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8. 16. 23:35ㆍ여행/여행기
습지위에 세운 짜르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문학과 문화와 예술의 도시)
그래 북유럽에 가면 '그리움의 원천을 찾을 수 있을까?'고
그러려면 찬찬한 시간과 약간의 고독, 그리움을 담을 포대도 챙기고..
그러려면 배낭 하나 메고 훌훌히 바람같이 떠나는 것이.. 말이 배낭여행이지
언제나 로망이고, 아프리카 종단 배낭여행은 버킷리스트에 들어 있다.
여행은 나를 완성시키는 인생 공부.. 각설하고 일단은 떠나고 보자!
여행은 이도관지(以道觀之)에 이르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호접몽에서
그나저나 그리움의 고향이 북유럽 맞을까?
거기서 만날 수 있을까?
(저녁 9시가 넘은 시간인데도..)
오는 길에 해넘이를 잡아보려 했지만
구름으로 해를 볼 수 없었는데 생각지도 않게 풀코보 국제공항
(LED,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제공항)에 내려 버스를 기다리는데 석양이
눈을 의심하게 한다. 이 시간에 이렇게 멋진 노을로 반겨 주다니..
북위 60도에서 보는 석양은 역시 별스럽구나.
(마치 큰 불이라도 난 듯..)
러시아에 대한 선입견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공항에서 대하는 사람들이 거의 모두 무뚝뚝한 모습이다.
그런 거니 했는데.. 처음으로 직접 대면한 러시아인 버스기사는 무뚝뚝한 데다
불친절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어쩌랴 피곤한 우리를 지금 숙소로 데려다
주고 있는데.. 하늘의 석양은 저렇게 불타고 있는데..
하여간 러시아에 대한 첫인상은 그랬다.
(소설 같은 역사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 빌려온 사진)
수많은 섬과 운하들이 300여 개의 크고 작은 다리로 연결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북쪽의 베네치아'로 불리며 러시아에서 가장 유럽다운
도시로 러시아와 유럽의 양식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제정 러시아 당시의 오랜 수도이기도 한 이곳은 러시아 역사의 중심지이자
짜르의 도시로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 불릴 만큼 아름다운 건축물과 푸시킨,
도스토예프스키, 차이코프스키 등 세계적 문화예술가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문화 예술의 상징적 도시이기도 하다.
이 도시가 건설되기 전 이곳에 처음 러시아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9세기경이나, 사람이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습지대였기에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곳이었다고 한다.
옛 노브고로드 공국을 거쳐 15세기 모스크바 공국의 일부가 되었지만
정작 18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표트르 대제가 스웨덴과의 북방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교통 및 군사적 요충지라고 판단, 이곳에 새로운 도시 건설의 계획을 세우고,
1703년 페트로바브로프스크 요새 건설을 시작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가 탄생하였다.
하지만 잦은 홍수로 인한 범람과 습지대인 이곳에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양의 돌이 필요했으며 이를 충당하기 위해 돌로 세금을 부과하는 법령을 만들어 도시의
초석을 세웠다고 한다. 이러한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 고된 노역으로 많은 사람이
희생되는 대가를 치렀는데 이때 죽은 노예를 습지로 던져버렸기 때문에 이 도시에는
뼈 위에 세운 도시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붙었다. 10년 만에 습지대였던 이곳에
많은 건물이 들어서자 표트르 대제는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이후에도 서구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등 예카테리나 2세를
거치면서 유럽의 중심 도시로 발전하면서 19세기 러시아 문화의
황금기를 구축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이 도시는 1825년 절대왕정에 대한 혁명운동인
'데카브리스트 난'을 비롯하여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
그리고 1917년 '2월 혁명과 '10월 혁명'까지 각종 혁명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1914년부터는 '페트로그라드'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후 10월 혁명에 성공한
볼셰비키 정부는 1918년 수도를 모스크바로 옮겼다. 1924년 볼셰비키 혁명의
지도자 레닌이 사망하자 이 도시는 그를 추모하며 '레닌그라드'로 이름을 바꾸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1941년 9월부터 약 29개월 동안이나 독일군에게 포위당한 채
저항하며 지켜낸 도시라 하여 '영웅의 도시'로 불리다가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면서 옛 이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다시 불리게 되었다.
몽골족의 오랜 지배로 후진국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가
이 도시를 건설하여 유럽의 문물을 전달하는 창구가 되면서 오늘날과 같은
강대국이 되었다. 러시아에서 모스크바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로
인구는 510만 명. 면적은 1,439km². 북위 59도 56분,
동경 30도 20분에 위치해 있다.
(여름궁전(페테르고프 궁전 Peterhof Palace) / 빌려 온 사진)
러시아에 와서 제일 먼저 찾은 여름궁전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외곽 핀란드 만이 보이는 곳에 있다.
