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좋은글/詩(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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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려오는 파도가 아름답다 / 김광선
밀려오는 파도가 아름답다 / 김광선 내 생(生)의 높이가 무너지고 어둠이 내릴 때 그 무너짐이 한없이 아름다웠다 사랑이 죽고, 정의가 죽고, 문학이 죽은, 그 비인 자리에 진정한 바다가 있었으므로 바다가 되기 위해 무너지는 파도가 아름다웠다. 절망하지 않고 우는 법을 모르는 나를 위해 한계를 맛보지 않고는 굴복치 않는 나를 위해 무너지는 파도는 내게 스승이었다. 무너지지 않고는 다시 일어 날 수 없으므로, 바람에 무너졌다 일어서는 파도는 내게 스승이었다. 무너지면 일어서고 일어나면 무너지는 파도여! 너는 무엇으로 다시 일어서는가? 파도를 잉태한 티 없이 푸른 바다의 자궁은 그 고요한 생명의 텃밭에서 기도처럼 강한 호흡으로 파도를 키워 냈다. * 하신 신(神)의 명령 따르기 위해 바다는 순결한 호흡으로 파..
2019.06.28 -
내가 언제 / 이시영
내가 언제 / 이시영 시인이란, 그가 진정한 시인이라면 우주의 사업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언제 나의 입김으로 더운 꽃 한 송이 피워낸 적 있는가 내가 언제 나의 눈물로 이슬 한 방울 지상에 내린 적 있는가 내가 언제 나의 손길로 광원(曠原)을 거쳐서 내게 달려온 고독한 바람의 잔등을 잠재운 적 있는가 쓰다듬은 적 있는가 『무늬, 문학과지성 시인선 137』(1994), 문학과지성사. 이시영 (시인, 출판인) 1949년 전남 구례에서 출생 서라벌예대 문창과를 졸업, 고려대 대학원 국문학과에서 수학. 19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조가, 『월간문학』 신인작품공모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2012년부터 4년간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을 역임했고, 현재 현재 창작과비평사 대표이사 부사장, 단국대 문예창..
2019.06.23 -
영혼이 썩지 않게 하는 방법 / H. 데이빗 소로우
영혼이 썩지 않게 하는 방법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우리가 가진 생각이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그밖의 다른 것들은 단지 우리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불어 가는 바람이 쓰는 일기에 불과할 뿐이다. 자신의 집에서도 여행자처럼 살라. 산책길에 주운 마른 나뭇잎이 바로 우리가 여행에서 찾고자 했던 그 무엇이 아닌가. 여행이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던가. 자신이 속한 곳이 아닌 다른 어딘가에 이상적인 나라가 있다고 믿는 사람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소유 지향적인 삶과 존재 중심적인 삶,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라. 그들에게 스스로 무게를 갖게 하라. 겨울날 아침, 단 하나의 사물이라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데 성공한다면, 비록 그것이 나무에 매달린 얼어붙은 사과 한 개에 불과..
2019.05.27 -
추락을 꿈꾸며 / 이수익
추락을 꿈꾸며 / 이수익 최고봉이 수직에 가까운 급경사를 이룸으로써 하늘의 뜻과 가까워지려는 듯. 만년설 덮인 해발 4,487미터의 마터호른 산은 오늘도 은빛 낭떠러지 빙벽에 매달린 알피니스트들을 조용히 거부하듯 밀어내지만 저 죽음의 향기에 마취된 이들은 벼랑이 뿜는 현란한 추락의 상상력에 몸을 떨며 천형(天刑)처럼 암벽을 기어오른다. 세상의 때를 묻히고 싶지 않은 고고한 산이 날카롭게 세우는 죽음이 벼랑 아래로 아득하게, 죽음에 취한 이들이 걷는 길이 있다. 출처 : 시집 『푸른 추억의 빵빛』(고려원, 2007) 이수익(李秀翼, 1942년 11월 28일 ~ ) 경상남도 함안에서 출생하였다. 1962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 가 당선되어 등단. 이후, 시 동인지 《현대시》에서 본격적으로활동하였다. 이..
2019.04.15 -
이 모든 아픔 언제쯤 / 원태연
이 모든 아픔 언제쯤 / 원태연 처음에는 서러웠어요 밤새 뒤척이며 서글픈 눈물 알아서 닦아야 했어요 조금 더 울다 외로워졌어요 어디를 가도 혼자라는 생각에 어떠한 만남이든 둘이 있으면 무작정 부러웠어요 그러고는 그리워졌어요 그 웃음이, 눈빛이, 표정이, 목소리가 사무치도록 그리웠어요 알고 싶지 않았어요 쓸쓸함만은 친구도 만나보고 술도 마셔보고 정신없이 얘기도 해보고 그랬는데 봄바람처럼 피해지질 않아요 얼마나 더 아파야 웃으며 떠올릴 수 있을까요 얼마나 더 울어야 눈물이 마를까요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1992), 자음과모음. 원태연(1971년 5월 21일 ~ ) 서울에서 태어난 대한민국의 시인, 작사가, 영화감독. 미성중학교, 한영고등학교, 경희대학교 체육학과를 졸업 ..
2019.03.27 -
박수 갈채를 보낸다 / 유안진
박수 갈채를 보낸다 / 유안진 춘설은 차라리 폭설이었다 겨울은 최후까지 겨울을 완성하느라 최선을 다했다 핏덩이를 쏟아내며 제철을 완성하는 동백꽃도 피다 진다 칼바람 속에서도 겨울과 맞서 매화는 꽃 피었다, 반쯤 넘어 벙글었던 옥매화는 폭설을 못 이겨 가지째 휘어지다 끝내는 부러졌다. 겨울 속에 봄은 왔고 봄속에도 겨울은 있었다 두 시대가 동거해야 하는 불운은 항상 앞선 자의 몫이었다 정작 봄이 무르익었을 때는 매화는 이미 꽃이 아니다 앞서가는 자는 항상 이렇다 불행하지 않으면 선구자(先驅者)가 아니다 지탄 받는 수모 없이 완성되는 시대도 없다 춘설도 동백꽃도 꽃샘추위도 제 시대를 완성하고 죽는 후구자(後驅者) 그 사람들인 것을. 출전 : 『다보탑을 줍다』(창비. 2004) 유안진(柳岸津, 1941. 10..
2019.03.17