완성도가 완벽하다고 평가 받는다.
외벽에는 무려 1,500명 이상의 압살라들을 새겨 놓았는데
단 하나도 동일한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하고 다양하다.
넓이와 높이의 비율을 맞춰 경사도 가파른 계단으로 높은 층의 공간을
메운 기법도 그러하고 중간층으로 공간을 메꾸어 상하층을 연결하는
기법 또한 그 옛날의 기술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사각형의 기단에서 시작, 자연스럽게 원추형으로 변하여
전체적으로 한송이 연꽃 모양으로 피어나는 탑의 빼어난 미는
앙코르 왓 건축 양식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다.
(툭툭이를 타고 가다 잠시 나무 그늘 밑에서 쉬고 있는 관광객)
(지뢰 부상자들의 몸부림, 우리가 다가가자 아리랑을 연주해 주었다.)
1, 2차 킬링필드와 긴 내전을 거치면서 수 없이 매설한 지뢰.
그나마 금속지뢰는 탐지가 되어 회수할 수 있지만 프라스틱 지뢰는
속수무책이라고 한다. 아직도 큰 비가 오면 비에 쓸려 내려오는 지뢰에
수 많은 캄보디아인들이 부상을 당한다고 한다. 지뢰는 흔히 하는 말로,
운이 좋으면 죽고, 운이 없으면 다리를 절단하다 죽는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비무장지대에 쏟아부은 지레를 생각하면
남의 일만이 아닌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지뢰 부상자들은 절망을 딛고 관광객들에게 연주를 하며
직접 노력하여 돈을 벌겠다고 나선 것이라고 한다.
팁이래야 고작 팀당 1~2달러에 지나지 않지만...
(기름이 나는 나무, 황금알 낳는 오리잡듯 기름나무를 벌목하여 팔고 있다고 한다)
송진 채취하듯 나무의 표피에 흠집을 내어 놓으면
수명이 다할 때까지 기름을 채취할 수 있다고 하는데 눈 앞의 얼마되지 않는
돈 때문에 나무를 그만 벌목한다고 하니 안타깝기만 하다.
('SUPUNG나무', 나무를 치면 북소리가 난다)
기름나무와 함께 '왕코르 왓'에서 인상깊게 본 '스펑나무'.
이 나무가 바로 '따 프롬 사원'을 폐허로 만든 장본인이다.
(사원을 휘감고 있는 스펑나무)
예정되어 있던 '반데스레이 사원' 대신
'안젤리나 졸리'의 액션이 돋보였던 '툼레이더'의 촬영지
'따 프롬'으로 갔다. '따 프롬'이란 '브라마의 조상'이라는 뜻으로
자야바르만 7세가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세운 사원이라는데 수백년 방치되는 동안
스펑나무가 자라서 사원의 벽과 지붕에 뿌리를 내려 감싸안거나 무너뜨렸다.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한 사원은 더 이상 복원이 불가능한 상태.
자연의 힘은 아름답고 거대한 사원을 무너 뜨렸다.
(사원이 나무를 받치고 있는지 나무가 사원을 받치고 있는지...)
(나무 속에서 나무가 자라고 있는 모습)
(이제 나무와 사원이 하나가 된듯...)
무너진 사원의 복구는 고사하고 고작 나무의 성장속도를 줄이기 위해
성장억제재를 투여하고 있다고 하지만 사원의 구조가 돔 형식이어서 아래쪽
돌 하나만 빠져버려도 건축물이 쉽게 무너져 버린다고 한다.
(차에 오르자 마자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따 프롬'을 돌아보고 나오려는데 경험많은 가이드가
'곧 비가 쏟아질 것 같다'하여 하늘을 보니 비가 묻어 오는 것이 보였다.
차가 있는 남문쪽으로 막 달렸다. 차에 타자마자 소나기가 쏟아진다.
뒤 따라 오던 일행들은 그만 비에 옷이 다 젖고 말았다.
오늘 2시에 비가 오면 내일도 정확히 2시면 비가 온다고 한다.