검소한 실용주의를 추구했던 표트르 대제가 건설한 건축물 가운데
유일하게 호화로운 건축물이라고 한다. 표트르 대제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크고 호화로운 베르사유 궁전에 버금가는 거대한 궁전을 건축하도록 지시했다.
7층의 계단으로 이루어진 폭포, 64개의 분수, 금으로 도금한 조각과
장식품으로 꾸민 궁전은 면적이 800만m2가 넘는다고 한다.
여름 궁전은 규모는 물론이고 건물과 조형물, 산책로 등 대부분이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과 비슷한데, 이는 유럽을 방문했을 때 베르사유 궁전을
둘러본 표트르 대제가 러시아 왕가의 위용을 과시할 목적으로 베르사유
궁전보다 더 넓은 궁전을 건설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고..
(우리는 왕궁 왼쪽 정원 문으로 입장하여)
잘 가꾸어진 정원 숲길을 따라 조금 걸으니
여름별장인 금빛 왕궁이 나타났다.
(여름궁전의 하이라이트 대폭포)
이곳에는 60여 개의 분수와 2개의 동굴,
그리고 좌우 대칭인 양쪽 계단과 주변으로 200여 개의 조각상과
부조물들이 있다. 11시가 안된 시각, 아직은 화려한
조각상들도 조금은 적막한 듯..
(여름 정원은.. )
크게 위 정원과 궁전, 아래 정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정원의 규모가 그렇듯 볼거리가 많은데 부족한 것은 시간..,
궁전 내부는 물론 냅툰 분수가 있다는 윗정원은 아예 구경도
못하고, 궁전 외관과 아래 정원의 대폭포와 선착장을 거쳐
울창한 숲길을 걸어 본다.
(여름궁전은 핀란드 만에 접해 있다)
여름궁전(뻬째르고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는 것이 불편하다.
그나마 수중익선으로 이곳 선착장을 이용하는 방법이 가장 빠르고
편리한 편. 그러나 편리한 만큼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
요금이 편도 750RUB, 왕복 1,300RUB이나..
(11시가 되자 대폭포의 대표격인 삼손분수와)
동시에 60여 개의 분수들이 장엄한 음악에 맞춰
일제히 물을 뿜어내기 시작한다. 장관이다! 분수에서 흘러내린
물은 삼손 분수를 돌아 핀란드만으로 흘러 들어가는 구조로 되어 있다.
삼손 분수는 표트르 대제가 스웨덴과 '폴타바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는 분수라고 한다.
삼손이 사자의 입을 찢는 형상인데 삼손은 러시아, 사자는 스웨덴을 상징한다고 한다.
조각상들은 신화나 역사적 상징을 담고 있는데 페르세우스가 메두사의 머리를
자른 모습도 보이는데 이는 무슨 상징인지? 여름정원에는
삼손 분수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분수가 144개나 된다고..
(아쉽지만.. )
여기서 사나흘을 머문듯 아쉽지 않겠냐만
2시간 만이라니, 점만 찍고 떠나는 기분..
(니꼴라이 1세 기념비)
다시 시내로 들어와 찾은 곳은 성 이삭 성당.
먼저 맞은 것은 광장에 우뚝 서 있는 광장에 우뚝하게 서 있는
꼴라이 1세 기념비. 성 이삭 성당 주변에는 니꼴라이 1세 기념비와
또 다른 성당 앞쪽 강변 쪽에 표트르 대제의 청동 기마상이 있다.
이 기념비의 주인공인 니꼴라이 1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의 파블롭스크 궁전의
주인이었던 파벨 1세와 그의 아내 마리아 표도로브나의 셋째 아들이자 로노프 왕조의
11대 황제. 이 기마상 또한 청동 기마상과 마찬가지로 말 뒷굽만으로 동상을 지탱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 이 기념비는 이삭 성당의 설계자 몽페랑과 조각가 끌로드뜨에 의해
1859년에 세워졌으며 받침대 부분의 부조는 니꼴라이 1세 통치기간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을 묘사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삭 성당, 주변의 조명과 더불어 가장
아름다운 장소 중 하나로 꼽힌다. 이 동상의 뒤쪽으로 모이카 강을
지나는 도로가 있는데 폭이 가장 넓다는 '블루다리'이다.
(러시아 최대의 정교회 건물 성 이삭 성당)
성 이삭 성당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러시아 정교회의 성당으로 지어질 당시에는 러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
높이 101.52m, 성당의 둥근 천장이 21.83m, 길이가 11.2m, 폭이 97.6m인
이 성당은 64~114톤에 이르는 72개의 거대한 원형의 돌들로 둘러싸고 있다.
