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좋은글/詩(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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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가 그리운 날
안부가 그리운 날 / 양현근 사는 일이 쓸쓸할수록 두어 줄의 안부가 그립습니다. 마음 안에 추절추절 비 내리던 날 실개천의 황토빛 사연들 그 여름의 무심한 강역에 지즐대며 마음을 허물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를 완전하게 벗는 일이라는 걸 나를 허물어 너를 기다릴 수 있다면 기꺼이 죽으리라고.. 세상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내릴 거라고.. 사는 일보다 꿈꾸는 일이 더욱 두려웠던 날들 목발을 짚고 서 있던 설익은 시간조차도 사랑할 줄 모르면서 무엇인가 담아낼 수 있으리라 무작정 믿었던 시절들.. 그 또한 사는 일이라고 눈길이 어두워질수록 지나온 것들이 그립습니다. 터진 구름 사이로 며칠 째 먹가슴을 통째로 쓸어내리던 비가 여름 샛강의 허리춤을 넓히며 몇 마디 부질없는 안부를 묻고 있습..
2021.02.28 -
세월은 / 조병화
세월은 / 조병화 기쁨보다는 슬픔을 더 많이 남기고 갑니다 봄 여름이 지나가면서 가을을 남기고 가듯이 가을이 지나가면서 겨울을 남기고 가듯이 만남이 지나가면서 이별을 남기고 가듯이 사랑이 지나가면서 그리움을 남기고 가듯이 아, 세월 지나가면서 내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빈 자리를 남기고 갑니다.
2020.06.12 -
안중근 옥중 마지막 순국시
옥중 마지막 순국시 / 안중근 북녘 기러기 소리에 잠을 깨니 홀로 달 밝은 누대 위에 있었다 언제고 고국을 생각지 않으랴 삼천리가 또 아름답다 형제의 백골이 그 삼천리 땅속에 의의하고 부조(父祖)는 청산에 역력하다 우리 집에는 무궁화가 만발해서 기다리고 있고 압록강의 봄 강물은 돌아가는 배를 가게 해준다 남자가 뜻을 육대주에 세웠으니 일이 만약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죽어도 조국에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나의 뼈를 어째서 선영에다 묻기를 바랄소냐 인간이 가는 곳이 이 청산(靑山)인 것을 나막신과 대지팡이로 동네를 나오니 강둑의 푸른 버드나무가 빗속에 즐비하다 모든 벌이 어찌 금곡주(金谷酒)와 같겠는가 무릉도원을 배타고 찾는 것이로다 여름의 풍류는 인간이 다 취하고 가을은 세상일이 손님이 먼저 들기를 기다린다..
2020.03.25 -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 랜터 윌슨 스미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 랜터 윌슨 스미스 큰 슬픔이 거센 강물처럼 네 삶에 밀려와 마음의 평화를 산산조각 내고 가장 소중한 것들을 네 눈에서 영원히 앗아갈 때면 힘든 순간마다 네 가슴에 대고 말하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끝없이 힘든 일들이 네 기쁨의 노래를 멈추게 하고 너..
2020.03.01 -
하도 햇볕이 다냥해서 / 신석정
하도 햇볕이 다냥해서 / 신석정 하도 햇볕이 다냥해서 뱀이 부시시 눈을 떠보았다. - 그러나 아직 겨울이었다. 하도 땅속이 훈훈해서 개구리도 뒷발을 쭈욱 펴보았다. - 그러나 봄은 아니었다. 어디서 살얼음 풀린 물소리가 나서 나무움들도 살포시 밖을 내다보았다. - 그러나 머언 산엔 눈이 하얗다. 핸 멀찌막히 `경칩(驚蟄)'을 세워 놓고 이렇게 따뜻하게 비췰 건 뭐람? - 그러나 봄 머금은 햇볕이어서 좋다. 미치고 싶도록 햇볕이 다냥해서 나도 발을 쭈욱 펴고 눈을 떠본다. - 그러나 `입춘(立春)'은 칼렌다 속에 숨어 하품을 하고 있었다. 『빙하(氷河)』 정읍사, 1956 신석정(辛夕汀 본명 : 錫正, 1907년∼1974년) 1907년 전북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 태생,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2..
2020.02.05 -
나이 / 이븐 하짐
My age is an hour. cuz the moment is really all my life. 내 나이는 한 시간. 왜냐하면 그 순간만이 정말로 나의 모든 삶이었으니까. 나이 / 이븐 하짐(Even Hazim) 누군가 나에게 나이를 물었지. 세월 속에 희끗희끗해진 머리를 보고 난 뒤 내 이마의 주름살들을 보고 난 뒤. 난 그에게 대답했지. 내 나이는 한 시간이라고. 사실 난 아무것도 세지 않으니까. 게다가 내가 살아온 세월에 대해서는. 그가 나에게 말했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설명해 주세요. 그래서 난 말했지. 어느 날 불시에 나는 내 마음을 사로잡은 이에게 입을 맞추었지.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입맞춤을. 나의 날들이 너무도 많지만 나는 그 짧은 순간만을 세지. 왜냐하면 그 순간이 정..
2020.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