그러기를 몇일 계속하다 또 시간이 조금씩 바뀐다고 한다.
(BAYON / 바이욘 사원)
'앙코르 톰(Angkor Thom)'
12C 말 ~ 13C 초 자야바르만 7세가 지은 '바이욘 사원'은
'앙코르 톰'의 중심으로 '앙코르 왓' 북쪽 1.7킬로미터 지점에 있다.
크메르 왕조의 마지막 수도인 '앙코르 톰'은 '앙코르 왓'을
축성한 시대의 앙코르보다 훨씬 거대한 도시였다고 한다.
'앙코르'는 '도시'를, '톰'은 '크다'는 뜻으로, '앙코르 톰'은
'왕도'라는 뜻. '앙코르 톰'은 '앙코르 왓'과 함께 앙코르 문화의
쌍벽을 이루는 곳으로 '앙코르 왓'에서 북쪽으로 1.5km 떨어져 있다.
가로 3km 세로 4km인 장방형 모양인 '앙코르 톰'은 높이 8m로 홍토석
라테라이트 성벽과 너비 약 100m의 수로로 둘러싸여 있다.
'앙코르 톰'의 중앙 사원인 '바이욘'은 크메르 왕조가 붕괴되기 직전인
1200년 자야바르만 7세에 의해 세워진 앙코르 사원 중 최후의 사원이다.
인구 100만, 사방 10km로 뻗어가던 도시였으나 현재는 석조물 만이
옛날의 영광과 상처를 가늠케하고 있다.
(34)
'바이욘 사원'은 멀리서 봐도 매우 낡아 보인다.
실제로 석재의 차이에 따라 어떤 돌들은 풍화 작용이 심했다.
벽면의 조각은 그나마 화강암을 사용하여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
(35)
'바이욘 사원'은 앙코르 유적지 중 불교사찰로 가장 큰 규모.
남쪽으로 '바이욘 사원'에서 5분쯤 걸어가면 '바푸온 사원'이 있는데,
우다야바르만 2세가 1060년에 세웠으며 이곳은 힌두교의 사원이다.
양식은 바푸온 양식이고 현재는 복원중인데 깨진 돌을 일일이
맞추어 가야 하기 때문에 많은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다.
'바이욘 사원'은 자야바르만 7세가 전승을 기념하고
전사자의 영령을 제사하기 위해 건립하였다고 하는데
남북 140m, 동서 160m의 회랑과 보조회랑으로 된 복잡한 구조다.
이 건조물의 옥상에는 4면에 '큰바위 얼굴' 51기가 서 있다.
건축의 외측 벽면에는 부조로 당시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역사적인 사건 등이 그려져 있다.
거대한 공사과정에서 과도한 세금과 노동력의 착취로
인해 대제국의 국력도 쇠퇴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을 것이다.
또 얼마나 많은 노예와 민중들의 죽음과 피가 뿌려졌을까?
앙코르 왕조의 종교적 역량을 과시한 것이 '앙코르 왓'이라면
국가적 역량을 과시한 것이 바로 '앙코르 톰'이다.
(앙코르 왕궁, 외부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내부는 완전 미로라고 한다.)
(왜 안사!)
5살이라고 한다. 왕궁입구에서부터 계속 따라 오면서
'언니 예뻐', '아빠 멋쟁이' 하며 '부채 하나 원달러'라 줄기차게 외친다.
그냥 돌아 갔으면 좋으련만 집요할 정도로 달라 붙길래 신경이 쓰였는데
자기들 끼리도 정해진 구역이 있는지 오던 길을 돌아서면서 하는 말
'왜 안-사!' 그 소리를 듣고는 기겁을 했다.
(왕궁 복원작업, 지상 최대의 퍼즐게임)
문화재 최대의 도적은 고고학자, 고대유물 발굴학자(?).