1만 4천명을 수용 규모. 원래 명칭은 ‘이삭키이예프스키 사보르’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아니라 달마티아의 성 이삭이라는 정교회 성인의
이름에서 따온 것. 달마티아의 성 이삭의 축일은 5월 30일인데 바로 그 날이
표트르 대제의 생일이기 때문. 웅장한 금빛의 둥근 지붕이 특징인 성 이삭 성당은
현재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제정시대 교회의 막강한 권력을 상징하듯 높이도
고층빌딩만해서 먼 곳에서도 잘 보인다. 내부에는 중앙에 있는 카를 브리쵸프의
작품을 비롯하여 성경의 내용과 성인들을 묘사한 예술가들의 많은 그림과
수 백점의 동상과 부조가 있다고 한다.
현재의 성 이삭 성당은 알렉산드르 1세 치세에 건립된 것으로
프랑스 출신 궁정 건축가 오귀스트 드 몽페랑의 설계에 따른 것이다.
몽페랑의 감독 아래 1818년부터 1858년까지 무려 40년에 걸쳐 지어졌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후에는 소련 정권 아래에서 박물관으로 이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다른 건물들처럼 소실될 위기에 처하였다.
당시 레닌그라드 포위전에서 성 100kg의 황금을 사용한 황금 돔이
독일군의 표적이 될 위험에 놓이자 돔을 회색으로 덧칠하였다고 한다.
소련 정권이 붕괴된 후 종교용 건물로 이용이 재개하고 있다.
입장료 : 성당 250 RUB, 전망대 300 RUB
(웅장한 크기의 출입문)
멀리서 볼 때도 웅장함이 느껴지지만 가까이 가니
그 크기가 압도했다. 또한 64개에 이르는 원통 대리석 기둥은
이탈리아에서 가져 왔고, 출입문은 9톤의 청동주물로 만들어졌다고..
성당 앞을 장식한 핀란드산 붉은 대리석은 무게가 125톤이나 된다고 한다.
전망대에 올라가 봐야 하는데 전망대는 고사하고 실내에 들어가 볼
시간도 없고, 여기까지 온 사람도 혼자.. 가야할 시간.
(표트르 대제의 청동기마상)
푸시킨의 대서사시 '청동의 기사'가 바로 이 기마상.
성 이삭성당에서 네바 강 쪽으로 작은 공원을 가로지르면 나타나는
상원 광장에 위치한 이 기마상은 프랑스 건축가 Etienne Falconet가
1872년에 완성하였다. 이 기마상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한 표트르 대제가
앞발을 들어 올린 말을 타고 오른 손으로 네바강을 가르키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 기마상이 위대한 조각물이라는 것은 무거운 청동 기마상을 말의 뒷발로만
지탱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발을 높게 들어 올린 것은 황제의 권위를 뜻하며
황제가 대북방 전쟁에서 승리한 것 나타내고 있다. 뒷다리로는 악의 상징인
큰 뱀을 밟고 있다. 앞다리를 높이 들고 있는 이 기마상은 에카테리나 2세가
표트르 대제 지배 100주년을 기념하여 만들었다. 1,600톤이나 되는 화강암에는
'표트르 대제에게 바친다. 에카테리나 2세 1782년'이라고 새겨져 있다.
표트르 대제에게 존경을 표하는 동시에 예카테리나 2세가 지도자
지위를 확인하려는 의도에서 만든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거리 풍경들..)
(기념품들.. 다산과 풍요를 뜻하는 러시아 전통인형)
러시아 전통인형 '마트료시카(Matryoshka)
러시아 전통 인형 '마트료시카'는 러시아의 기념품을 소개할 때
종종 소개되는 인형 속에 또 다른 인형들이 반복되는 제품.
'마트료시카'의 어원은 학설이 다양한데, 그 중 러시아어로 어머니라는 뜻의
'마티'에서 나왔다는 설, 러시아에서 여자아이에게 흔히 쓰는 마트료나
에서 나왔다는 설 등 다양하다. 이 '마트료시카'는 인형 속 인형들이
20피스 러시아 민속인형 마트료시카. 2,299 유로라면..
물경 우리 돈으로 300만원
(양쪽으로는 넓은 차로가 있고..)
차로 가운데 공원같은 인도가 나 있다.
인도를 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에르미타주 미술관)
에르미타주 미술관(The State Hermitage Museum)은
세계 3대 박물관 가운데 하나라는 명성에 걸맞게 전 세계 예술품을
골고루 소장한 에르미타주는 바로크 스타일의 기품있는 궁전으로 제정
러시아 황제의 거처였던 겨울 궁전과 네 개의 건물이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이 궁전은 원래 이처럼 방대하지 않았지만 표트르 대제가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죽은 후 러시아 황실과 귀족들의 피비린내 나는 당파 싸움 끝에 제위에 오른
표트르 대제의 딸 Jason이 오늘날의 겨울 궁전을 건설했다고 한다.
