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좋은글/詩(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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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크는가? / 박노해
사람은 무엇으로 크는가? 박노해 사막에서 새 풀을 찾아 쉴 새 없이 달리는 양들은 잠잘 때와 쉴 때만 제 뼈가 자란다. 푸른 나무들은 겨울에만 나이테가 자라고 꽃들은 캄캄한 밤중에만 그 키가 자란다. 사람도 바쁜 마음을 멈추고 읽고 꿈꾸고 생각하고 돌아볼 때만 그 사람이 자란다. 그대여, 이유 없는 이유처럼 뼈 아프고 슬프고 고독할 때 감사하라, 내 사람이 크는 것이니. 힘들지 않고 어찌 힘이 생기며 겨울 없이 어찌 뜨거움이 달아오르며 캄캄한 시간 없이 무엇으로 정신의 키가 커 나올 수 있겠는가.
2019.10.25 -
가을 / 김현승
가을 / 김현승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더니 가을은 머나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봄과는 달리 별을 생각으로 깎고 다듬어 가을은 내 마음의 보석을 만든다. 눈동자 먼 봄이라면 입술을 다문 가을 봄은 언어 가운데 네 노래를 고르더니 ..
2019.10.23 -
스위치 / 최호일
스위치 / 최호일 어린 나비 한 마리가 바위의 가슴에 앉는 찰나 바위는 금이 갔다 찬란한 생성의 힘 어둠의 몸통이 흰 뼈를 내보이며 망설이고 있다 천년의 침묵은 보람도 없이 쩡 깨져 버린다 금의 틈새에 마악 도착한 햇빛이 묻고 이제 싹 틔울 씨앗 하나 즐겁게 접속된다 꽃이 피고 그것은 언제나 환한 중심이 되었다 꽃의 얼굴은 늘상 개폐의 원리를 따른다 신나게도 그리움의 회로를 타고 와 내 안에 불이 켜지는 그 최호일 시인 충남 서천 출생 2009년 월간 《현대시학》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 『바나나의 웃음』 문예중앙, 2014
2019.10.12 -
선인장 / 한승희
선인장 / 한승희 부서지게 안아 봐라 아픔도 인생이다 사막을 깨우는 건 가시의 힘 그 힘으로 해가 뜨고 모래바람 속에서도 낙타가 길을 찾는다 ......................................... 한승희 시인 충남 공주 출생. 경기 광주 문인협회 지회장.
2019.09.14 -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1 / 이기철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1 / 이기철 어떤 노래를 부르면 내 한번도 바라보지 못한 짐승들이 즐거워질까 어떤 노래를 부르면 내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들도, 까치도 즐거워질까 급히 달려와 내 등뒤에 連座한 시간들과 노동으로 부은 소의 발등을 위해 이 세상 가장 청정한 언어를 빌어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날(日)을 노래하고 싶다 나이 먹기 전에 늙어버린 단풍잎들은 내 가슴팍을 한 번 때리고 곧 땅속으로 묻힌다 죽기 전에 나무둥치를 감고 타오르는 저녁놀은 地上의 죽음이 저렇게 아름답다는 것을 가르치는 걸까 살이 연한 능금과 배들은 태어나 첫번째 베어무는 어린 아이의 갓 돋은 치아의 기쁨을 위해 제 살을 바치고 群集으로 몰려오는 어둠은 제 깊은 속에다 아직 밤길에 서툰 아기 짐승을 위해 군데군데 별들을 박아 ..
2019.09.02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 / 백창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 / 백창우 나 정말 가벼웠으면 좋겠다 나비처럼, 딱새의 고운 깃털처럼 가벼워져 모든 길 위를 소리 없이 날아다녔으면 좋겠다 내 안에 뭐가 있기에 나는 이렇게 무거운가 버릴 것 다 버리고 나면 잊을 것 다 잊고 나면 나 가벼워질까 아무 때나 혼자 길을 나설 수 있을까 사는 게 고단하다 내가 무겁기 때문이다 내가 한 걸음 내 디디면 세상은 두 걸음 달아난다 부지런히 달려가도 따라잡지 못 한다 다 내가 무겁기 때문이다 나 정말 가벼웠으면 좋겠다 안개처럼, 바람의 낮은 노래처럼 가벼워져 길이 끝나는 데까지 가 봤으면 좋겠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 신어림, 1996 백창우 시인, 작사, 작곡가, 음악 프로듀서 본명은 백남욱. 1960년 의정부 출생 어린 시절은 서울..
2019.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