이미 상당수의 중요한 유물을 프랑스가 가져 간 것은 주지의 사실,
그나마 훼손된 유물을 복원하다 내전으로 중단하였던 작업을 진행하러
다시 돌아와 보니 유물복원 작업에 참여했던 2,000여 명의 캄보디아인
모두가 내전중 살해 당해 복원내용을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지금은 복원작업에 참여할 사람도 없는 실정이라는 군요.
(중간 휴게소에 들러 시원한 야자수도 하나씩 마시고...)
(1달러짜리 물건 종류도 많다. 맘씨좋은 거제 사장님이 대표로 걸렸다)
(오늘 저녁은 평양랭면관에서...)
(얼마나 애닲게 부르는지... 흘러간 그 옛날에 내님을...)
(누가 남남북녀라 했는가?)
(평양랭면으로 저녁을 먹고 툭툭을 타고 시내투어)
오토바아 뒤에 인력거를 단 교통수단 툭툭(Tuk Tuk)을 타고
시내투어를 하면서 노래방 시설이 되어있는 조그만 카페를 찾았다.
(연주하는 사람들이 가족들인듯...)
(진행자는 팝송은 물론, 우리나라 노래도 많이 알고 있었다.)
6.29(일) / 바라이 호수, 톤레샵 호수, 제2의 킬링필드 와트마이 사원, 그리고 하노이로
(세계 최대의 인공호수 바라이 호수 가는 도중의 난장)
(망중한)
(이 어린이들은 한국말은 물론 한국동요도 발음이 정확하게 불렀다)
('톤 레삽' 호수변의 수상촌)
(수상촌에는 학교도 있고 교회도 있다.)
태극기가 걸려있는 이 건물은
경북 칠곡교회에서 지원하는 수상촌교회.
정말 이런 곳이 선교의 현장이 아닐까?
(부레옥잠이 많이 떠 내려와 배가 이동하기에도 힘들다)
캄보디아 사람, 비엣남 사람이 어울려 사는 수상촌.
청색집이 베트남인들 집인데 그들은 베트남 전쟁 때 피난 온
소위 보트피플들로 '톤레샵' 호수 주변에만 약 2만 여 명이 모여
산다고 한다. 캄보디아인들보다는 잘 사는 것 같았다.
('톤레샵'은 호수라기 보다 망망대해 같다)
우기 때는 호수면적이 건기 때의 3배로 늘어나 범람한다고 한다.
톤레샵 호수는 담수호로 아래쪽의 톤레샵 강이 동쪽의 메콩강과 합류하는데
우기 때는 유속이 느린 메콩강의 물이 톤레샵 강으로
역류하여 호수를 범람시키게 한다.
(이 물로 설겆이를 하고 심지어 식수로도 이용하는데... 화장실 바닥도 강이다)
(물이 차면 이런 집들은 집채로 이사를 간다고 한다.)
(국민소득 300$, 이런 집은 그나마 나은 편이라 한다)
(전봇대 모습, 전기는 일본전력회사가 공급한다고 한다)
(제 2킬링필드 '와트 마이' 사원에서)
점심을 먹고 킬링필드 '와트 마이' 해골사원을 방문했다.
이틀동안 고대와 현대의 캄보디아를 오가며 안내하던 가이드는
1963년부터 1972년까지 비엣남 전쟁과 관련한 캄보디아의 운명과
1975년에서 1979년에 이르기까지 크메르루주의 참혹한 동족말살
내전의 참상을 눈물겹게 설명한다.
'와트 마이' 사원은 캄보디아의 현주소로 지식인들의 무덤.
선생부터 시작하여 지식인 모두를 말살하려했던 킬링필드,
오히려 사람들에게는 영화 속 장면으로만 기억하고 싶은
캄보디아 대학살의 현장. 그 현장 속에 숨겨졌던 유골들을 보면서
당시 폴포트가 추구했던 친미 세력과의 단절정책과 유토피아
대상 숙청이 얼마나 잔혹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1988년 '지식인들의 무덤'을 추모하는 사원이 건립되면서
위령탑이 설립되고 당시 정글속에 묻혀있던 해골이 공개되었다.