러시아는 예카테리나 대제 때에 문화의 황금기를 맞는다. 그녀는 밖으로
실내 정원이 나 있는 '시계의 방'에서 손님들을 접대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때 그녀는 겨울 궁전을 프랑스어로 '에르미타주'(은둔지)라고
즐겨 불렀는데 이것이 에르미타주 명칭의 유래이다.
1764~1787년 예카테리나 대제는 궁전 옆에 '小 에르미타주'와
'舊 에르미타주'를 건설하고, 겨울 운하를 따라 그것을 연결해 라파엘 회랑을
만들고, 1783~1786년에 에르미타주 극장을 만든다. 1799~1851년 니콜라이 황제가
화랑을 하나 추가로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新 에르미타주이다. 에르미타주가
출현한 1764년 당시 베를린의 네고니안트라는 갑부가 부채 대신 자기의 미술 소장품
225점을 러시아로 가져왔다. 일찍이 스몰니에 최초의 러시아 여성 학교를 세울 정도로
계몽주의에 심취했던 예카테리나 대제는 서유럽의 고품격 삶의 양식에 비해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러시아 귀족들의 생활 문화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 등의 부유한 귀족들과 자본가들은 예술 작품들을 수집하여
개인 화랑에 소장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는 개인 화랑은커녕
박물관조차 없었다. 이에 예카테리나 대제는 황제인 자신부터 화랑을 열기로 마음먹고
다양한 소장품을 구입하기 시작. 초창기에는 그림들을 전시할 곳이 없어 러시아 최초의
박물관인 쿤스카메라에 임시로 보관했다. 그 후 에르미타주에 미술관이 설립되면서
카벤첼레 공작(1768), 브를리 남작(1769), 크로자 남작(1772), 월 폴 총리(1779),
보뎅(1781), 나폴레옹의 황후 조제핀(1814) 등의 값진 소장품들을 구입했다.
그로 인해 에르미타주는 예카테리나 대제 때 이미 2,000여 점의
예술작품이 소장된 일류 화랑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에르미타주는 니콜라이 1세의 무지로
1,000점이 넘는 작품들이 경매에 나오게 되는가 하면,
사회주의 혁명 때는 화랑이 아닌 임시정부 회의장소로 사용되기도 하고,
수도가 모스크바로 옮겨지면서 모스크바 국립표현박물관에 많은
예술품들이 옮겨가는 등의 상당한 우여곡절을 겪었다고 한다.
1922년부터 국립 에르미타주 미술관으로 명명된 이곳은 현재 1,020여 개의 방에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루빈슨, 피카소, 고갱, 고흐, 르느와르,
푸생, 벨라스케스, 엘 그레코, 피사로, 마티스, 드가 등의 명화가 전시되어 있다.
이탈리아 등지에서 들여온 조각품들과 이집트의 미라부터 현대의 병기에 이르는
고고학적 유물, 화폐와 메달, 장신구, 의상 등 300만 점의 소장품이 전시되어 있고,
지붕 위에는 176개의 조각상이 있다. 가장 볼 만한 것은 서구 미술의 전시품으로
러시아, 이집트, 그리스, 로마, 페르시아, 터키, 인도, 중국, 비잔틴, 일본 등
세계의 고대 유물과 예술품이 많이 전시되어 있고, 고대 러시아 문화와
스키타이 문화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또 제정시대의 보석과 왕관 등도
지하 보물실에 전시되어 있다. 일부 작품(A급 이상)을
제외한 대부분 작품의 촬영이 허용된다.
개장 화,목~일 10:30-18:00 수 10:30-21:00
입장료 600 RUB, 매주 월요일은 휴관
(궁전광장 에르미타주와 마주보고 있는 신고전주의 건물)
길이가 무려 580m나 된다고 하는 러시아군 참모본부 건물.
러시아에서 주로 활동한 이탈리아 건축가 카를로 로시가 설계해 1829년 완공.
아치를 중심으로 사진 오른쪽은 웨스트윙(서관)에 러시아 참모본부가 들어 있어
이름이 그렇게 된 것 같은데, 현재 동관은 1993년 에르미타주 미술관 분관으로 내줘
전시장으로 리모델링하여 2013년부터 칸딘스키, 피카소, 마티스 같은 유명 화가의
작품을 전시하여 관람객을 받고 있다고 한다.
(에르미타주에 들어서자마자 황금 장식이..)
(50)
(에르미타주에서 웨딩 촬영을 하는 듯..)
(Armorial hall은 완전 황금장식.. 황금기둥)
(1812 전쟁 갤러리)
러시아 영토 확장에 기여한 인물들이 초상화로 양 벽면 가득히 그려져 있다.
(57)
(58)
(황금촛대와 황금으로 장식된 기둥)
(60)
(천장 장식)
(이 방은 마루바닥도 천장과 똑같은 문양으로..)
고급 목재로 마루 바닥을 깔았는데 바닥의 문양과
천장의 문양이 똑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표트르 대제와 그가 앉았던 황금의자)
표트르(1672. 6. 9 ~ 1725. 2. 8)는
43년간 재위(공동:14년/1682.6~1696.2, 단독:29년/1696.2.~1725.2)했다.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황제. 업적 덕에 표트르 대제(표트르 벨리키)로
불린다. 영어식 발음인 '피터 대제', '피터 1세'라고 부르기도 한다.
표트르는 킵차크 칸국의 지배 때문에 서유럽과 교류가 단절되어
중세 수준의 문화에 머물러 있었던 러시아를 발전시키기 위해 급진적으로
서구화를 밀어붙인 지도자로 러시아에서는 대체적으로 서구의 문물을
들여와 국가를 발전시킨 위대한 개혁 군주로 평가받고 있다. 지나친 서구화의
반발로 여러 번의 정변이 있었으나, 모두 피의 숙청으로 마무리했고, 스웨덴과의
대북방전쟁에서 대승해서 변방의 국가였던 러시아가 이후 서유럽에 주요 정치세력으로
당당히 등장할 수 있게 했다. 표트르 대제의 업적을 무시할 수 없는 일은, 오늘날
러시아인들의 생활 속에 남아있는 대부분의 문물들을 모두 표트르 대제가 도입했던
것이다. 러시아인들이 제2의 빵이라고 여기는 감자와 커피, 담배는 모두
표트르 대제가 서구를 여행하면서 발견하고 러시아에 들여왔던 문물이다.
표트르 1세의 무모한 야심 때문에 수많은 러시아인들을 비참하게
죽인 것에 대해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한다.
여러모로 훗날의 이오시프 스탈린과 비견되는 인물로
스탈린이 존경한 사람이기도 하다. 키가 204cm로 엄청나게 컸다.
게오르기 홀(대옥좌관)에 있는 황금의자에는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독수리가 장식되어 있는데, 이 두 머리를 가진 독수리는 러시아가
동서로 영토를 길게 뻗어 있어 이런 문양을 만들었다고 한다.
(66)
(정교하게 새긴 목각도..)
(파빌리온 전시관의 황금 공작새 시계)
(이 그림들은 세밀한 모자이크화)
제일 인기있는 방 중의 하나인 이 방은 황금공작새 시계뿐만 아니라
작품들과 방의 바닥, 바닥의 모형까지 모자이크화로 만들어져 있다.
(에르마타지 박물관의 명물 황금 공작새 시계)
에르미타주 미술관을 돌아보는 중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
예카테리나 2세가 음탕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
'황금공작새 시계"라 할 수 있다. 예카테리나 2세는 정부를 50여 명이나 두었다는데
그 중 한 정부가 예카테리나 2세에게 잘 보이려고 이 공작 시계를 선물한 것이라고..
이 시계는 아직도 작동하며, 정해진 시간에 황금공작새가 꼬리를 펼쳐서 움직인다.
18세기 후반 영국의 기계공학자 제임스 콕스의 작품
아래 동영상 확인
황금공작새 시계 작동 영상
(렘브란트의 대표작 '돌아온 탕자')
'돌아온 탕자'는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내용.
성경에 한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신의 몫의 재산을 미리 달라고
요청했고, 그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난 다음 집으로 돌아와 용서를 구한다.
그새 늙어버린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나무라는 대신 좋은 옷과 신발, 가락지를
끼워주라 말하며 잃어버렸던 아들을 다시 찾은 것을 축하하기 위해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인다.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는 집으로 다시
돌아온 아들이 아버지에게 무릎을 꿇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렘브란트는 돌아온 아들의 시선과 감상자의 시선을 일치시킨다.
감상자가 초라한 모습의 아들을 자애로운 눈빛과 손길로 맞아주는 아버지를
아들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배치한 것. 누더기 옷과 다 해진 신발을 신고
늙은 아버지의 품에 안긴 아들의 얼굴을 정확히 볼 수는 없지만 뒷모습만으로도
그가 깊은 회한에 잠겼음을 감지할 수 있다. 특히 시커먼 발바닥을 드러낸 채
무릎을 꿇은 아들의 모습은 오갈 데 없는 그의 처지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림 속 아버지가 두르고 있는 붉은 망토는 관용과 용서를 상징한다.
이에 반해 돌아온 탕자를 어둠 속에서 지켜보고 있는 이들의 시선은 냉정하다.