천년 전, 30년 넘게 수야바르만 2세가 지었던 신의 궁전,
12 ~ 13C 자야바르만 7세가 새겼던 신의 미소는 어디로 가고
저주의 땅이 되었는가? 힌두교와 불교의 절정을 이뤘던 땅이
동족의 말살로 드넓은 평야를 피로 물들인 캄보디아의 역사,
그들의 신은 살았는가? 죽었는가?
(유골을 그대로 보관하고 있는 전시관)
간단하게나마 캄보디아 역사를 살펴보면,
1431년 크메르제국은 시암, 즉 타이의 공격을 받고
수도 앙코르에서 동남쪽에 위치한 프놈펜으로 수도를 옮겼다.
19세기 중반기 ~ 후반기에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
1861년 프랑스의 탐험가 앙리 무오가 숲 속에서 거대한 사원을 발견했다.
1953년 프랑스로부터 완전 독립을 달성. 국명은 캄보디아 왕국이었다.
1970년 론놀의 친미 쿠테타로 캄보디아왕국은 무너지고 캄보디아 공화국이 된다.
1975년 공산군이 정권을 잡은 후 민주 캄푸치아로 바뀌고 공산주의 국가가 된다.
캄보디아에서 7명 중 2명 가까운 당시 200여 만명이 죽었다.
1979년~89년 비엣남이 침공해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이라는 정권을 세웠다.
1989년~93년 비엣남군이 철수한 후 캄보디아국으로 되었다.
1993년~현재 유엔의 감시 아래 치러진 선거로 다시
입헌군주국 캄보디아 왕국으로 바뀌었다.
내전은 1980년대 말까지 계속되었는데
당시 중립국이던 캄보디아가 북비엣남을 지원할까 염려한 미국의 폭격으로
친미정권의 공산주의자 학살(제1차 킬링필드), 그에 이은 원리주의 성격의
공산주의자였던 크메르루주에 의한 반대파 학살(제2차 킬링필드)은
이 나라 국민들에게는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었다.
서방기자가 '폴 포트'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여야 했는가?"
그러자 '폴 포트'는 태연하게
"언제 그런 일이 있었어요?"
(사고, 교민회장이 전화를 하는 것으로 봐서 한국인이 사고를 낸 것 같다고 한다)
(짧은 여정, 씨엠립을 떠나 하노이로, 하롱베이로...)
분명히 18시에 비행기가 이륙하게 되어 있었는데
30분이나 일찍 이륙한다. 첫날 호치민 탄손누트 공항에서는
탑승게이트를 이리 저리 옮겨 다니게 하더니만 씨엠립 공항에서는
예정시간보다 항공기가 일찍 이륙해 버렸다.
그런데 탈 사람은 다 탑승한 것같다.
(상공에서 본 씨엠립 주변 모습)
(티벳에서 발원하여 캄보디아를 지나는 메콩캉)
길이 4,020km, 티베트에서 발원하여 미얀마, 라오스, 타이,
캄보디아, 비엣남을 거쳐 남중국해로 흐르는 강으로 동남아 최대의 강,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큰 강이다. 하류의 삼각지가 유명한다.
(석양에 물든 하늘을 날아 하노이로...)
앙코르의 찬란한 문화와 신화도 빛을 바래고
킬링필드의 악몽, 문맹률 90%, 가난과 기아, 질병의 굴레
속에서 살아가야하는 캄보디아인들의 운명. 잿빛으로 느껴지는
현재의 모습들, 그 원인을 찾고 현 상황을 탈피하기에는
갈 길이 너무 멀고도 힘겨워 보인다.
그 옛날 앙코르의 영화와 풍부한 자원을 갖고도
정치집단의 잘못된 소신이 국민을 얼마나 깊은 질곡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가를 실감한 캄보디아에서의 이틀밤 사흘낮.
주마간산식으로 스치듯 본 광경들이지만 마음이 무겁다.
하루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라며
캄보디아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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