오른 편에 서 있는 이는 탕자의 형으로 탕자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이나
제스처와 상반된 모양을 하고 있다. 탕자의 형의 뒤편으로 보이는
한 구경꾼은 가슴을 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여성으로
추정되는 다른 구경꾼은 관망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루벤스의 '십자가에서 내림')
루벤스의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리는 다른 작품도 유명한데,
이 그림은 발가락에 맺힌 핏방울이 금방이라도 떨어질듯..
(에뎀팔코네의 '애기천사'와 사계절(?))
보면 볼수록 오묘한 매력을 발산하는 아기천사.
그리고.. 아래 그림은 꽃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나타내고 있어
조각상 이름이 사계절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어디에도 내용을
찾을 수 없군요? 혹시 조각상 이름 아시는 분?
(카페트의 방을 지나..)
양 벽면에는 정교하게 제직된 대형 카페트들이 걸려있다.
이 카페트들의 가격은 카페트의 넓이와 동일 면적으로 금화를
(예카테리나 2세(Ekaterina II)의 초상화)
예카테리나 2세는 프로이센 슈체친 출생으로
독일 공국의 공녀로 정치적 계략에 의해 러시아 황태자와
결혼하여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8번째 군주가 된 여황제.
1762년 남편 표트르 3세를 폐위시키고 제위에 올라 대제라 불렀다.
법치주의의 원칙을 도입함과 동시에 귀족들과 협력체제를 강화했다.
계몽주의 사상에 감명, 볼테르 등과 교류하며 학예와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1767년에 소집한 사회 각층의 대표로 이루어진 법전편찬위원회에 새로운
정치원리를 해설하는 훈시를 함으로써 계몽군주로서의 평판을 얻었다.
그러나 그 법전의 편찬은 성과를 얻지 못하였고, 1773년에 일어난
'푸가초프의 반란' 이후 현실주의자가 되었다. 1775년의 지방행정 개혁,
1785년의 귀족 특권 인가장 등으로 법치주의 원칙을 도입함과 동시에
귀족들과의 협력체제도 강화하였다. 프랑스혁명 발발 뒤에는
반동화하여 자유사상을 탄압하기도 하였다.
표트르 대제 이후 가장 부강한 러시아를 만든 인물이다.
대외적으로는 전쟁을 통해 러시아 영토를 넓혔고 낙후되었던 러시아의
문화를 유럽과의 교류를 통해 향상시켰다. 현재 에르미타지 미술관이 된
겨울궁전에 모은 미술품들은 예카테리나 2세 치세 때 모은 것들이다.
눈에 보이는 러시아의 부강은 수천만 러시아 백성들의 고통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예카테리나 2세는 자신의 고귀한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정확히 진단하지 못한 채 권력에 파묻혀 있었다.
아들 파페르와 불화가 심한 반면, 손자 알렉산드르를 편애하여
자유주의 교육을 시켰으며, 음탕하고 사치스런 생활을 보냈다.
가까운 여러 총신에게 국유지와 농민을 덧붙여
하사함으로써 농노제를 확장하였다.
(자기로 만든 꽃들..)
몇 종류의 꽃들이 더 전시되어 있었는데 이 작품들은
최근의 작품인듯. 어떻게 저렇게 정교하게 만들었을까하며 호기심이
발동하여 더 살펴보고 싶건만 그 마저도 용납되지 않는 일정이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자유여행으로 와서 제대로 살펴봐야 하는 것.
그래봤자 300만점의 작품 중 몇 작품이나 볼 수 있겠나 싶기도
하지만 보고 싶은 것 하나라도 제대로 볼 수 있을 테니까!
(사진을 찍어도 되냐니 포즈를 취해 준다.)
이번 여행에서 난감했던 것은..
만국 공통어인 미소가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사회주의 국가를 거친 나라들은 미소가 괜한 어떤 속셈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 아닌가 하고 일단 경계를 한다고 했다. 그런 것 같았다.
미소를 보내면 무표정하거나 인상을 쓰는 모습도 보였는데
(폭이 제일 넓다는 블루다리)
저 끝에 피의 구세주 성당이 보인다.
카잔성당에서 돔 끄니기 쪽으로 길을 건너
그리보에도바 운하 다리에서 보면 성당이 보인다.
(네바 강과 운하 유람선 투어)
에르미타지 미술관 관람을 마치고 오늘 마지막 일정으로
네바 강(라도가 호에서 핀란드 만으로 흘러드는)과 운하 유람선 투어 시간.
300여 개의 크고 작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는 운하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시내 중심부인 넵스키 대로를 가로지르는 모아가, 그리도바, 폰탄카 운하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강과 운하투어가 볼거리를 제공한다. 골목골목을 누비는 느낌의
보트투어는 시내 도보 중심의 여행과 또 다른 재비와 감동을 선사한다.
러시아의 베니스'라고 불릴 정도로 수많은 섬을 다리로 연결하여 만든
계획도시. 운하가 있는 곳엔 유람선 타는 곳이 널려 있다.
(인류학 박물관)
날씨가 간간히 비도 뿌리고 바람도 불어 기온이
많이 낮아 초겨울 날씬데 복장은 여름 복장이라 한기를 느낄 정도.
선실로 들어가면 추위는 피하련만 그래도 제대로 보려면 선상에
있는 것이 나을 것 같아 고집스레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날씨가 흐려 건물의 색도 선명하지 않다.
(88)
(페트라바블롭스크 요새)
네바 강을 사이에 두고 겨울 궁전인 에르미타주 미술관과
마주 보고 있는 자야치(토끼)섬은 이곳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의 초석이 된 곳.
표트르 대제는 1703년 네바 강 삼각주에 위치한 이 섬에 스웨덴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요새를 짓기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흙으로 지어 1년 만에 6개의 방어 성벽이 세워졌다.
그 후 1706년부터 견고한 요새를 만들고 다시 돌로 성벽을 쌓기 시작했으나 표트르 대제는
성벽이 완성되기 전에 죽고 예카테리나 2세에 의해 완벽한 화강암 요새로 완성되었다.
이 요새는 원래 목적으로 사용된 적은 없었다고 한다. 내부에는 이 요새의 랜드마크인
뾰족한 첨탑 모양을 한 페트로파블롭스크(베드로와 바울)성당과 정교하게 만들어진
표트르 대제의 동상, 박물관, 정치범 형무소 등이 있다.
(크고 작은 유람선들이 유람객들을 태우고는..)
(옛 영도다리같이 다리 상판이 들린다는 궁전 다리)
에르미타주 미술관이 있는 궁전 광장에서
네바 강 쪽으로 보이는 다리. 넵스키 대로가 있는 중심지역에서
바실리 섬을 연결하는 길이 250m. 자정을 넘어 이곳을 지나는
큰 선박들의 통과를 위해 올리는 다리로 네바 강의
다리 중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고 한다.
(정박해 있는 바이킹 선은 레스토랑)
(멀리 삼성과 기아의 이름이 보인다)
(터널을 빠져 나가듯 )
다리 밑을 지나면 또 다른 건물들이 나타나고..
(난간을 문장으로 장식한 다리도 지나고..)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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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다리.. 다리 중간에 있는 구멍은..)
중죄인을 가두어 둔 감옥이라는데..
바다의 물이 차오르면 저 부분까지 물이 차오른다는데..
물이 들기 시작할 때 죄수가 느끼는 공포감이란..
(113)
(라스트랄 등대와 증권거래소)
바실리 섬에서 가장 눈에 뜨는 것은 32m 높이의 달하는
2개의 빨간색 기둥 건축물. 뱃머리 모양의 장식을 한 이 기둥은
예전에는 등대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모양의 건축물은 해전의 승리와
자국 해군의 위대함을 상징하는 의미라고 한다.
(다리 난간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시민들)
(구 해군성도 멀리 조그맣게 보인다)
네바 강은 강폭이 넓고 수량이 많아 강변의 큰 건물들도 작아 보인다.
(시원 섭섭)
유람선 투어는 1시간 정도 걸렸는데 날씨도 흐리고
비도 부슬부슬 내려 사진도 제대로 못 찍고.., 바람까지 불어 추위에
고생만.. 유람선 투어는 야경투어가 제일이고 야경투어는 세느 강이 좋지.
세느 강 야경보다는 부다페스트 야경이 더 좋았던 것 같지만.. 네바 강 야경
투어는 자정이 넘어야 가능하다니 다음날 일정을 포기하면 모를까 이렇게
바쁜 일정 속에서는 네바 강 야경 보기는 쉽지 않은 일 같다.
네바 강 유람선 투어는 2% 부족하게 마친 것 같다.
(배를 만들고 있는 표토르 대제 조각상)
러시아 해군 창설 300주년을 기념하여 네덜란드가 선물한 것.
표토르 대제는 외국 문물을 배우기 위해 1년 반 동안 유럽을 돌면서
직접 노동에 종사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해군의 역사는 표트르 1세 때인 1693년에 러시아에 첫 조선소를 건설했고,
1699년 해군을 창설했다. 1703년 이곳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 발트 해 함대의
본거지가 되어 1712년 항괴해전에서 스웨덴을 격파해 발트 해의 패권을 장악했다.
이후 큰 힘을 과시하지 못하다가 19세기 이후 해군력을 과시하다 러일전쟁 때
극동함대가 괴멸되면서 러시아 해군도 괴멸상태가 되었는데 1917년 러시아 혁명 때
순양함 오로라 호에서 10월 혁명이 일어나 러시아 제국 해군이 막을 내렸다.
러시아 혁명 후 소련 해군으로 재집결되면서 제2차 세계대전 시에는 세계 최대의
잠수함대를 보유하고 제2차 세계대전 후 잠수함대를 증강했고, 1970년 경부터
미국 해군에 대응해 대양해군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미사일 구축함, 순양함,
원자력 순양함, 키예프급 항공모함, 쿠즈네초프급 항공모함 등을 취역시키고
원자력 항공모함 울리야노프스크급 건조에 착수했으나
소련 붕괴와 함께 소련 해군력의 증강은 중지되었다.
러시아 연방 해군은 소련 해군을 계승하기는 했지만
러시아 경제의 악화로 해군 전력도 많이 약화되었다.
현재, 러시아 해군은 북방 함대, 태평양 함대, 발트 함대, 흑해 함대,
카스피 소함대 등 4개 함대와 1개 소함대로 구성되어 있다.
근래 군비 축소로 해군력은 계속 약화되고 있다.
(러시안의 아파트와 다차 문화)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에서는 단독주택을 볼 수 없다.
아파트는 토지를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측면도 있지만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주민을 동원하는데도 편리하였을 것 같다. 여하튼 시내에서는 단독주택은 볼 수 없고
오래된 저층 아파트에서 신식 고층 아파트까지 각양각색. 그러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비롯한 도시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아파트에만 갇혀 사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시민이
주말이나 휴가철에 자연을 즐기기 위해 도시 외곽에 다차(dacha)를 보유하고 있다.
다차가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피터대제 때로 보고 있다. 초창기에는 러시아의 황제
짜르가 왕실 노예와 하인에게 하사한 성지 밖의 작은 소유지를 의미했다.
이후 계몽주의 시기에는 귀족들의 사교 모임이나 가면무도회 등을 위한 장소로
이용되었고, 산업혁명으로 인하여 도시의 인구가 급증함에 따라, 중산층의
도시 거주민들은 복잡한 도시를 벗어나기 위해 도심밖에 위치한
이 다차를 휴양지로 여기기 시작했다.
러시아 정부가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에 걸쳐
다차를 갖고 싶어하는 직장인들에게 600㎡의 땅을 무상으로 분배하면서,
다차는 러시아인들의 삶 깊숙이 자리잡았다. 다차는 주로 통나무집으로 되어 있고,
나무 집과 함께 우리 식의 텃밭 같은 모양으로 농작물을 직접 가꿀 수 있는 농토가
달려 있다. 눈여겨 볼만한 것은 다차는 전문업자를 불러 뚝딱 짓지 않는다는 것.
시간이 걸리더라도 계획을 세울 때부터 가족들이 나름대로 각자 역할을 분담하여
나무를 자르고, 집을 함께 짓는다고 한다. 시간이 필요하면 시간을 기다리고
돈이 없으면 돈을 모아 가면서 천천히 정성을 다해 만들어 간다고 한다.
러시아인들은 가족들과 다차 마을에서 주말이나 여름 휴가철에 텃밭을 일구며
일용양식을 마련하기도 하는데, 지금은 이런 다차 문화가 보드카, 사우나,
발레와 함께 러시아인들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상이 되었다고 한다.
다차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러시아의 휴가문화는 주말농장에서
가족과 함께 자연 속에서 채소나 감자 등을 직접 가꾸며
시간을 보내는 생산적인 휴가문화이다.
(러시아는 세계 2위의 산유국)
한화로 계산하면 휘발유 1L가 700원에서 765원
디젤유도 가격도 비슷한 수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들어와서 모스크바로 나간다.
러시아를 여행해 보려 했는데 미리 오게 된 것 같다. 러시아에 대한 이미지는
바로 잡을 수 있는 것. 여행은 잘못된 상식과 편견까지도 교정해 주고 겸손하게 만든다.
그러나 여러 정치적 상황을 거치면서 무뚝뚝해진 표정과는 다르게 생활 깊숙이
자리 잡은 다차 문화가 러시아인들의 생활에 활력소가 되고 있다는 것은 이번
여행에서 러시아를 이해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 것 같다.
여행은 설렘으로 다가왔다가 끝날 때는 늘 아쉽다.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고골, 고리키 등 러시아문학의 산실이었던
정말이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그냥 작은 점 하나 콕 찍고 가는 느낌이다.
이 점들이 실선까지는 못 되더라도 얼기설기 점선으로나마 연결되기를 기대해 본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틀 밤을 묶고, 이제 본격적으로 북유럽을 만나기 위해
핀란드로 넘어가려는데, 입국할 적에는 출국신고서까지 직접 작성해 주더니만
출국할 때는 여간 성가시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다시 에스토니아에서
육로로 입국할 때 당한 황당했던 사건과는 비교할 바 아니기도 하지만
스쳐 가면서 러시아의 참모습을 살짝 엿본 것 같다.
차이코프스키의 발레 조곡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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